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시대 멤버인 티파니 영이 성소수자 예술가들의 유튜브 채널인 <네온밀크>에 깜짝 등장했다. 티파니는 <네온밀크>가 제작한 ‘2021 프라이드 캠페인’ 영상에서 “LGBTQ+ 커뮤니티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한 사람으로서 여러분들 곁에 항상 서겠습니다”라고 지지와 응원을 보냈다. 유튜브 화면 갈무리
소녀시대의 티파니 영이 ‘다시 만난 세계’에 맞춰 힘차게 춤을 춘다. 지난 14년 동안 못해도 수만번은 췄을 춤인데, 영상을 본 사람들은 새삼스러운 자부심과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번에 공개된 영상은 다름 아닌 ‘프라이드 먼스’(Pride Month) 기념 영상이기 때문이다. “제가 연예계 생활을 하면서도 ‘내가 충분히 하고 있나?’ ‘이 얘기를 해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을 자주 했어요. 하지만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솔직하고, 또 가장 자기답게 행동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셨던 것들, 그리고 사랑과 친절이 항상 이긴다는 걸 보여준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소녀시대 구호처럼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함께해요!”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성소수자 컬처 브랜드 ‘네온밀크’와 함께 만든 영상 속에서, 티파니 영은 익숙한 ‘다시 만난 세계’에 맞춰 수많은 퀴어들과 함께 춤을 춘다.
‘다·만·세’가 성소수자와 앨라이 노래
티파니도 앨라이임을 천명한 바 있어
원곡자도 함께한다는 확인 받은 셈
‘프라이드 먼스’가 무엇이며 그 유래는 어떻게 되는지 익숙지 않은 분들이 계시리라. 누군가에게 6월은 의병의 날과 현충일, 한국전쟁이 시작된 날이 포함된 호국·보훈의 달일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6월 항쟁과 남북공동성명이 있었던 민주와 평화의 달일 것이다. 성소수자들과 앨라이(차별당하는 당사자가 아님에도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에 반대하며 연대하는 이들)에게 6월은 ‘프라이드 먼스’, 자긍심의 달로 기억된다. 1969년 6월28일, 미국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의 술집 ‘스톤월 인’에 모인 성소수자들이 경찰의 기습 단속에 저항하며 일어난 투쟁인 ‘스톤월 항쟁’을 기리는 의미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사회가 규정한 ‘정상성’을 복원하는 방식으로 전후의 어수선한 민심을 수습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했고, 이는 ‘비정상’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던 성소수자들에 대한 탄압으로 이어졌다. 동성애자들을 ‘단속’하는 것이 법적으로 가능했고, 술집에서 성소수자들에게 술을 파는 것 또한 법으로 금지되었다. 그 시절 스톤월 인은 성소수자들도 손님으로 받던 몇 안 되는 술집 중 하나였는데, 그 공간마저 경찰에게 침범당한 이들이 ‘더는 참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일어선 사건이 바로 ‘스톤월 항쟁’이다. 그 이후 6월은 성소수자들과 앨라이들에게 ‘더는 평등을 미루지 말라’고 선언하며 일어섰던 기억을 기리는 자긍의 달, ‘프라이드 먼스’가 되었다.
물론 이렇게 공개적으로 앨라이임을 밝힌 연예인이 티파니 영이 처음인 것도 아니고, 티파니 영이 앨라이임을 밝힌 것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소녀시대는 2017년 데뷔 10주년 기념 앨범 <홀리데이 나이트>의 타이틀곡 ‘올나이트’ 뮤직비디오에 드래그 아티스트들을 등장시킨 바 있고, 티파니 영은 미국과 한국 사이에서 경계인으로 살면서 경험한 오해와 혼란을 성소수자 커뮤니티의 오랜 모토인 ‘자기애, 조건 없는 사랑과 포용, 표현의 자유, 희망’을 통해 극복할 수 있었다며 앨라이임을 천명한 바 있다. 방탄소년단의 알엠(RM)과 이달의소녀의 이브, 마마무의 문별, 세븐틴의 버논 등 다양한 아이돌들이 인터뷰에서 성소수자 커뮤니티를 향한 연대와 지지 의사를 밝혔으며, 래퍼 슬릭은 엠넷 경연 프로그램 <굿걸: 누가 방송국을 털었나> 무대에 레인보우 플래그를 들고 올랐다. 탑독 멤버였던 시절 무성애자라고 커밍아웃한 바 있는 댄서 나빈치, 데뷔할 때부터 동성애자임을 커밍아웃하고 활동하고 있는 가수 홀랜드처럼, 업계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고 활동하고 있는 성소수자 당사자들도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그럼에도 티파니 영의 이번 영상이 유독 인상적인 이유는 뭘까? 그건 성소수자들과 앨라이들이 오랜 시간 ‘다시 만난 세계’에 보냈던 사랑의 역사가 길기 때문이리라. ‘다시 만난 세계’는 ‘두렵지만 용기를 가지고 함께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 보자’는 진취적인 메시지를 담은 곡이고, 성소수자들과 앨라이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수많은 집회와 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에서 ‘다시 만난 세계’에 맞춰 노래하고 춤을 춰왔다. 그런데 원곡자가 단순히 “노래를 사용해도 좋다”는 의사를 밝히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주제곡으로 삼아줘서 영광”이라는 말과 함께 지지와 연대의 메시지를 함께 보냈다. ‘다시 만난 세계’에서 영감과 용기를 얻었던 것이 우리만의 짝사랑은 아니었다는 걸, 우리가 노래하고 춤을 추고 행진하던 순간마다 원곡자의 마음도 우리와 함께 발맞춰 걷고 있었다는 걸 확인받은 셈이다.
때마침 차별금지법 서명 10만명 넘겨
성소수자 권리 보장돼도 나라 안 망해
이 정도면 사회적 합의 충분치 않나?
영상이 공개된 시기도 의미를 더했다. 티파니 영이 참여한 네온밀크의 영상은 2021년 6월16일, 더는 미루지 말고 지금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는 국회 국민동의청원 서명자 수가 마침내 10만명을 넘긴 지 이틀 뒤에 공개되었다. 아직 실제 법안 제정까지는 거쳐야 할 논의와 가야 할 길이 멀지만, 적어도 차별금지법을 원하는 시민들의 목소리를 모아 ‘사회적 합의’를 입증하는 데 성공했다는 기쁨 속에 공개된 영상인 것이다. 2006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고 권고한 지 15년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지 못한 건, 성소수자 혐오를 조장하며 차별금지법을 ‘나쁜 법’으로 몰아간 보수 개신교계의 반대 때문이다. 많은 신자 수를 확보한 대형 교회들이 앞장서서 차별금지법 반대 여론을 조성했고, 조직적인 반대 앞에서 표수를 걱정했던 정치권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말을 방패 삼아 차별금지법 입법을 미뤄왔다. 20대 국회에서는 아예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하지만 ‘사회적 합의’는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변화가 달갑지 않은 이들은 언제나 “사회적 합의가 부족하기에,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일제의 침탈에 맞서 의병들이 들고일어났을 때에도, 직선제를 요구하는 시민들이 제5공화국의 강요된 침묵을 깨고 일어났을 때에도, 변화를 막으려는 이들은 “사회적 합의가 부족하다” “혼란을 야기시킨다” 같은 말들을 반복했다. 차별금지법 또한 마찬가지다. 혹자는 성소수자에 대한 관용과 개방이 보편화된 서구권과 달리 한국은 아직 때가 아니라고 말하겠지만, 서구도 처음부터 관용적이고 개방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앞서 말한 스톤월 항쟁은 성소수자에 대한 탄압이 가장 극심하던 시기에 일어났다. 스톤월 항쟁을 기념하며 퍼레이드를 연 이들 또한 스톤월 항쟁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기다리지 않고, 항쟁 바로 다음해인 1970년에 퍼레이드를 강행했다.
차별금지법 입법 논의가 시작된 지 15년이 지났다. 이제 티브이엔(tvN) 드라마 <마인>은 레즈비언 여성 정서현(김서형)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제이티비시(JTBC)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는 트랜스 여성인 것을 아우팅당한 캐릭터 마현이(이주영)가 그에 굴하지 않고 편견에 맞설 것을 선언하는 장면을 담아냈다. 엠비시 에브리원(MBC every1) 토크쇼 <비디오스타>는 한국을 대표하는 드래그 아티스트 나나영롱킴을 섭외해 드래그 퍼포먼스와 성소수자 커뮤니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2세대 케이팝 걸그룹 중 가장 대중적인 노선을 걸으며 성별과 세대를 아울러 폭넓은 사랑을 받았던 ‘국민 걸그룹’ 소녀시대의 멤버가, 소녀시대를 대표하는 ‘다시 만난 세계’에 맞춰 춤을 추며 성소수자 커뮤니티를 향한 지지와 연대의 뜻을 밝혔다. 그리고 이 광경을 지켜보는 이들은 새삼스러운 자부심과 기쁨으로 박수를 보낸다. 성소수자들의 권리가 보장되면 가정이 무너지고 나라가 망할 거라고 말하는 이들의 우려와는 달리, 이 모든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나는데도 아직 가정도 나라도 망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사회적 합의는 충분히 만든 것 아닌가?
▶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정신 차려 보니 티브이(TV)를 보는 게 생업이 된 동네 흔한 글쟁이. 담당 기자가 처음 ‘술탄 오브 더 티브이’라는 코너명을 제안했을 때 당혹스러웠지만, 지금은 그러려니 한다. 굳이 코너명의 이유를 붙이자면, 엔터테인먼트 산업 안에서 무시되거나 간과되기 쉬운 이들을 한명 한명 술탄처럼 모시겠다는 각오 정도로 읽어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