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릴 때마다 비싸진 재료 가격 때문에 ‘망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절로 들어요.”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화가 정다희(29)씨는 한달 전부터 그림 그릴 때 필요한 캔버스 구입을 망설이고 있다. 천과 목재 가격이 올라 캔버스 가격이 크게 오른 탓이다. “캔버스 가격이 너무 많이 올라 도저히 살 수가 없어요. 일단 가격이 내릴 때까지 버티려고 합니다. 재룟값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 자리도 더 구하려고요.”
국제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국제 펄프 가격이 급등하면서 종잇값이 들썩이고 있다. 최근 생활필수품인 화장지, 티슈 가격이 오르고 있는데, 지갑 사정이 넉넉지 않은 미대생들과 예술인들에게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16일 서울 마포구 홍익대 근처 ㅎ화방 직원은 “2주 전 20만원 초반대였던 캔버스 가격이 지금은 28만8천원으로 8만∼9만원 정도 올랐다. 주로 학생들이 찾는 곳이라 최대한 가격을 올리지 않고 버티는 중인데, 물가가 계속 오르고 있어 이제는 가격을 올려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이라고 했다. 화방에서 재료를 고르던 서양화 전공 대학원생 윤아무개(24)씨는 “평소 천과 나무가 함께 있는 캔버스를 실습할 때 쓰곤 했는데 요즘엔 가격이 너무 올라서 2900원짜리 나무판으로 대신해 쓰고 있다”고 말했다. 한번 붓질을 잘못하면 종이를 그대로 버려야 하는 수채화, 동양화 전공 예술가들의 걱정은 더 깊다. 한 동양화 작가는 “그림 그릴 때마다 마음이 떨린다. 붓질 한 번 잘못했다가 한지나 종이 버리는 게 제일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최근 주요 제지업체들은 펄프 가격 인상 압박을 못 이겨 일제히 종이 가격을 올리자 연쇄적으로 관련 제품 가격이 올랐다. 국내 1∙2위 제지기업인 한솔제지와 무림페이퍼는 지난 1일부터 종이 가격을 15% 인상했다. 무림페이퍼 쪽은 “코로나19 2년 동안 제지업계가 불황을 겪은 상황에서 펄프 등 원자재 가격이 오르면서 부득이하게 가격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아직 확정된 건 아니지만 앞으로 물가가 더 오르면 또다시 가격을 인상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산업통상자원부가 공개한 원자재 가격을 보면, 섬유나 종이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펄프 가격은 지난달 21일 기준 1톤당 840달러였다. 올해 초보다 15.86% 올랐다. 대한목재협회가 발표한 ‘2022년 3월 목재 가격 동향’을 보면 러시아산 제재목 가격은 1㎥당 최대 90만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54만원에 견줘 60% 이상 급등했다. 목재·펄프 주요 생산국 내부 요인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영향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한국제지연합회 쪽은 <한겨레>에 “산림자원이 넉넉하지 않은 우리나라 같은 경우 국제 펄프 가격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우크라이나에서 생산된 옥수수 전분이 고급 인쇄용지 표면의 틈새를 메꾸는 데 주로 사용되는데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도 제지 가격에 큰 영향을 줬다”고 설명했다.
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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