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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인권·복지

베트남이 낯선 유미가 간절히 되고 싶은 건 ‘평범한 한국 사람’

등록 2020-08-08 19:21수정 2020-08-12 11:24

[토요판] 기획 연재
호준과 호이준 사이에서 ② 유미와 나나의 경우

5월 초 인권위가 인권침해 결정한
장기체류 미등록 이주청소년 2명
고교 졸업해 단속 유예 끝난 유미
‘한국서 살기 위해’ 베트남으로 출국

베트남에서 지내며 장염 등 고생
낯선 땅 두려워 집안에서만 생활
제도 마련 권고받은 법무부 답변
기다리며 재입국 가능할까 ‘불안’
최유미(가명·19)씨는 ‘한국에서 살기 위해’ 지난 5월27일 베트남행 비행기에 올랐다. 베트남의 바리어붕따우에 위치한 유미씨 집 근처 상가 모습. 최유미 제공
최유미(가명·19)씨는 ‘한국에서 살기 위해’ 지난 5월27일 베트남행 비행기에 올랐다. 베트남의 바리어붕따우에 위치한 유미씨 집 근처 상가 모습. 최유미 제공

호준(한국 이름)으로도 호이준(몽골 이름)으로도 환영받지 못한 청년이 ‘한국에서 살기 위해 몽골로 떠나는’ 길에 <한겨레>가 동행을 시작(☞1회 기사)했다. 유미와 나나는 지난 5월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인권침해 결정을 이끌어낸 두 명의 장기체류 미등록 청소년이다. 코로나19로 호준의 몽골행 항공편이 잇달아 취소되는 사이 ‘한국에서 계속 살고 싶은’ 유미는 전세기를 타고 출국해 현재 베트남에 있다.

“러우 조이 콩 갑.”(오랜만이야.)

선생님이 읽었고 유미(19)가 따라 읽었다.

“자오 나이 앰 꼬 쾌 콩?”(요즘 잘 지내니?)

태블릿피시 안에서 선생님이 읽었고 베트남어 교재를 보며 유미가 따라 읽었다.

“깜 언 아잉 앰 쾌.”(고마워요 저는 잘 지내요.)

베트남에서 유미가 한국인 선생님의 베트남어 강의를 들으며 베트남어를 배웠다.

아니, 사실 잘 지내지 못해.

베트남에서 ‘베트남 국적’의 유미는 한국어로 생각하고 한국어로 말했다. 베트남어도 한국인이 쓴 교재를 놓고 한글로 적은 발음을 따라 읽으며 익혔다.

“자오 나이 아잉 콩 쾌.”(난 요즘 몸이 안 좋아.)

유례없는 장마로 한국 중부지방에 ‘난리’가 난 지난 3일 우기의 베트남 호찌민에서도 도로가 물에 잠겼다. 호찌민에서 남동쪽으로 90여㎞ 떨어진 유미의 집(바리어붕따우) 안에선 빗물이 벽을 타고 흘렀다. 유미가 대야를 가져와 천장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받았다.

베트남에서 지낸 두 달 동안 유미는 줄곧 장염에 시달리고 있었다. 베트남 음식이 몸에 안 맞아 잇따라 탈이 났다. 뜨거운 날씨 탓에 한국에선 겪은 적 없는 햇빛 알레르기도 유미를 힘들게 했다.

유미는 지난 5월27일 베트남에 왔다. 인천공항 출입국·외국인청에 출국 신고를 하고 혼자 비행기를 탔다. 코로나19 사태로 귀국이 힘들어진 노약자와 임신부 등을 위해 베트남 정부가 보낸 특별전세기편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타는 비행기였고 처음 나가는 ‘외국’이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베트남 승무원들이 말이라도 붙일까 봐 유미는 안절부절못했다. ‘자진출국 신고서’의 성명 칸에 ‘유미’ 대신 발음도 서툰 베트남 이름을 쓸 때부터 긴장으로 몸이 굳었다.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태어날지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없는데 유미는 ‘출생 순간부터 불법’이 됐다. ‘체류 행적’을 연 단위로 써내며 유미는 한국에서 태어나 살아온 19년의 시간을 하나하나 해명해야 했다.

베트남 다낭공항에 도착했을 때 엄마가 마중 나와 있었다. 6년 만에 보는 엄마였다. 건강이 나빠진 엄마는 2014년 홀로 베트남으로 돌아갔다. 엄마가 유미를 꼬옥 안으며 한국어로 말했다.

“우리 딸 사랑해.”

베트남에서 유미씨는 한국인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한국어로 된 교재를 보며 베트남어를 배운다. 최유미 제공
베트남에서 유미씨는 한국인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한국어로 된 교재를 보며 베트남어를 배운다. 최유미 제공

혼자 도착한 베트남

최유미(가명·1회에 나온 ㄴ). 2001년생. 고향은 경기도 안산.

유미는 지난 5월 초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인권침해 결정(‘장기체류 미등록 이주아동의 체류자격 부여제도 부존재에 따른 인권침해’ 진정)을 이끌어낸 두 명의 “피해자” 중 한 명이었다.

베트남인 아빠(44)는 1995년 산업연수생제도(근로기준법 등이 적용되지 않아 ‘노예연수생제도’란 비판을 받으며 2004년 고용허가제로 전환)로 한국에 왔다. 열악한 노동조건을 견디다 사업장에서 이탈해 ‘미등록’이 됐다. “일하는 시간이 너무 길고 잔업을 해도 최저임금을 받지 못했던” 아빠는 “한국 올 때 빌린 돈을 갚기 위해서라도” 다른 일자리를 찾아 공장을 나왔다. 한국에서 일하고 있던 엄마를 만나 유미와 동생들을 낳았다. 무릎이 아파 수술을 받은 엄마는 의료보험 없이 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어 유미가 중학교 1학년 때 귀국했다. 유미는 엄마를 대신해 동생 두 명을 돌보며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아빠는 “아이들한테 미안한 것이 많았”다.

“(한국인 아이들처럼) 똑같이 못 해주니까. 애들이 한국 사람처럼은 안 되잖아요. 내가 가난해서 그게 안 되잖아요. (내가 미등록) 외국 사람이니까 (그게 안 되잖아요.) 그게 제일 미안해요. 첫째(유미)는 뭐든 하고 싶은 건 끝까지 하려고 해요. 힘들어도 참고 시간이 많이 걸려도 마무리해요. 열심히 배워요. 힘든 일이 있어도 너무 잘 참아요. 엄마가 없는 동안 저도 도와주고 동생들도 봐주며 고생했어요.”(2019년 국가인권위·인권단체 공동협력사업 ‘미등록 이주아동의 체류권 실태조사 보고서’ 인터뷰)

한국에서 태어나서, 한국 초중고에서 공부하고, 한국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며 성장해온 유미는 부모가 미등록이란 이유로 ‘불법체류 외국인’일 뿐이었다. 유미는 자신이 ‘비자 없는 사람’이란 사실을 “정말 친한 친구들한테만” 알렸다. “내 이야기를 퍼뜨리지 않고 커서도 가까이 지낼 수 있겠다는 믿음을 준 친구들”이 아니면 말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너는 어차피 한국 사람”이라며 용기를 줬지만 현실에서 유미는 ‘넌 어차피 한국 사람이 아니’란 시선을 끊임없이 확인하며 자랐다.

초등학교 때 활동하던 다문화합창단이 대회에서 1등을 했다. 단원들은 부상으로 제공된 중국 여행을 갔으나 유미는 갈 수 없었다. “그다음부터 못하는 일들이 막 생겼”다. 본인 이름으로 된 휴대전화번호를 적을 수 없어 ‘1365 자원봉사포털’(한국중앙자원봉사센터에서 운영하는 사이트로 봉사 내용이 교육행정정보시스템(나이스)으로 연계)에 가입하지 못했다. 학교 밖에선 아무리 봉사활동을 많이 해도 시간을 인정받을 수 없었다. 병원 가면 금방 나을 병을 집에서 약만 먹고 견디다 악화시키는 일도 많았다. 치료비 걱정으로 미등록 외국인들을 위한 무료진료소를 이용하느라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유미의 꿈은 ‘공연 음향 전문가’였다. “내가 고른 음악에 맞춰 무대 장면이 바뀌고 배우들이 신나게 연기하는 걸 보면 뿌듯하고 기분이 좋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참가한 청소년연극제에서 심사위원 교수가 음향 작업을 칭찬하며 명함을 줬을 때 유미의 가슴에서도 “꿈”이 차올랐다.

꿈이 무엇인지 알게 되자마자 꿈을 이룰 방법이 없다는 사실까지 알게 됐다. 동아리 친구들이 봉사 시간을 인정받는 무대 스태프로 참여했을 때 주민등록번호가 없는 유미는 끼지 못했다. 대학에 진학해 공연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미등록 신분으론 불가능했다. 연기를 지망하는 친구들이 대학 입시를 준비할 때 유미는 입시 준비 대신 “친구들의 연기 연습을 봐줬”다. “내겐 다음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유미는 “공부할 마음을 잃었”다. 고생하는 “엄마 아빠에겐 속상한 마음을 털어놓지 못해 친구들 앞에서만 울었”다.

“‘러우 조이 콩 갑’과 비슷한 표현으로는 ‘러우 꽈 콩 갑’이나 ‘러우 람 콩 갑’ 등이 있는데 모두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는 뜻이다.”(교재)

베트남에서 베트남어를 하지 못하는 유미에게 대화 상대는 오래 헤어져 있다 만난 엄마밖에 없었다. 한국말을 하지 못하던 시절 엄마 아빠가 한국에서 일하며 느꼈을 당혹감을 유미는 어렴풋이 이해하게 됐다.

“성조 하나만 잘못 발음해도 못 알아듣겠어.”

유미는 성조를 사용하는 베트남어가 너무 어려웠다. 기본 철자는 겨우 다 외웠지만 아직 말은 하지 못했다. 아침에 일어나 피아노를 치고, 낮에 집에서 베트남어 공부를 하고, 저녁에 한국 친구들과 영상통화를 하는 것이 베트남에서 유미의 하루 일과였다.

지난해 12월 유미는 강제퇴거의 공포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아달라며 인권위에 호소했다. 고등학교 졸업을 두 달 앞둔 시점이었다.

“나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길 원했거든요.”

장기체류 아동·청소년(최소 7800명에서 최대 2만명 이상 추정)에게 체류자격을 부여하는 제도가 한국엔 마련돼 있지 않았다. ‘학습권 지원 차원’에서 고등학교 때까지 강제퇴거가 유예됐지만 졸업과 동시에 단속 대상이 됐다. 그들의 체류 여부는 유엔 ‘아동 권리에 관한 협약’의 ‘미성년 아동 인권’ 영역에서 성인 미등록 체류 문제로 전환됐다.

졸업이 가까워질수록 유미는 불안해졌다. “졸업 전에 인권위 판단이 나오길 바랐으나” 바람과 달리 졸업이 먼저 닥쳤다. 유미에게 졸업은 사회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집 안에 갇히는 것을 뜻했다. 교문을 나선 “친구들이 대학에 가거나 자신의 꿈을 찾아갈 때” 유미는 “단속될까 무서워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인권위 결정은 유미의 졸업 3개월 뒤(5월6일)에 나왔다.

“제도가 없어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강제퇴거되는 것은 헌법이 보장하는 인간 존엄성과 행복추구권을 침해한다. (법무부는) 장기체류 미등록 이주아동에 대한 무조건적인 강제퇴거를 중단하되 아동 최상의 이익을 고려한 구체적이고 공개적인 심사기준에 따라 적정한 체류자격을 부여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할 것을 권고한다.”

지난 4일 베트남에서 유미씨의 엄마가 차린 아침 밥상. 베트남 음식이 안 맞아 고생하는 딸을 위해 엄마가 미역국을 끓이고 김치를 볶아 상에 올렸다. 최유미 제공
지난 4일 베트남에서 유미씨의 엄마가 차린 아침 밥상. 베트남 음식이 안 맞아 고생하는 딸을 위해 엄마가 미역국을 끓이고 김치를 볶아 상에 올렸다. 최유미 제공

옅어지는 기대

희망.

인권위의 결정을 전해 들었을 때 유미는 그 두 글자를 떠올렸다. 유미에게 희망은 거창한 단어가 아니었다. ‘집 밖으로 나가도 되는 삶’이었다.

“병원에도 갈 수 있고, 알바도 할 수 있고, 수능도 볼 수 있는….”

인권위의 권고 뒤에도 유미는 초조했다. “도와주시는 변호사님한테도 법무부 쪽 답변이 나왔는지 물어보기도” 했다. 인권위 권고를 받은 기관은 90일 안에 공식 입장을 인권위로 보내야 했다. 유미가 법무부로부터 ‘좋은 소식’이 오길 기다리는 동안에도 법무부가 정한 자진출국 신고 시한은 차가고 있었다.

법무부는 지난해 12월 ‘체류질서 확립 등을 위한 불법체류 외국인 관리대책’을 발표했다. 올해 6월 말까지 스스로 나가겠다고 신고(4만6128명)할 경우 미등록 체류에 따른 범칙금과 재입국 금지를 면제하는 안이었다. 6월을 넘겨 단속되면 체류 기간에 비례해 범칙금을 물리고 내지 않는 사람은 영구 입국금지 됐다. 미등록 장기체류 아동·청소년들에게도 법무부는 ‘자진출국 뒤 재입국 심사’ 방침을 고수했다.

베트남 정부가 띄우는 특별전세기가 5월 말에 들어온다고 했다. 코로나19로 한국 항공기의 베트남 입국은 9월16일까지 전면 중단돼 있었다. 전세기를 타지 못하면 한동안 베트남으로 자진출국 할 수 있는 길은 없었다.

유미는 “나갔다 오기로 마음먹었”다. 급하게 내린 결정이었다. 법무부가 인권위 권고를 수용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유미에겐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없었다. 차근차근 준비할 시간이 없어 복통 치료제 등 응급약만 몇 개 샀다. 마음먹은 지 일주일도 안 돼 유미는 ‘한국에서 살기 위해’ 베트남으로 떠났다. 그동안 유미에게 베트남은 “엄마 아빠의 나라일진 몰라도 나랑은 상관없는 나라”였다. “지금까지 살아온 환경과 완전히 다른 땅”으로 가겠다고 결심한 뒤부터 베트남은 “낯설어서 무서운 나라”가 됐다.

“밥 먹자.”

4일 아침 엄마가 밥상을 차려 유미를 불렀다. 밥상엔 두 나라 음식이 섞여 있었다. 유미는 한국에 있을 때부터 김치찌개를 가장 좋아했다. 베트남에 왔지만 베트남 음식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엄마가 신경 써서 만들어주는 베트남 음식을 속에서 거부하는 일이 많았다. 익숙해지고 싶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베트남에서의 시간 같았다.

두 달 넘는 베트남 생활 동안 유미는 집 안에만 있었다. 엄마를 따라 가끔 시장에 다녀오기도 했지만 집 밖으로 나갈 때마다 겁이 났다. 한국에 있을 땐 학교 졸업 뒤 단속이 무서워 집 밖에 나가지 못했는데, ‘너희 나라로 가라’고 해서 온 베트남에서도 유미는 무서워 집 밖에 나가지 못했다.

유미가 힘들어할 때마다 엄마는 한국 음식을 만들어줬다. 이날 밥상엔 미역국이 있었다. 달걀프라이와 볶은 김치와 돌자반이 곁들여졌다. 그 음식들을 유미 앞에 놓아주고 엄마는 베트남 채소(꽈 멉)를 간장에 찍어 밥과 먹었다.

베트남으로 나올 때 유미의 계획은 인권위 권고에 대한 법무부 답변을 기다리며 한국 유학(D-2)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막상 베트남에 오니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이 커졌다. 인권위 권고가 나온 뒤 가졌던 기대가 많이 옅어졌다. 대학에서 공연을 전공하려면 실제 공연을 많이 봐야 했지만 베트남에선 쉽지 않았다. ‘외국인’으로 지원 가능한 한국 대학의 공연 관련 학과도 거의 없었다. “지원 학과를 바꿔야 하는데” 현재 유미에겐 “그 단계까지 고민할 여유가 없었”다. “법무부의 입장이 어떻게 나오는지 봐야 마음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유미는 한국에 있는 동생들이 걱정됐다. 아빠도 유미와 함께 자진출국 신고를 하고 ‘출국명령’을 받았다. 베트남행 항공편이 없어 비행기를 타지 못하고 있었다. 아빠가 베트남으로 오면 한국엔 고등학교 2학년(17)과 중학교 3학년(15)인 여동생 둘만 남는다. 아빠가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지 못할 땐 동생들은 고아처럼 살 수밖에 없다. 둘째도 1년 뒤면 강제퇴거 대상이 된다. 유미라도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야 동생들을 보살필 수 있다.

유미와 함께 인권위에 호소한 나나
봉사동아리 이끌며 사회복지사 꿈
언어·청각장애 있는 엄마아빠 함께
2년 전에도 “희망 주세요” 탄원

병원 가고, 알바 하고, 수능 보는…
유미와 나나의 작지만 먼 희망
“그냥 평범하게만 살면 좋겠어요”
법무부 인권위 답변 시한 8월14일

‘미등록 이주아동 합법체류보장 촉구연대’가 2008년 3월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 앞에서 연 체류권과 교육권 보장 촉구 기자회견에 아이들도 부모와 함께 참석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미등록 이주아동 합법체류보장 촉구연대’가 2008년 3월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 앞에서 연 체류권과 교육권 보장 촉구 기자회견에 아이들도 부모와 함께 참석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저 역시 아이돌을 좋아하지만

“안녕하세요. 저는 나나입니다. 나나는 몽골 이름을 한국식으로 발음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나나(가명·1회의 ㄱ). 2002년생. 유미와 함께 인권위에서 인권침해를 인정받은 피해자였다. 나나는 인권위를 찾기 2년 전(중학교 3학년 때) 법무부 장관에게 탄원서를 썼다.

“태어나면서부터 저는 언어·청각장애를 가지신 부모님과 불법체류라는 상황 속에서 지금까지 자라왔습니다. 부모님은 어린 저의 손을 잡고 초등학교에 찾아가셔서 교장 선생님께 제가 입학할 수 있는지 불안한 마음으로 부탁을 하셨고, 입학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연신 ‘감사합니다’를 수화로 하셨습니다.”

나나의 아빠와 엄마는 몽골인이었다. 아빠 엄마 모두 태어날 때부터 중복장애가 있었다. 아빠는 장애인이 자립하기 힘든 환경의 몽골을 떠나 한국으로 왔다. 부모가 일찍 사망한 뒤 큰언니에게 의지해 자랐던 엄마는 큰언니가 한국인과 결혼하면서 함께 입국했다. 미등록 신분의 아빠와 엄마는 한국에서 만나 사랑했고 나나를 낳았다. 아빠는 건설일용직으로 일했고, 엄마는 공장노동자로 돈을 벌었다. 아빠 엄마는 한글을 읽지 못했고, 나나는 몽골어를 몰랐다. 아빠 엄마와 나나는 한국어 수화로 대화했지만 수화가 서툴러 “2%만 수화로 하고 98%는 손짓 몸짓으로 했”다.

나나가 2017년 법무부에 탄원서를 보낼 때 아빠가 쓴 탄원서도 같이 갔다.

“저는 딸의 미래가 정말 걱정됩니다. 몽골 문화도 모르는 아이가 몽골로 돌아간다면 많은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아빠로서 상상하기도 힘듭니다. 제 인생의 빛은 오직 딸뿐입니다. 딸이 성인이 될 때까지 보호하며 정직하게 살고 싶습니다. 저희 가족이 비자 없이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것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저희 가족의 사정을 깊이 살펴주셔서 희망을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나나 가족의 탄원서에 법무부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고등학생이 된 나나는 교내 봉사동아리를 조직해 부장으로 활동했다. 16명의 부원과 2주에 한번씩 지역 요양원을 찾아 봉사했다. 사회복지사가 꿈이었지만 유미처럼 ‘1365 포털’에 가입하지 못했다. 고등학생들이 참가하는 대회에도 “나가봤자 수상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참가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저는 평범한 십대 여중생처럼 아이돌을 좋아합니다. 엑소를 정말 좋아하는데 어느 날 콘서트를 너무 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콘서트를 가려면 티켓이 필요하고, 티켓을 얻으려면 티케팅을 해야 하고, 그러려면 예매 사이트에 가입해야 하는데 저는 가입할 수 있는 주민번호가 없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머릿속은 우울로 가득 찼습니다.”(나나 탄원서)

이제 나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 됐다.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학교가 보호해줄 수 있는 시간도 끝나가고 있었다. 몽골에 의탁할 친척이 전혀 없어 유미처럼 자진출국 할 수도 없었다. 나나는 “몽골로 돌아가야 한다면 차라리 높은 데서 떨어져 죽겠다”고 했다. 3년 전 탄원서를 마무리하며 나나는 썼다.

“저희 가족이 바라는 것은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평범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규정상 법무부는 오는 14일까지 인권위 권고에 답을 내야 한다. 인권위엔 ‘2주 정도 늦어질 수 있다’는 법무부 의견이 전달된 상태였다. 법무부 쪽은 <한겨레>에 “아직 검토 중이라 어떤 내용이 담길지 말할 수 없다”고 했다.

프랑스에선 18살 미만의 아동은 원칙적으로 강제퇴거 대상이 되지 않는다. 오스트레일리아(호주)에서 태어나 10년 동안 거주한 아동에겐 부모의 체류자격과 관계없이 10살 생일에 자동으로 시민권이 주어진다. 미국은 2012년 ‘불법체류청년 추방유예제도’(DACA)를 실시했다. 16살 미만 나이로 입국한 이주민은 추방으로부터 일시 보호와 취업·사회보장번호 신청 자격을 얻는다. 2017년 트럼프 행정부가 제도 중단을 선언한 뒤 미국 전역에서 불복 소송이 잇따랐고, 연방대법원도 중단 결정에 제동을 걸었다.

베트남의 유미는 법무부에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한국에서 태어나서 한국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살았어요. ‘너는 베트남 사람’이라고 해서 베트남에 왔어요. 여기 있으면서 ‘나는 베트남 사람인가’ 생각해보지만 여전히 저는 한국 사람 같아요. 지금까지 대단한 걸 원해본 적 없었어요. 그냥 한국에서 평범하게만 살 수 있으면 좋겠어요.”

유미도 나나도 정말 간절히 되고 싶은 건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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