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8월9일 와이에이치(YH)무역 여성 조합원 187명이 회사의 일방적인 폐업에 맞서 신민당사에서 기습농성을 시작하면서 민주노조 운동은 정치권과 연계한 반유신독재 운동으로 번졌다. 사진은 8월10일 서울 마포 당사에서 신민당 의원들이 농성사태 해결방안을 논의하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이총각-우리들의 대장, 총각 언니 76
1979년 8월6일 와이에이치(YH)무역(대표이사 장용호)은 노동자들의 간절한 바람을 무시한 채 끝내 폐업을 공고했다. 그동안 온갖 폭력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회사의 폐업 의도를 알리고 폐업 번복 약속도 받아냈던 조합원들은 일시에 허탈감에 빠졌다. 그 순간 노조 사무장 박태연이 비장한 심정으로 나섰다. “우리는 여기서 물러설 수 없다. 우리의 주장은 정당한 것이며,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것이다. 나는 죽음으로써 이를 지키겠다.” 비분강개하여 분신자살을 하려 드는 박태연을 눈물로 뜯어말리며 조합원들은 끝까지 싸울 것을 결의했다.
와이에이치 노조는 경찰 등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기가 쉽고 자체 교육도 하면서 농성을 진행할 수 있는 기숙사로 농성 장소를 정했다. 그리고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와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를 비롯한 종교·인권단체 등에 지원을 요청하기로 했다. 그러나 회사 쪽은 8월8일을 기해 단전·단수와 식사공급 중지까지 통보해왔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회사 정상화 대책위원 52명은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 총무 서경석 목사와 한국기독청년협의회의 황주석 간사 등의 제안을 받아들여 야당인 신민당사로 농성 장소를 옮기기로 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8월9일 새벽 5시 반, 조합원들은 회사 주변을 지키고 있던 경찰의 감시망을 피해 삼삼오오 마포 신민당사로 향했다. 기숙사에 남아 있기로 한 50명은 녹음해놓은 투쟁가를 틀어놓고 농성을 계속하고 있는 듯 위장했다. 이날 오전 8시쯤 급히 연락을 받은 문동환 목사와 고은 시인, 이문영 교수 등 3명은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자택을 방문해 와이에이치 조합원들의 신민당사 농성에 대해 김 총재의 허락을 받아놓은 상태였다. 9시30분이 되자 신민당사 주변 식당과 다방 등에서 초조하게 대기하고 있던 조합원들은 일제히 당사로 뛰어들어갔다. 1층에서 잠깐 저지를 당했지만 이내 농성장인 4층까지 올라가 서로 얼싸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모두 187명이었다.
“정상화가 아니면 죽음이다”라고 쓴 머리띠를 두른 조합원들은 준비해 간 펼침막을 들고 농성에 들어갔다. “우리에게 나가라면 어디로 나가란 말이냐”, “배고파 못 살겠다 먹을 것을 달라”. 어느새 몰려든 취재기자들이 사진을 찍어대며 취재를 시작했고, 와이에이치 조합원들의 신민당사 농성 뉴스로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오전 10시 당사에 도착한 김 총재는 6명의 와이에이치 노조 대표와 먼저 만난 뒤 4층 농성장을 직접 찾아가 조합원들을 격려했다. 한편 이순구 서울시경 국장으로부터 계속 농성자들을 해산시키라는 압력을 받고 있던 박한상 신민당 사무총장은 노조 대표들을 만나 설득을 시도했다. 이에 노조는 상집회의를 열고 “사건이 해결되기 전에는 당사를 나가지 않겠다”고 결의했다. 이들이 식사비 부담이 크다면 금식을 할 것이고, 시끄러워 업무에 방해된다면 침묵으로 투쟁하겠다고 선언하자 신민당 쪽에서는 더이상 말이 없었다.
조합원들은 신민당사 농성을 대서특필한 석간신문을 받아보고 라디오 방송에서도 농성 소식이 나오자 한껏 고무되었다. 이총각을 비롯한 동일방직 해고노동자들과 80명이 넘는 원풍모방 조합원들, 콘트롤데이타 노조, 반도상사 노조 등에서도 빵과 떡, 음료수, 기부금 등을 들고 격려 방문이 이어졌다.
8월10일 저녁이 되자 곧 경찰이 투입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조합원들은 “최후의 한 사람까지 죽음으로써 항쟁할 것”을 확인하고 마지막 결단을 촉구하는 종결대회를 열었다. 대회가 진행되는 동안 조합원들은 몸부림치며 오열하기 시작했고, 이를 지켜보고 있던 국회의원들과 기자들도 눈물을 흘렸다. 밤 11시30분께 상집위원 김경숙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결의문을 읽었고, 이어 박태연 사무장의 성명서 낭독을 끝으로 대회가 끝나자 감정이 격앙된 조합원들은 음료수병을 깨어 들고 창가로
몰려가 밖으로 내던졌다. 겨우 감정을 가라앉히고 자리로 돌아왔지만 김경숙을 비롯한 8명의 조합원은 감정을 누르지 못하고 쓰러지는 바람에 병원으로 실려 갔다. 그런데 김경숙은 업혀 나가는 도중에 깨어나 다시 농성장으로 돌아왔다.
이윽고 새벽 2시를 막 넘긴 시각, 자동차 경적 소리가 새벽 공기를 가르며 길게 세 번 울렸다. 이른바 ‘101호 작전’의 개시를 알리는 신호였던 것이다.
이총각 구술
구술정리 박민나<가시철망 위의 넝쿨장미> 작가
이총각 전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