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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라는 이유로…자녀의 성별을 선택해도 될까

등록 2023-03-29 09:10수정 2023-03-29 09:48

김준혁의 의학과 서사(71)
질환의 개념으로 본 성 선택
시험관 아기 절차 중에 촬영한 난모세포. 출처: 위키피디아
시험관 아기 절차 중에 촬영한 난모세포. 출처: 위키피디아

얼마 전에 미국의 한 연구진이 아기의 성별을 선택하여 인공수정 시술을 할 수 있는 방법을 발표했다. 방법 자체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아기의 성별은 정자가 X, Y 중 어느 염색체를 가졌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X염색체가 염기쌍이 더 많기 때문에 무겁다. 그렇다면 무게로 둘을 구분하여 난자와 착상시키면 부모가 원하는 성별의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연구진은 해당 기술을 인공수정에 적용해 약 80%에 가까운 성공률로 원하는 성별의 아기를 얻는 데 성공했다.

이전의 성감별 술식처럼 어느 정도 태아가 태중에서 성장한 다음에 성별을 구분하여 특정 성별을 낙태(강제적인 절차이므로 일부러 이 표현을 선택한다)하는 것이 아니니, 지금 방식은 훨씬 윤리적 부담이 덜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다. 반대로 이전에는 낙태와 그에 따른 위험부담을 부부가 감수해야 하므로 성감별이 어려운 일이었는데, 정자 무게 측정이라는 상대적으로 쉬운 방식으로 아기 성별을 결정할 수 있으니 오히려 문제라고 보는 분도 있을 것이다.

둘 다 그럴듯한 주장이라면, 한번 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성감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 주장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한쪽에는 낙태 술식이 부여하는 윤리적 부담이 놓여 왔다. 낙태 술식은 그 자체로 생명(또는 생명에 준하는 무엇)을 파괴한다는 부담을 진다. 반면 정자를 무게로 선택하는 것은 술식 자체의 부담을 없앤다. 간단히 말하면, 정자의 무게를 다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문제가 될 부분은 없다.

그러나 생물학적 문제가 사라지더라도 여전히 고민은 남는다. 애초에 자녀의 성을 선택할 권리가 부모에게 있는 것일까? 성을 선택하는 행위는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첫째 개인적 차원에서, 부모가 자녀의 성별을 선택하는 것은 다른 성별을 원치 않는다는 견해를 표명하는 일이기도 하다. 즉, 성 선택을 한 부모는 특정한 자녀만을 자녀로 받아들이겠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반적으로 부모가 자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부모의 윤리적인 태도라고 믿는다. 둘은 상충하며, 성 선택은 비윤리적인 견해 또는 태도로 분류될 가능성을 지닌다.

둘째 공동체적 차원에서, 부모가 자녀의 성별을 선택하면 해당 집단의 성비가 한쪽으로 편향될 가능성이 있다. 우리 사회를 포함하여 여러 사회가 과거 성감별을 통해 현재 편향된 성비를 보이고 있으며, 이는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를 야기한다. 물론 “성비 편향이 사회 문제를 야기한다”라는 명제는 결과적으로 검증되어야 하며, 성 차별적 관습이나 문화로 인한 폐해와 성비 편향의 사회적 악영향은 다른 범주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결혼이나 직업 등의 영역에서 성비 편향이 일으키는 여러 문제를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후자가 다소 인구학적, 경제적 문제이고 이런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의 해악이 명백하므로 그 가능성을 줄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것은 별다른 고찰이 필요하지 않다. 반면 전자는 어떤가. 특정 성별을 선호하는 부모의 관점 또는 태도는 실천을 통해 자녀에게 전수되고, 이는 자녀의 정체성이나 자존감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을 넘어 가족의 존재 양태를 위기에 빠트릴 수 있다는 주장은 얼핏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너무 과도한 추론인 것은 아닌가. 게다가 이런 주장은 더 나은 삶을 위한 개인의 선택권을 다수 부정하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이미 우리는 어느 정도, 원하는 자녀를 그리며 배우자를 선택하는 경향성을 지닌다. 유전적으로 선택하는 것에 한계가 있더라도, 우리는 “맹모삼천지교”를 굳게 믿으며 자녀의 교육 환경을 설정하고, 이런 실천은 강남의 집값을 뒷받침하는 제일의 원인을 제공한다. 전자의 주장은 이런 자녀 양육에 대한 개입 모두가 잘못이라고 말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성을 선택하는 순간, 삶의 경험이 바뀐다

그렇지 않다. 우리는 성 선택이 윤리적으로 잘못이라고 말하면서도, 지금까지 해 왔던 여러 행동을 부정하지 않을 수 있다. 여기에서 명확한 구분을 위해 필요한 개념이 질환이다. 다시금 정리를 위해 두 개념을 구분해 보면, 질병(disease)이란 생물학적 원인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신체적, 정신적 기능의 제한 또는 고통이다. 질환(illness)이란 주로 그런 질병으로 인하여 개인에게 주어지는 생활 경험이다. 단 질환은 꼭 질병으로 인한 것일 필요는 없다. 질병이 없어도 질환이 있을 수 있다. (단, 우리는 질병과 질환을 병의 종류에 따라 이미 결합하여 사용하는 경우들이 있다. 정신질병이라고 하는 것은 어색하다. 여기에선 개념으로서 질병과 질환을 구분하는 것이지, 지금의 명명법을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출분증(drapetomania)을 그 예로 들 수 있겠다. 이전에도 소개한 적이 있지만, 가장 극명한 예시이므로 다시 한번 활용하고자 한다. 미국의 의사 새뮤얼 카트라이트는 1851년 발표한 논문에서 흑인 노예에게만 발생하는 특이한 질병 ‘출분증’을 설명하고 있다. 카트라이트가 보기에 흑인 노예는 독립적으로 생존이 불가능하므로, 백인 주인 밑에서 견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그들에게 가장 좋은 일이다. 문제는 흑인 노예에게 어떤 이상이 발생하여, 이들이 주인으로부터 도망치려는 경향성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카트라이트는 이것이 흑인의 생물학적 특징에 기초한 질병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은 자유를 향한 열망이다. 그러나 카트라이트로 인하여 질병으로 이름 붙여진 자유의 열망은 흑인 노예들에게 질병으로 인한 경험을 부여했다. 흑인 노예들은 특별히 관리되어야 했고, 저녁이 되면 다른 노예들과의 접촉을 금지당했다.

영화 <노예 12년>에서 자유인이었던 솔로몬 노섭은 납치되어 노예로 팔려 간다. 그는 끔찍한 생활을 견디며 도망치려 시도하지만, 그의 노력은 성공하지 못한다. 이것이 질병일 수 없음에도 의사에 의해 질병이라는 이름이 붙으면, 그 다음에 주어지는 것은 질병의 관리와 그에 따라 변화한 삶이다. 출처: 다음 영화
영화 <노예 12년>에서 자유인이었던 솔로몬 노섭은 납치되어 노예로 팔려 간다. 그는 끔찍한 생활을 견디며 도망치려 시도하지만, 그의 노력은 성공하지 못한다. 이것이 질병일 수 없음에도 의사에 의해 질병이라는 이름이 붙으면, 그 다음에 주어지는 것은 질병의 관리와 그에 따라 변화한 삶이다. 출처: 다음 영화

다시 말해, 질환은 보건의료로 불리는 우리의 의과학적 실천으로 인하여 규정, 규약, 제한되는 우리 삶의 경험을 말한다. 그것은 주로 우리가 아플 때의 경험을 가리키며, 질병으로 인하여 놓친 기회들, 떠나보낸 시간들, 안타까움과 함께 오히려 질병으로 인하여 나에게 주어진 반대급부들로 구성된다. 이를테면 나는 수련의 시절부터 발생한 오래되고 심한 어깨 부위 통증으로 인하여 계속 의사로 생활하며 진료하는 것이 어려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한편 해결을 위해 여러 노력했고, 그 중 하나로 상당 기간 요가를 배우며 그 과정에서 여러 경험을 얻고 몇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몸의 불편함과는 별개로, 그 경험들은 나에게 소중한 것이다. 그리고 질병(예컨대 근골격계질환)을 생각함에 있어서 나는 질환을, 그로 인한 나의 경험들을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한편, 의과학적 실천의 변화는 질환을 만들거나 없앤다. 예컨대 인공호흡기, 급식관 등의 발명은 연명의료라는 실천을 우리에게 부여하였고, 그로 인하여 생애 말기 질환과 돌봄이라는 경험이 새로이 나타났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숨을 쉬기 어렵거나 음식을 삼키지 못하는 환자는 곧 사망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환자들의 생명을 약간의 기간이라도 붙들 수 있고, 그런 붙드는 행위가 한편으론 환자와 함께 할 시간을 연장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불필요한 괴로움을 초래한다. 무엇보다 연명의료 행위가 수행되는 병동에서 환자, 의료진, 가족들은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시간들을 경험하게 된다. 생명을 붙드는 기계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경험. 그렇기에 그 경험에는 존중과 주목이 필요하다. 이전의 방식으로 고려하는 것은 그 경험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같은 논리가 성 선택 실천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정자의 무게를 달아 아기의 성별을 선택하게 되면, 그 의과학적 실천은 우리의 경험을 변화시킨다. 아무런 문제도 없다면 좋겠지만, 나는 그것이 새로운 질환을 만들어 낼 것이라고 생각한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원치 않는 성별” 정도로 부를 수 있을까. 그리고 이 문제 또한, 나는 경험에 기초해서 풀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 선택은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아니다

다시 원래 제기했던 문제로 돌아가자. 성 선택 기술이 생겼다. 이 기술을 도입하면 우리는 자녀의 성별을 꽤 높은 확률로 정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인구학적 고려를 떠나서도 이것이 윤리적으로 잘못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은 성 선택으로 발생하는 경험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것은 부모로 하여금 상당히 명시적으로 자녀에게 그 존재 이유가 어떤 생물학적 특징이라는 경험을 부여하게 된다. 간단히 말해, 내가 이 기술로 아들을 낳는다면, 나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셈이다. “너는 남자라서 우리 가족이 되었다.”

나는 나의 어떠함으로 인하여 가족의 지위를 얻고 싶지 않다. 물론 나는 부모님의 자랑이 되길 원하기에 최대한 노력한다. 나는 자녀의 기쁨이 되길 원하기에 헉헉대면서도 많은 일을 해 나간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지닌 특성으로 인해 가족에게 긍정적 평가를 취득하는 문제이며, 내가 지닌 특성으로 인해 가족에서 배제되는 것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우리가 자녀를 교육하는 것 또한 그에 따라오지 못하는 자녀라면 자녀로 인정하지 않는 서바이벌 프로그램 같은 것이 아니다. 자녀 교육을 위한 환경 제공은 자녀에게 더 나은 미래를 주기 위한 노력일 뿐이다. 물론, 언제나 과도함이 해악을 부르는 경우가 있지만 말이다.

따라서 나는 그것이 낙태로 인한 생명 살해를 수반하지 않는다 해도, 성 선택을 반대한다. 나는 주어진 어떤 자녀든 그 자체로 사랑하길 원한다. 성 선택은 선택받지 못한 성별도, 심지어 선택받은 성별도 질환으로 만들 것이며, 그로 인하여 자녀들에게 주어질 경험이 나는 그리 달갑지 않다. 이미 우리는 젠더 편향으로 인해 벌어진 수많은 일들을 경험해 왔다. 그 경험에서 배운 것들을 의학적 선택에 적용하지 않을 이유는 무엇인가.

김준혁/연세대 교수·의료윤리학자 junhewk.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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