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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회에서 소외시킨 돌봄

등록 :2022-11-23 09:50수정 :2022-11-23 13:00

김준혁의 의학과 서사(67)
‘사랑의 노동’, 돌봄의 위기를 진단하다
에두아르 마네의 ‘빨래’(1875)
에두아르 마네의 ‘빨래’(1875)

내겐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이 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도움을 얻어왔고 지금도 그렇지만, 아이를 돌보는 일은 늘 어렵다. 어릴 땐 먹이고 씻기고 입히는 일 자체가 고된 일이었는데, 이젠 학습과 학교생활, 교우 관계 등에 신경을 쓰게 되었다.

또 같은 집에서 살진 않지만, 집안엔 편찮으신 어르신들이 있고 계속 마음을 써야 한다. 물론 시간을 들이는 경우도 드물게 있다. 하지만 별로 돌보아드리지 못한다는 게 더 큰 마음의 짐이 된다. 그리고 이런 상황들의 무게는 끊임없이 나를 괴롭힌다.

나는 어릴 때부터 집안일을 해 왔다. 어머니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셨기에 청소, 빨래, 설거지는 기억나지 않을 때부터 내 일 중 하나였다. 유일하게 내게 주어지지 않았던 일은 요리였다. 요샌 특별한 일도 아니겠지만, 집안일을 챙기는 것은 지금까지 내 몫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이젠 요리도 하니까, 일단 집안일은 꽤 하는 편이라고 말하자.

여기까진 좋다. 문제는 점점 일도, 돌봄도 자신의 분량을 불려가고 있다는 데 있다. 직장에서 몇 가지 역할을 수행하는 데다 공적 역할도 맡아야 한다. 한편 아이는 이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에 관한 필요를 표출한다. 부모님들도 점점 챙겨드려야 할 부분들이 늘어나고 있다. 혼자서 다 감당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포기하거나 타협하는 것이 일차적인 선택지리라. 다른 누구에게 부탁하거나 위임하는 것도 고려해봄 직하다. 하지만 둘 다 문제가 있는 선택지다. 전자는 어느 쪽의 질 하락을 감수해야 한다. 일을 대충 하거나 아이와 부모님을 대충 돌보거나. 후자는 그나마 낫고 이미 하는 일이기도 하다. 학교가 끝나면 아이는 학원 등원 등을 학원 도우미님과 함께하거나, 할머니와 함께 있으니까. 하지만 할머니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은 죄스럽다. 학원 도우미님은 열심히 하시지만 우리의 필요와 맞지 않는 부분이 더러 있다. 물론 많은 급여를 드리고 아이를 돌보아 주실 분, 부모님을 도와주실 분을 모시면 되겠지만 그렇게까지 여유가 있는 상황은 아니니까. 그리고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죄책감이 남는다. 내가 해야 하는데, 왜 나는 못 하고 있을까.

이것은 나만의 특별한 상황이 아니다. 사람들은 어릴 때를 제외하면, 일생 다른 사람들을 돌보며 산다. 문제는 돌봄이 있을 자리가 없다는 데 있다. 그토록 중요한 돌봄이건만 돌봄은 부차적인 일일 뿐이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 예전 돌봄은 여성의 무임금 가사노동에 의존했다. 여성이 사회로 진출한 현재, 돌봄 노동의 자리는 비어 있다. 간병인, 가사도우미 등 돌봄 노동자가 자리를 채우긴 했으나 돌봄의 지위가 바뀐 것은 아니다. 돌봄은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대표적인 노동이다.

하지만 모두 돌봄이 필요하다. 아이를, 노인을, 환자를 돌볼 사람이 있어야 한다. 인정받지 못하지만 누구에게나 필요한 돌봄이기에 우리는 고민한다. 우리의 돌봄은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어 있는가. 왜 우리는 필요한 돌봄을 누리지 못하는 한편, 돌보지 못해 고민하는가.

 우리가 처한 돌봄의 질 위기

이 고민을 매들린 번팅은 ‘사랑의 노동’에서 상세히 풀어낸다. 번팅은 돌봄의 여러 장소를 취재한다. 자신의 육아 경험에서부터 장애 아동 돌봄, 대학병원, 일반 의원, 방문 간병, 임종의 장소까지. 우리가 처한 돌봄의 위치들을 돌아본 그는 말한다. 우리는 현재 돌봄의 질 위기에 처해 있다고.

번팅에 따르면 돌봄의 위기에는 두 차원이 있다. 사람들은 원하는 돌봄에 접근할 수 없다. 한편 돌봄을 받는 사람은 제대로 돌봄 받지 못한다. 이런 상황이 발생한 이유는 한편 돌봄에까지 편만해진 자본의 논리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론 돌봄의 역할을 맡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과거 여성과 지역 공동체가 무보수로 맡았던 일이었던 돌봄은, 여성이 일터로 떠나고 지역 공동체가 분쇄된 상황에서 맡을 사람이 없는 상황에 처했다. 이 자리를 채우는 것은 저임금 급여 노동자로, 영국의 경우 상당 비율을 외국인이 차지하고 있다. 노인의 증가와 사회의 발전으로 돌봄의 필요성은 계속 증가하고 있지만, 이를 채우는 것은 ‘값싼’ 노동력이다.

왜 돌봄은 이토록 푸대접받는가? 이것은 사회가 돌봄을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제학은 노동을 정의하면서 무의식 중에 돌봄을 배제했다. 그것은 돌봄이 여성의 일이었으며, 한편으로 돌봄의 속성을 따져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솔직히 지금 우리가 처한 삶의 형태를 만들어 낸 18~19세기 ‘남성’ 경제학자들이 돌봄을 이해하고 있었을 리 없다. 그것은 ‘어머니’로 표상되는 가정의 여성들, “집안의 천사”들로 인해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채워져 왔기 때문이다. 당시 문명을 등지고 ‘월든’ 호숫가에서 살았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 또한 마을에 내려와 식사하고 빨래를 어머니에게 맡겼다는데, 다른 이들이야 말해 무엇할까.

돌봄은 공기와 물 같은 것이라, 그것이 있음을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했지 싶다. 돌봐 주는 사람 없이 우리는 살 수 없다. 하지만 너무도 당연히 주어지고 있을 땐 그것이 있는지 깨닫지도 못하다가 없어지고 난 다음에야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음을 안다. 마치 공기 없이 우리는 잠시도 살 수 없지만, 공기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은 질식하는 순간인 것처럼. 지금 돌봄이 이토록 중요함을 생각하게 된 것은, 그만큼 우리에게 돌봄의 결핍이 나타나고 있다는 방증이다.

‘사랑의 노동’은 현대의 돌봄을 심도 있게 파고드는 르포이자, 돌봄이라는 단어에 천착하여 그 의미를 구출해 내려는 숨가쁜 노력이다. 번팅은 돌봄을 “취약성, 의존성, 고통을 다루는 다양한 인간관계에서 유통되는 흐름”이라고 정의한다(21쪽). 그렇게 돌봄을 다시 이해하는 것이, 돌봄을 되살리는 길이라고 번팅은 믿는다. 나 또한, 그에 동의한다. 출처: 알라딘
‘사랑의 노동’은 현대의 돌봄을 심도 있게 파고드는 르포이자, 돌봄이라는 단어에 천착하여 그 의미를 구출해 내려는 숨가쁜 노력이다. 번팅은 돌봄을 “취약성, 의존성, 고통을 다루는 다양한 인간관계에서 유통되는 흐름”이라고 정의한다(21쪽). 그렇게 돌봄을 다시 이해하는 것이, 돌봄을 되살리는 길이라고 번팅은 믿는다. 나 또한, 그에 동의한다. 출처: 알라딘

물론, 우리 사회는 돌봄 체계를 만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 왔다. 의료와 복지 제도는 돌봄의 사회화를 위한 노력의 결실이며, 이전 가정의 책임이었던 돌봄은 많은 부분 국가의 역할로 바뀌었다. 하지만 국가는 끊임없이 재정 축소의 압력에 시달리며 돌봄은 그에 매우 취약한 영역 중 하나다. 게다가 돌봄은 많은 경우 관료적 서류 작업으로 대체된다. 돌봄은 각 사람의 필요를 채우는 매우 다양한 행동을 한꺼번에 부르는 이름이지만, 우리는 그 모든 것을 하나로 생각한다. 그런 사회의 ‘돌봄’은 쉬운 일, 간단한 일, 누구나 할 수 있는 중요하지 않은 일로 폄하되고, 축소되어야 할 ‘허드렛일’ 취급받는다. 이런 상황을 정리하며, 번팅은 적는다.

“가정과 노동시장 모두에서 돌봄의 문화적 중요성, 그리고 여기에 필요한 시간, 관심, 접촉, 곁에 있어 주는 행동 등은 점점 더 벗겨져 나갔다. (…) 하지만 지난 한 세기 동안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은 높은 수준의 돌봄을 보장하려는 노력에서 막대한 진전을 이루기도 했다. 의료 시스템과 복지국가 시스템이 그러한 사례다. 이제 우리는 이 시스템을 당연하게 여기며 마땅히 제공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이것이 세대를 이어 지속되려면 사회적 인정, 자금 지원, 합당한 존중과 가치 부여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충분히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65쪽)

 의료의 핵심은 ‘돌보는 일’

의료인은 돌보는 사람인가?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우리가 현재 의학적 행위라고 부르는 것에 사실 돌봄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전에 설명했던 것처럼, 우리 의료에는 진단과 치료만 있고 돌봄의 공간은 비어 있다.

하지만 의료인문학, 의료윤리를 공부하면서 나는 의료인으로서 내 역할을 돌봄이라는 표현으로 다시 정리하게 되었다. 돌봄 없이 환자와 의료인의 관계는 성립할 수 없다. 둘의 만남은 지식을 요구하는 학생과 이를 전달하는 교사와는 같지 않다. 비록 의료인이 의학 지식적 전문성을 지니고 있지만, 애초에 환자는 돌봄을 바라며 의료인에게 온다. 의료인은 삶의 고난에 부딪힌 환자에게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이다.

여기에서 나는 몸이 둘로 쪼개지는 것 같다는 생각을 늘 한다. 나는 돌보는 사람이지만, 돌보는 사람이 아니다. 너무도 이상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이를 궁금해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아무리 뜯어보아도, 의료인으로서 내 역할에선 돌봄이 있을 자리가 잘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은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까. 결국 돌봄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일은 ‘의사’와 같은 전문직의 영역에선 아주 사소한,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내 지식과 기술을 인공지능이나 로봇이 대체하는 일은 근시일엔 일어나지 않더라도 언젠가 벌어질 일이라고. 그래도 나는 의료인으로 남을 수 있을까? 나는 이 질문에 대해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의료인으로서 줄 수 있는 돌봄을 인공지능이나 로봇이 환자에게 줄 수 없으리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돌봄은 두 사람의 관계에서 늘 새로이 만들어져 가는 현상이고, 말이나 논리로 명확히 표현되지 않는 수많은 것들을 끌어안는 작업이며, 나의 가장 깊은 마음속에서 나오는 반응이기에, 내가 줄 수 있는 돌봄을 다른 사람이 줄 수는 없다. 이런 것을 로봇으로 일반화할 수 있을 리 없다.

분명, 우리는 ‘돌봄’ 로봇을 만들 수 있다. 환자에게 식사를 전달하고 침상에 있는 이를 돌아 눕히며, 말 상대를 해 주는 일을 로봇은 할 수 있다. 언젠가 로봇은 내가 환자에게 하던 일을, 충치를 치료하고 앓던 이를 뽑고 잇몸을 수술하는 일을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해도 로봇은 환자를, 내 가족을 내가, 사람이 하는 것처럼 돌보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내 의료인으로서의 정체성에서 정말 중요한 부분은 돌봄이 아닌가. 그렇게 중요한 일이라면, 돌봄은 복권되어야 한다. 비록 돌보는 손이 ‘어머니’에서 다른 모든 사람, 예컨대 돌봄 노동자나 의료인으로 바뀔지라도, 그 손의 고귀함이 사라지지는 않을 테니까.

김준혁/연세대 교수·의료윤리학자 junhewk.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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