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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MBC·YTN 민영화, 군사정권 이후 다시 등장한 제왕적 언론관”

등록 2022-12-03 09:00수정 2022-12-03 23:59

[한겨레S] 인터뷰
퇴임 앞둔 원용진 서강대 교수
지난달 25일 서울 마포구 서강대 자신의 연구실 앞에서 만난 원용진 교수. 그는 올해 정년을 맞았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지난달 25일 서울 마포구 서강대 자신의 연구실 앞에서 만난 원용진 교수. 그는 올해 정년을 맞았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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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가 있겠습니까.”

원용진(65) 교수에게 인터뷰를 제안하니 돌아온 답이다. 서울 마포구 서강대 책으로 발 디딜 틈 없는 그의 연구실, 세월의 더께를 담은 눅눅한 책 냄새가 펼쳐진다. 원 교수가 뒤적뒤적 노트 한권을 찾아 연다. 자칫 지루해질 인터뷰를 대비한 대본인 듯 노트 안 글귀를 검지로 짚어간다.

‘재미없으니 돌아갈까.’

1980년대 후반. 미국 위스콘신대학교 교정을 거닐던 박사과정생 원용진의 귀국할 결심은 사뭇 진지했다. 그의 발걸음이 갓 부임한 문화연구자 존 피스크의 강연장으로 향한 건 “지나던 길에 포스터를 본 우연”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피스크는 ‘엄혹하던 박정희 독재 시절, 교내 방송국에서 학내 가요제(서강가요제)를 기획하고 피디를 꿈꾸던 날라리” 원용진의 열망이 틀리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었다. 대중이 몸으로 느끼는 희열을 폄훼하지 않는 피스크의 자장 안으로 원용진은 자연스럽게 빨려 들어갔다. “대중문화 수용자, 대중의 역동성을 한국의 민주화와 연결지어보겠다”는 야심도 그때 품었다. 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온 1993년, 6개월 동안 서태지 팬클럽과 함께 한 현장연구 또한 “(대중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그 ‘믿음’은 “가요순위 프로그램 폐지 등으로 거침없이 나아가면서 오빠를 좋아하는 마음을 사회화하는 서태지 팬클럽”을 보며 여물었다. ‘이들을 돕는 걸 나의 임무로 삼는 건 어떨까’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때 그 고민은 1998년 강내희(중앙대 교수), 심광현(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같은 ‘울트라’ 좌파나 대중문화에 관해서라면 죽이 잘 맞았던 이동연(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과 함께 시민사회단체 ‘문화연대’를 만든 계기가 됐”다.

그 뒤로 문화운동 판이 벌어지는 날엔 늘 원용진이 있었다. 젊은 시절의 최민식 배우 등과 함께한 ‘스크린 쿼터 폐지’부터 여전히 논쟁적인 ‘대마초 합법화’나 ‘문신 자유화’ 등 크고 작은 흐름을 가리지 않았다. 그의 질주는 때론 운동 판을 넘어섰다. “결국은 학교가 그리워 도망 나왔”지만, 2003년 노무현 정부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문화전문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전국 곳곳 공동체 라디오, 영상미디어센터가 그때의 아이디어였”다.

은퇴를 앞두고 “나이 들어 달라졌다”고 하지만 현안을 묻고 답할 때의 활력은 여전했다. <문화방송>(MBC) 전용기 탑승 배제 문제 등 최근 언론 환경에 관해 말할 때는 “지난 40여년 동안 없었던 제왕적 언론관이 나타났다”며 비등점을 훌쩍 넘기도 했다. 최근까지 그가 시청자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와이티엔>(YTN)의 지분 매각 과정에 대해선 “(언론 장악을 위해) 구조 자체를 바꾸려는, 예전에는 없었던 행태”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문화연구자로서 바라본 이태원 참사를 힘겹게 돌아 “그냥 동네 형으로 살고 싶다”는 마지막 바람을 얘기하기까지, 타고난 재미주의자와 만난 11월25일 오후 반나절은 말 그대로 ‘순삭’됐다.

지난 10년, 생존이 화두였다

―건강은 어떠신지요?

“5년 전 걸린 암으로 몸무게가 15㎏이 빠진 뒤로 복구가 잘 안됩니다. 그래도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돌아보니 암에 걸린 것이 아니라도 지난 10년 동안 살기 위해 살았네요.”

‘생존’을 열쇳말로 이야기는 이어졌다. 그가 문화연대를 이끌던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지나고, 이명박 정부가 들어섰을 때 그는 이른바 ‘요주의 인물’이 돼 있었다.

―이명박 정부 이후로 고초를 겪으신 바는 잘 알려지지 않았어요.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한 당일, 이명박 정부에서 제 동향에 관심을 가질 정도였으니까요. 지금도 궁금합니다. 왜 나였을까. 학회장(한국언론정보학회)이어서? 문화연대 대표라? 아니면 뭘까. 돌아보면, 많이 힘들었어요. 그 뒤로 제가 회장으로 있던 한국언론정보학회는 쇠고기 광우병 촛불집회 당시 광우병 대책회의에 참여한 1800여개 시민사회단체 중 하나였다는 이유로 불법·폭력시위 관련 단체 목록에 올라갔죠. 곧 정부 보조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됐고요. 저만 아니라 제가 맡고 있는 단체도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어요. 그래서 더 힘을 냈죠. (학계에서의) 생산성은 많이 떨어진 시기였지만 (문화)운동은 열심히 했어요.”

―2017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로는요?

“글쎄요. 문재인 정부 들어서 오히려 더 힘들더라고요. 주변에서 ‘문재인 정부는 우리 편 아니냐’는 분위기 같은 게 생겼거든요. 운동이 동력을 잃으면서, (사회) 비판 자체에 ‘재미’가 없어졌달까. 그땐 ‘문화연구 하는 사람은 뭘 해야지’ 그런 고민들이 많았죠. 돌아보면 그 시기 한류연구가 주를 이룬 이유이기도 한 것 같아요. 물론 그게 나쁘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그 또한 2020년 <한류에서 교류로>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막무가내식 ‘제왕적 언론관’

―은퇴를 앞둔 언론학자로서 문화방송에 대한 대통령 전용기 탑승 배제부터 와이티엔 지분 매각 등을 바라보는 심경은 어떠실지 궁금합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에도 언론 장악 시도는 있었죠. 그런데 다른 점이 있어요. 언론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바꾸려고 하지는 않았어요. 와이티엔은 아예 주주를 바꾸고, 문화방송은 민영화를 한다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있잖아요? 제가 와이티엔 시청자위원장을 하면서 국민의힘 소속 의원들의 항의 방문을 받은 경험이 있습니다. 그때 ‘보도가 우리 (보수) 진영에 불리하다’는 것 말고 논리나 철학을 찾기 힘들더라고요. 대선 당시 와이티엔이 윤석열 후보가 아니라 이재명 후보가 유력하다는 예측 보도를 했다면서 정치 편향이 문제라는 겁니다. 그때 그쪽 논리나 실력이 부족하다는 걸 느꼈죠. 그런데 이제는 막무가내예요. (보도 내용을 구실 삼아) 지배구조까지 바꾸겠다고 나서잖아요.”

―1998년 <한국 언론민주화의 진단>이라는 책에서 당시 언론 환경을 정치개입 완화 등을 특징으로 하는 ‘포섭적 시장 자유주의’로 표현하셨어요. 지금은 어떤가요?

“권위주의적 시장 자유주의 상황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문화방송이나 와이티엔 민영화에는 방송을 시장에 맡기겠다고 하지만, 이는 시장 질서를 존중하는 발상이라고 보질 않습니다. 오히려 시장 안으로 들어온 언론은 자신들이 언제든 개입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읽혀요. 일종의 우회적인 장악 시도랄까요.”

―당시 언론민주화 지표와 견주면 퇴행으로 봐야 할까요?

“지난 40년여 볼 수 없었던 제왕적 언론관이 등장했다고 생각합니다. 윤 대통령의 태도를 보면 헌법 수호, 국익을 앞세우면서 자기가 한 말에 토를 달지 못하게 하잖아요. 과거와 다른 점이라면 (독재라는) 나쁜 시스템은 사라진 거죠. 그 자리에 ‘왕’만 남아 있는 겁니다. 바이든 관련 등 문화방송 보도를 ‘가짜뉴스’로 규정짓고 ‘악의적’이라는 판단을 내리는 과정을 보세요. 대통령이 보기에 고의가 있으니 명예훼손이라는 겁니다. 스스로 재판을 한 다음에 처벌까지 내려요. ‘타지 마’ 이렇게요. 그 속내를 보면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큰 문제입니다. (언론 말고) 다른 영역은 그렇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말씀대로라면 심각한 국면입니다만, 여론은 조용한 편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요. 불과 몇년 전 광화문 네거리에서 촛불을 들고, 정권을 향해, 미디어를 향해 ‘물러가라’거나 ‘힘내라’는 인파가 넘쳐난 상황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어요. 하지만 잘 들여다보면 대중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 걸로 보입니다. ‘매우 불쾌한 감정, 분위기’를 공유하고 있는 건 분명해 보이거든요. 그 ‘정동’(주관적 경험, 인지적 요소, 생리적 요소를 포함한 복합적 심리생리학적 상태)에 에너지가 가득 채워지고 있는 것 같아요. 이게 어디로 향할지 사실 아무도 모릅니다. 이런 방향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시절은 오래전에 지나갔어요.”

―정부는 ‘정동’의 민심을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태원(참사)을 보세요.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일상에서 국가의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구했다고 생각했는데, 윤석열 정부는 여전히 그걸 모르는 것 같아요. 참사 초기만 해도 사실관계를 명명백백하게 드러내기보다 감추기에 바빴죠. 세월호 참사 때도 첫 단추가 잘못 채워지면서 상처는 깊어지고 추모의 시간은 길어졌어요. (이태원 참사도) 어쩔 수 없는 운명 같아요. 모두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질서 유지 등) 역할을 정부가 내려놓은 상황에서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참사가 일어난 거잖아요. 도대체 왜 누구의 잘못으로 벌어졌는지, 그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지 (시민들이) 묻는 건 당연한 겁니다. 그런데 여권의 기본적인 입장은 일단 ‘참사를 참사라 말하지 말라’는 것 아닌가요.”

원용진 교수의 연구실 모습. 이정용 선임기자
원용진 교수의 연구실 모습. 이정용 선임기자

‘치유의 시간’ 무엇이든 말할 수 있어야

―문화방송, 와이티엔 문제와 이태원 참사가 같은 연장선상에 있는 셈이네요.

“말해야 하는 것들을 말하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요. 참사를 함께 겪어내면서 누군가는 말로, 누군가는 글로, 때로는 책임을 따져 묻고, 때로는 스스로의 책임을 돌아봐야 해요. 각자의 방식대로 기억하고 추모하면서 감정을 나누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 과정에서 더디고 어렵더라도 합의를 해내고 또 함께 치유하는 것이죠. 지금 여권처럼 그 과정을 통제하거나 독점하려 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몇몇 유가족이 참다못해 나섰죠. 이제 겨우 시작입니다. 언론도 (진상 규명 등) 해야 할 일이 분명히 있는 것이고요.”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사회적 트라우마가 꽤 오랜 기간 지속됐습니다. 극복에는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어쩔 수 없는 사회적 운명이죠. 덧붙이자면 이태원이라고 하는 축제의 공간을 참사라는 기억과 어떻게 연결해 일상 속으로 복원해나갈 것인가는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입니다. 그러니 누구든 무엇이든 말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 과정을 거치지 못하면 우리는 결국 이태원을 잃고, 위로도 위령도 하지 못한 채 무의식 속에 죄의식만 쌓게 될 겁니다. 답이 목적이 아니라 과정 그 자체가 목적이어야 합니다.”

―근본적인 고민도 필요해 보입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핼러윈이 왜 서울 광화문이나 부산, 광주 어딘가가 아니라 서울 이태원이었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 거기에만 발을 디딜 틈도 없이 모여들었을까요. 간단합니다. 경계 너머에서는 보수적인 공기 때문에 시도할 수 없었던 복장, 환호 등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이태원, 핼러윈이라는 시공간에서만 축제다운 축제가 가능했던 것이죠. 축제라고 모였는데 누군가의 불편한 시선이 느껴지면, 그 순간 재미가 없어지는 거죠. 그 흥을, 감정을 공유할 수 없는 거죠. 그때의 쏠림은 그렇게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실 그 의미를 외국인들도 잘 알아요. 그들이 보기에는 한국인들이 제일 신명 나게 노는 공간이 이태원이었다고 해요. 이번 이태원 참사와 이태원이 가진 해방구라는 성격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라는 질문도 가능하겠죠. 돌이켜보면 우리 학교(서강대) 어학당 아이들(외국인)도 안타깝게 둘이나 희생됐어요.”

잘 노는 ‘동네 형’으로 살겠다

그는 은퇴 뒤 아내 허락을 받아 고향 경남 진해로 갈 생각이다. “고향의 10대 친구들이랑 내가 그동안 누려왔던 걸 함께하고 싶어요. 살면서 잘 노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함께 얘기하고 싶고요.”

―앞으로 어떤 계획이 있으신가요?

“오랜 바람이죠. 겪고 나서야 깨닫는 일들이 너무 많아서…. ‘미리 알았더라면 삶이 통째로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늘 남아 있어요. 어렸을 적 동네에서 제가 잘 따르던 황철수라는 형이 어느 날 감옥에 갔어요. 이유는 간단해요. 진해에 콩을 가득 싣고 들어오는 외국 상선이 있었는데 거기에 세번 숨어든 거예요. 밀항하려고요. 외국에 나가고 싶어서…. 아마 누군가가 나서서 외국을 가는 방법을 알려줬더라면 철수 형이 범죄자가 되지는 않았겠죠. 그때 그와 나의 세계에서는 외국에 가는 방법은 밀항밖에 없었으니까. 대학에 들어가고, 뒤늦게 공부에 재미를 찾고, 미국에 가고, 존 피스크를 만나고, 문화연대 활동을 하고, 그때마다 조금이라도 일찍 알았더라면, 누군가 알려줬더라면 그런 아쉬움이 남더라고요. 그래서 그들에게 잘 노는 동네 형이 되기로 한 거죠.”

교수로선 올해가 마지막이지만, 문화연구자, 미디어연구자로서의 원용진은 여전한 현역이다. “12월에 있을 포털 주제 토론회에 국민의힘 쪽 초청을 받았어요. 국민의힘 초청이라니 좀 어색하긴 합니다만.(웃음) 지난해 낸 책 <메가플랫폼 네이버>(원용진·박서연 저)에서 네이버가 성장하면서 얼마나 많은 사회적 빚을 졌는지 주목한 게 눈길을 끌었나 봅니다. 그 빚이라는 건 규제 필요성과 맞닿게 되니까요. 실제 정보고속도로, 정보화 교육 등이 아니었으면 지금의 네이버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건 사실이니까요.”

뻔한 질문을 사양하는 그에게 재차 소회를 물었다. 무심한 듯 “잘 배우고, 잘 놀다 갑니다”라고 답한다. 그리고 그는 거듭 “그냥 동네 형으로 남았으면 좋겠는데”라고 했다.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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