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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최종 무죄” 임성근에 면죄부 준 고무줄 잣대 ‘직권남용’

등록 2022-05-22 09:23수정 2022-05-22 10:28

[한겨레S] 법정에 선 양승태 사법부
‘직권남용 활용법’ 논란

널뛰기 판결 낳는 ‘직권남용죄’
임성근 재판 계기로 해석 쏟아져
공무원 부당행위 방어에도 활용
해석기준 법제화 필요성 제기돼
19일 오후 서울 성동구 한양대 백운규 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의 연구실에서 검찰 관계자들이 ‘산업부 블랙리스트’ 의혹 사건 관련 압수수색을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19일 오후 서울 성동구 한양대 백운규 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의 연구실에서 검찰 관계자들이 ‘산업부 블랙리스트’ 의혹 사건 관련 압수수색을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9일 검찰은 블랙리스트 의혹을 받는 백운규 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의 연구실 등을 압수수색했다. 국민의힘 전신인 자유한국당이 2019년 백 전 장관 등이 산업부 산하 공공기관장들을 압박해 사표를 내게 했다며 직권남용으로 고발한 지 3년여 만에 수사가 시작되면서다.

검찰의 전 정권 관련 수사가 본격화되는 모양새다. 주요 혐의는 ‘직권남용.’ 직권남용죄는 뇌물에 관한 범죄와 함께 공무원의 대표적인 부패 범죄로 꼽힌다. 불과 몇 년 전 사문화됐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국정농단과 적폐청산, 그리고 사법농단 사태를 거치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이 낸 ‘한국의 범죄현상과 형사정책 2020’을 보면, 2016년까지 직무유기보다 발생 건수가 적었는데 2019년은 1784건으로 가장 많은 부패범죄 유형이 됐다. 이에 더해 전 정권을 대상으로 한 검찰 수사가 본격화하면서 ‘직권남용 활용법’이 정립돼야 할 필요성은 나날이 커지고 있다.

개념 모호한 ‘직권’과 ‘남용’

그러나 ‘널뛰기 판결’이 잇따라 나와 혼란이다. ‘직권’과 ‘남용’ 개념이 추상적이고 모호해 재판부마다 그 의미와 범위를 다르게 파악해서다. 지난 4월28일 임성근 전 부장판사(현 변호사)의 재판 개입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최종 무죄 판결은 직권남용을 둘러싼 혼란을 보여준다.

직권남용(형법 제123조)죄의 구성요건은 크게 세 가지다. 공무원이 ①직권을 ②남용하여 ③상대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권리 행사를 방해해야 한다. 첫 관문부터 난관이다. 일단 공무원의 문제 행위가 그에게 주어진 일반적 직무 권한에 포함돼야 한다. 그렇지 않고 공무원으로서의 ‘지위’를 이용해 한 갑질은 죄형법정주의 원칙상 직권남용으로 처벌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이명박 전 대통령이 ‘엠비(MB) 집사’로 불리던 김백준 전 청와대 총무기획관으로 하여금 실소유주 의혹을 받던 회사 다스의 소송 관련 업무를 보도록 지시한 것은 대통령 권한이 아니라 대통령 지위를 이용한 사적인 업무 지시에 불과하기 때문에 직권남용으로 처벌할 수 없다.

재판 개입은 어떨까. 임성근 전 부장판사는 2014년 2월부터 2년 동안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판사로 일하며 박근혜 전 대통령 ‘세월호 7시간’ 명예훼손 재판을 비롯해 세 건의 재판에 개입했다. 청와대 심기 경호를 위해, 언론·시민단체 공격을 우려해 법리를 틀고 양형이유를 수정하는 등 판결을 통제하고 관리했다. 그러나 독립된 재판에 개입할 직무상 권한이 사법행정권에 포함돼 있을 리 없다. 결국 수석부장판사라는 지위를 이용해 저지른 일탈에 불과하므로 처벌할 수 없다. 대법원 2부(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이런 법리에 따라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수긍했다.

그러나 법원 판단의 막이 내려도 의문은 여전하다. 대법원은 피고인의 재판관여행위가 법원의 재판권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직권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러나 “재판권 침해는 형사수석부장판사의 직권인 사법행정권을 남용한 ‘결과’일 뿐이다. 따라서 형사수석부장판사의 직권인 사법행정권을 남용한 부당한 지시행위의 결과로 담당 재판부의 재판권이 침해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오병두 홍익대 법학과 교수) 형사수석부장판사는 법관 근무 평정, 사무 분담, 언론 홍보, 대법원 보고 등의 직무를 맡는다. 이 직무상 권한을 ‘근거’로 지시한 것이고 담당 재판부가 이를 따르면서 재판 관여라는 결과가 발생한 것이다.

하급심 판단이 논란이 되면서 학계와 법조계에서는 다양한 해석법이 쏟아졌다. 그러나 이런 이견들이 무색하게 재판은 대법관 전원의 판단을 받는 대법원 전원합의체에 회부되지 않은 채 소부에서 원심 판단을 재확인하는 수준에 그쳤다. 판결문은 5쪽에 불과하다. 대법원이 규범적 가치와 기준을 제시하는 ‘정책법원’으로서 역할을 하리라는 기대를 저버렸다는 비판도 나왔다.

판단 기준의 혼란은 예측가능성의 저하, 처벌의 빈칸, 책임의 공백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직권 안에서 이뤄진 잘못은 직권남용죄로 처벌해도 직권 밖에서 행해진 행위는 해당 공무원이 수뢰했을 때만 처벌 가능성이 뚜렷해지는 것 아닌가. 공무원 조직의 관료화가 심해지면서 수뢰로 포섭되지 않는 그밖의 조직 보호, 인사상 이익을 위한 범죄가 늘어나는데 처벌은 더 어려워질 수 있다.”(재경지법의 한 판사)

판단 기준의 혼란은 곳곳에 영향을 미친다. ‘산업통상자원부 블랙리스트’ 의혹을 수사하는 검찰은 “법원 판결을 통해 정립되는 법리를 참고할 필요가 있었다”며 사건 구조가 유사한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 직권남용 사건’의 대법원 확정판결이 나오는 것을 기다리다가 수사가 3년 넘게 늦어졌다고 설명했다. 법을 잘 아는 공무원들의 부당행위 방어 논리로 활용되기도 한다. ‘고발 사주’ 의혹의 손준성 검사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수사 과정에서 “고발장 작성은 검사의 일반적인 직무권한에 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바 있다.

국회, 지위남용 관련 법제화해야

법원의 일관된 해석이 필요한 한편, 국회가 입법으로 보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직권과 남용의 해석 기준을 법령에 명시하거나 아예 지위남용죄를 신설해 처벌의 공백을 메우자는 것이다. 상급 공무원이 지위를 이용해 의무 없는 일을 시키는 일종의 갑질 행위는 직권 남용보다 죄질은 더 나쁜데 처벌은 받지 않는다. 지위남용죄를 신설하면 이런 행위는 물론 직권남용 요건을 좁게 해석해 법망을 빠져나간 행위까지 처벌할 수 있다. 독일 형법도 “공무원으로서 권한 또는 지위를 남용하는 경우”를 처벌한다. 2022년 1월 국회에는 직권 남용뿐 아니라 지위를 이용한 불법행위를 처벌하도록 하는 법안(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안)이 발의돼 있다.

직권남용 재정비는 직권남용죄의 남용을 막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판단 기준의 혼란은 정치 보복, 공무원의 소극 행정으로 이어진다. 2021년 4·7 재보선을 앞두고 국토교통부 공무원들이 부산 가덕도 신공항 사업에 대해 이를 반대하지 않으면 직권남용죄로 처벌받는 것은 아닌지 법무법인 자문을 거친 것으로 알려진 바 있다. 직무 수행이나 정책적 판단을 할 때 직권남용으로 수사를 받는 것 아닐지 하는 우려가 공무원 조직에 확산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처벌을 못 해서 문제, 또 처벌 범위가 너무 넓어서 문제인 건 모두 직권남용죄가 중심을 못 잡고 불안정적이어서 벌어지는 일이다. 검찰도, 법원도, 국회도 생각이 다 다르고 어느 한쪽도 중심을 못 잡고 있다. 결국 그로 인한 불행은 국민들의 몫일 수밖에 없다.”(김남근 변호사·민변 개혁입법특별위원회 위원장) 직권남용죄는 중심을 잡고 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고한솔 한겨레21부 기자 sol@hani.co.kr

2019년 3월11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에 대한 첫 재판 이후 여전히 진행 중인 ‘사법농단 재판’을 법정 르포 형식으로 중계해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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