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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예비역 김 병장의 수십년 내무반 악몽…‘군 PTSD 온다’

등록 2021-09-25 09:24수정 2021-10-01 18:09

[한겨레S] 커버스토리
군필자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왜?

군 생활 도중 나쁜 기억 탓에 제대 뒤에도 장기간 무기력·우울
피해 인지 못하거나 방치, 정부 차원 트라우마 치유 지원 없어
수십년 지나도 ‘내무반 꿈’ 흔해…“심리 프로그램 보편화돼야”
그림 고정연 작가(군인권센터 후원회원)
그림 고정연 작가(군인권센터 후원회원)

취업을 준비 중인 서른살 ㄱ씨는 2014년 군에서 제대했다. 벌써 7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지금도 군에서 좋지 않은 기억 탓에 우울과 불안, 무기력 증상을 겪는다. 따져보면 ㄱ씨 잘못이 아니었다. 유격훈련을 받다 발목을 다친 게 발단이었다. 연골이 손상돼 3개월가량 입원 치료가 불가피했다. 당시 소속 부대에선 그가 장기간 복귀하지 않은 것을 두고, ㄱ씨를 마치 복무기피자처럼 취급했다. ㄱ씨는 부상 정도를 있는 그대로 보고했지만,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군대에서는 아파도, 다쳐도, 치료가 오래 걸리는 질병에 걸려도 최대한 군 생활을 하게 하거든요. 군에서 진술서만 한 스무번 쓴 것 같아요. 간부들한테 복무를 기피한 병사로 찍히니까 작은 것 하나라도 진술서를 쓰게 하고 그랬어요.”

험난했던 군 복무를 마친 뒤 ㄱ씨에게 무기력과 우울증이 찾아왔다. 시간이 흘러도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제대 후 ㄱ씨는 정신과 진료를 받았다. ㄱ씨는 군에서 나쁜 기억 탓에 정신적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지난해 비영리 민간단체인 군인권센터가 시범운영하는 군 트라우마 치유프로그램 ‘마음결 프로그램’에 상담을 신청했다.

“병원에서 의사와 짧게 대화한 것 외에 긴 심리상담을 받은 적은 처음이었죠. 7년 전 힘든 경험을 이렇게 자세히 말한 사람은 상담 선생님이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나쁜 기억이 떠올라 괴로울 때 진정시키는 호흡법도 알려줬는데 그런 것들이 도움이 됐어요.”

군 내 사건·사고 피해 당사자뿐 아니라 이들의 가족이 트라우마를 겪는 경우도 찾아볼 수 있다. 2016년 군에서 자식을 잃은 박미숙씨는 지금도 일상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박씨의 아들 홍정기 일병은 군 생활 도중 발병한 급성백혈병을 제때 조처받지 못해 결국 보름 만에 뇌출혈로 목숨을 잃었다. 군은 사건을 단순 사고사로 축소하려 했다. 군의 부실한 의료 대응을 규명하기 위해 6년째 싸움이 이어졌다. 박씨는 자식을 잃은 상실감과 자책감, 국가를 향한 분노와 무력감으로 눈물의 세월을 보내다 마음마저 스러졌다. 그는 무너진 일상을 찾기 위해 올해 초 마음결 프로그램을 신청했다. 19차례 상담에서 박씨는 어디에도 털어놓을 수 없는 심리적 고통을 전문 상담사와 나눌 수 있었다.

“치유 프로그램이 있는 날은 외출 준비를 하고 밖으로 나가요. 그 과정 하나만으로 일상이 회복되는 느낌을 받아요. 얼마 전 6년 만에 처음 내 옷을 한벌 사봤어요. 아이를 잃은 뒤, 나 자신을 돌보는 일을 한 게 거의 처음인 것 같네요.”

넷플릭스 드라마 <디피>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드라마 <디피>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왜 지금 ‘군 트라우마’인가

“피티에스디(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온다.”

최근 군대 내 폭력과 부조리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넷플릭스 드라마 <디피>(D.P.)가 인기를 끌면서 군대에 다녀온 이들을 중심으로 유행처럼 회자되는 말이다. 실제 군대에서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전역 뒤까지 이어져, 수십년씩 지워지지 않는 마음의 상흔으로 남은 사례들을 주위에서 쉽게 들을 수 있다. 반드시 강도 높은 인권침해를 당한 이들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일상적인 군 생활을 했던 이들이라도, 엷지만 장기간 이어진 인권침해나 스트레스 탓에 전역 뒤 일종의 ‘피티에스디’ 피해를 겪는 것이다.

39살 직장인 심아무개씨는 2005년 군에서 제대했다. 벌써 16년이 지났지만, 심씨는 지금도 한해 두어차례 잠결에 군 내무반 풍경을 본다. 그는 꿈에서 군 생활복을 입은 채 긴장 속에 얼어붙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고 했다.

“일등병 때 내무실 딱 그 풍경, 특정한 장면이 반복적으로 꿈에 나타납니다. 흔한 군대의 내무실 풍경인데 저는 항상 누군가의 눈치를 보고, 억눌린 모습이에요. 군에서 딱히 가혹행위라고 할 만한 수준의 일은 겪진 않았는데, 당시 심리적 압박이 상당했던 것 같습니다.”

군 스트레스로 전역 이후 대인 관계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분노와 억울한 감정이 들어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경우들을 주변에서 볼 수 있다. 사회생활 도중 군에서 괴로웠던 기억을 떠올리거나, 군대에 다시 가는 꿈을 반복해 꾸는 사례는 오히려 흔하다. 군 스트레스로 음주·게임·도박 등 중독성 행동에 빠져드는 이들도 있다. 심리학 전문가들은 ‘군 트라우마’에 대한 학계의 교과서적 정의는 없지만, 이런 증상들을 군 트라우마 증상의 하나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주혜선 한국트라우마연구교육원 원장은 “군대는 폐쇄된 공간적 특성, 대인 관계에서 상명하복의 경직된 의사소통 구조, 다양성이 존중되기 어려운 상황, 개인의 주관적 경험이 수용되지 않는 곳”이라며 “군대가 아닌 일반 사회생활이었다면 취할 수 있는 저항, 도주 등 개인의 여러 방어 행동들이 군대에서는 제한받게 되는데, 이것이 심리적 충격으로 이어져 제대 후에도 트라우마를 경험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말했다. 특히 일정 연령의 성인에 병역 의무를 부과하는 ‘국민개병제’를 원칙으로 하는 국내 상황에서, 일상적인 군 심리 치유 프로그램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첫발 뗀 상담 프로그램

군 트라우마에 대한 개념조차 정립되지 않은 상황이어서, 정부 차원의 치유센터는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발행한 정보소식지 ‘나라경제’를 보면, 미국은 1989년부터 제대군인의 정신적 상처 치유를 위해 전담인력만 2만여명이 투입되는 국립피티에스디센터를 설립했다. 제대군인이 회복 코디네이터와 상담가를 통해 무료로 신체·정신 건강 치료를 받도록 지역사회 지원 시스템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반면 국내에선 정부 대신 비영리민간단체인 군인권센터가 지난해부터 군 인권침해 피해자와 군 유족을 위한 심리 치유 프로그램 ‘마음결 프로그램’을 개발해 시범 운영하기 시작했다. 삼성전자와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운영하는 ‘나눔과 꿈’ 지원사업의 하나로 선정돼 지난해 9월 첫발을 뗀 군 트라우마 치유 프로그램이다. 조규석 군인권센터 기획정책팀 간사는 “우리 사회는 군 생활에서 겪은 심리적 피해에 대해 ‘정신력으로 극복하라’, ‘남자라면 참고 견뎌라’ 같은 사회적 압력이 있다. 하지만 국가가 징집해 의무 복무를 하는 과정에서 얻은 트라우마는 개인의 정신력으로 해결할 일이 아니다”라며 “민간 차원에서라도 심리 상담을 위한 치유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일이 시급해 군 인권센터가 지난해부터 시작했다”고 말했다.

올해 총 8명의 군 인권침해 피해자와 군 유족이 상담에 참여한 ‘마음결 프로그램’은 피해자와 피해 가족들의 극심한 스트레스 반응을 줄이는 것과 우울·불안 예방 등을 목적으로 했다. 일상에서 과거의 기억이 갑자기 떠오르는 상황이 왔을 때, 호흡법이나 착지법 등 다양한 안정화 기법을 익히도록 도와 피해자들의 스트레스 대처 역량을 높이도록 했다. 트라우마로 인한 불안, 공포 등 고통 강도를 매일 0~10 사이 숫자로 기록해 모니터링하기, 규칙적인 식사나 충분한 수면, 운동 등 전반적인 신체건강을 보살피는 활동을 계획하고 실행하도록 돕는 것도 프로그램의 일부다.

마음결 프로그램 개발에 참여한 4명의 정신건강임상심리사가 지난 13일 서울 마포구 군인권센터 사무실에서 회의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마음결 프로그램 개발에 참여한 4명의 정신건강임상심리사가 지난 13일 서울 마포구 군인권센터 사무실에서 회의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이 프로그램을 개발한 연구팀은 보건복지부 정신건강임상심리사 1급 등 상담분야 전문 자격을 취득한 심리학 석·박사들이다. 이들은 범죄 피해나 인권침해 트라우마 등에 관련한 경력을 바탕으로 군 트라우마라는 전인미답의 분야를 개척하고 있다.

프로그램 개발팀의 책임자 김소명 개발원(정신건강임상심리사)은 “트라우마에 관한 일반적인 연구는 상당히 진척돼 있지만 군 트라우마를 주제로 임상심리학계에서 프로그램을 개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사전 참고 자료가 거의 없지만 세미나 등을 통해 군 인권침해 피해 실태나 군 사망자 유족 지원 방안 등을 살펴보며 프로그램 개발에 참고했다”고 말했다. 그는 “외국 사례를 보면, 전쟁을 경험한 군인의 트라우마 치료 프로그램이 연구되고 있지만 우리나라처럼 징병제 국가에서 광범위한 군 경험자들이 겪는 군 트라우마에 맞춰 치유 프로그램이 개발된 바가 없다”고 덧붙였다.

상담에 참여한 이들은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을 돌보는 일을 시작하게 됐다고 말한다. 실제 박미숙씨는 19차례 이어진 일대일 상담을 받으며 일상을 회복하고 있다. 괴로운 기억이 떠오를 때, 힘든 생각이 반복될 때 박씨는 몸과 마음을 안정시키는 방법들을 익히고 실천해보고 있다. 평소 자신의 마음 상태를 객관화할 수 있도록 증상의 수치를 기록해보는가 하면, 힘들 때 편안한 장소를 떠올려보고, 규칙적인 식사와 수면 등 자신을 돌볼 수 있는 행동들을 상담사와 함께 하나둘 시도하고 있다.

처음엔 박씨도 이 프로그램이 얼마나 도움이 될까 반신반의했다. 자식 잃은 마음을 치유받는다는 것 자체가 당당하지 못한 것 같은 마음, 국가에 대한 분노 때문에 ‘내가 왜 이런 치료를 받아야 해?’라는 억울함도 들었다.

“부모 잃은 고통을 아는 사람들은 있지만, 자식 잃은 고통은 주변에 말할 사람이 없어요. 그런데 이 프로그램에서 내 감정에 대해 말했을 때, ‘그런 감정이 드는 건 당연한 거죠’란 말씀을 들었어요. 처음으로 지지받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자식을 잃은 상실감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6년을 살았는데, 박씨는 이제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방법을 조금 배운 것 같다고 했다.

차성이 정신건강임상심리사가 지난 13일 군에서 자식을 잃은 유가족과 상담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차성이 정신건강임상심리사가 지난 13일 군에서 자식을 잃은 유가족과 상담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트라우마 즉시 개입’ 체계 갖춰야

박씨 외에도 시범 프로그램에 참여한 군 관련 트라우마 피해자 7명은 정신적 충격을 입은 뒤 수년이 지나서야 이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었다. 참여자들은 오랜 기간 심리적 불편을 느끼면서도 ‘트라우마’라고 인지하지 못했거나, 알더라도 제때 치유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군 생활로 인한 트라우마나 군에서 자녀를 잃은 유족의 트라우마는 시간이 지나기 전 적절한 시기에 돌보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박신영 프로그램 개발원은 “수년의 세월이 흐른 뒤 트라우마적 증상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상담해보니 위기 상황이 발생했을 때 즉시 개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위기 당시 적절하게 케어해줬다면 만성적 고통이 이만큼 크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트라우마를 야기한 군 내 사건의 유형에 따라 치유 프로그램을 정교하게 세분화하는 것도 필요한 상황이다. 구타, 성폭력, 부당징계 등 군에서 겪은 가혹행위와 인권침해 유형에 따라 트라우마 증상이 다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군 트라우마에 대한 정확한 실태조사도 선행될 필요가 있다. 차성이 프로그램 개발원은 “마음결 프로그램은 폭력, 괴롭힘 등 전반적인 군 내 인권피해 트라우마를 종합적으로 다루지만 앞으로 상담 케이스가 늘면 각각의 피해에 따라 초점화된 프로그램이 세부적으로 다양하게 구성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군에서 겪은 트라우마를 치유할 기회를 더 많은 사람들이 가져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마음결 프로그램을 감수한 주혜선 한국트라우마연구교육원 원장은 “군에서 발생하는 여러 일들이 총기 사건, 구타 사건, 성폭력 사건 등 이른바 ‘사건’으로 호명되면서 ‘사건을 해결한다’는 접근법이 강조됐다. 하지만 사건의 해결과 동시에 피해자들이 일상을 되찾고 심리적 충격을 회복하게 돕는 것도 우리 사회가 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김미향 기자 aro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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