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판중심주의를 강조하는 이용훈 대법원장
최근 이용훈 대법원장의 공판중심주의를 촉구하는 발언이 파문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대법원장의 말은 줄기만을 보자면 언즉시야(言則是也)이다. 그 말이 옳다는 것이다.
그러나 표현 방법에 있어서까지 옳다는 것은 아니다. 공판중심주의를 지지하고 찬성한다고 해서, ‘검찰 조서를 집어던져라’거나 ‘검찰과 변호사는 재판의 보조수단’ `변호사들이 만든 서류라는 것은 대개 사람 속여 먹으려고 말로 장난치는 것이 대부분' 등의 발언까지 박수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권위와 상식의 상징이어야 할 대법원장의 발언으로는 거칠다. 좋게 풀이해 판사들에게 공판중심주의의 필요성을 더욱 힘 있게 전하려는 생각에서 그런 표현을 사용했을 것으로 짐작하지만, 당사자인 검찰이나 변호사들이 좋은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공판중심주의를 강조하려는 ‘줄기’는 가려지고, 대법원장의 자질이나 검찰 및 변호사에 대한 모독이라는 ‘가지’가 부각되는 점은 안타깝다. 공판중심주의가 제대로 실시되면 위상이나 역할이 크게 낮아질 수밖에 없어 반발의 기회만 보고 있던 검찰과 변호사 단체로서는 ‘울고 싶은데 뺨을 얻어맞은’ 꼴이 됐다. ‘얼씨구 좋다’ 하면서 검찰과 변호사 단체가 즉각 반발을 하고 나선 것은 공판중심주의를 연기 또는 무력화하려는 속내의 발로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대법원장은 쓸데없는 표현으로 ‘기댈 곳 없는 소에게 비빌 언덕’을 만들어 줬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이 대법원장의 이번 발언은 노무현 정권의 핵심인사들의 태도를 많이 빼어 닮았다. 언론의 역할이나 전시작전통제권 등에 대한 노무현 대통령이나 주변 사람들의 발언은 시대의 흐름이나 방향에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표현이나 방식이 듣는 상대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거나 모멸감을 주는 경우가 많다. 한 언론인은 이를 두고 “노무현 정권 사람들은 ‘맞는 말을 싸가지 없게 한다’고 말했다. 매우 적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고 보면 말은 그 뜻이 옳다고 설득력이나 사람을 움직이는 힘을 지니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지향하는 뜻에 더해 표현이나 순서, 경중, 완급, 상하좌우가 제대로 갖춰져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아이가 식당에서 무례하게 군다고 그 아이의 부모가 듣는 앞에서 ‘가정교육이 제대로 안 된 놈’이라고 욕을 하면, 그 부모가 아들의 무례를 사과하는 것보다 ‘네가 뭔데 남의 집 가정교육을 왈가왈부하느냐’고 멱살을 잡는 것이 일반적인 일일 것이다. 바둑에서도 상대의 말을 잡으러 갈 때 정교한 수순이 중요하다. ‘말 한마디로 천냥빚을 갚는다’는 속담은, 표현 방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좋은 뜻도 쌍말로 하면 전체가 쌍뜻처럼 들리고, 모자란 말도 좋은 표현을 사용하면 그럴 듯하게 보인다. 하물며 좋은 뜻을 좋은 말로 하면 ‘고래도 춤추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대법원장이 공판중심주의의 의의를 검사나 변호사가 반박하기 어려운 표현을 사용해 말했다면 검사나 변호사 단체가 그렇게 떠들썩하게 들고 있어났겠는가. 여하튼 공판중심주의는 한국의 민주화 발전 정도나 인권의식의 성장, 시대의 흐름으로 보아 한국사회가 지향할 과제임이 분명하다. 그럼 언론으로서는 이를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할까? 나는 지금의 검찰 중심의 법조 취재 관행을 재판 중심의 취재로 확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본 특파원 때의 경험이지만, 일본에서는 원고의 일방적인 주장으로 흐르기 쉬운 검찰 기사보다 피고와 원고가 동등하게 겨루는 법원 기사가 훨씬 크게 자주 등장한다. 공판중심주의가 옳은 방향이니 하며 해설하거나 검찰과 변호사의 반발은 이에 대한 저항의 표현이니 하며 분석을 하는 것도 언론의 일이겠지만, 언론이 공판중심주의의 정착에 가장 실천적으로 실질적으로 공헌하는 길은 검사의 방을 떠나 재판정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공판중심주의를 위한 법과 제도를 만드는 것은 언론이 직접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검찰 기사를 줄이고 재판 기사를 늘이는 것은 언론이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놔두고 이러쿵저러쿵하며 입만 놀리는 것은 실천적 지식인이 할 일이 아니다. '비가 오지 않을 때는 하늘만 쳐다보고 있지 말고 우리가 먼저 삽을 들고 땅을 파자.'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 대법원장이 9월19일 대전지방법원을 방문해 '수사기록을 던져버러라'는 문제의 발언을 했다.
그러고 보면 말은 그 뜻이 옳다고 설득력이나 사람을 움직이는 힘을 지니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지향하는 뜻에 더해 표현이나 순서, 경중, 완급, 상하좌우가 제대로 갖춰져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아이가 식당에서 무례하게 군다고 그 아이의 부모가 듣는 앞에서 ‘가정교육이 제대로 안 된 놈’이라고 욕을 하면, 그 부모가 아들의 무례를 사과하는 것보다 ‘네가 뭔데 남의 집 가정교육을 왈가왈부하느냐’고 멱살을 잡는 것이 일반적인 일일 것이다. 바둑에서도 상대의 말을 잡으러 갈 때 정교한 수순이 중요하다. ‘말 한마디로 천냥빚을 갚는다’는 속담은, 표현 방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좋은 뜻도 쌍말로 하면 전체가 쌍뜻처럼 들리고, 모자란 말도 좋은 표현을 사용하면 그럴 듯하게 보인다. 하물며 좋은 뜻을 좋은 말로 하면 ‘고래도 춤추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대법원장이 공판중심주의의 의의를 검사나 변호사가 반박하기 어려운 표현을 사용해 말했다면 검사나 변호사 단체가 그렇게 떠들썩하게 들고 있어났겠는가. 여하튼 공판중심주의는 한국의 민주화 발전 정도나 인권의식의 성장, 시대의 흐름으로 보아 한국사회가 지향할 과제임이 분명하다. 그럼 언론으로서는 이를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할까? 나는 지금의 검찰 중심의 법조 취재 관행을 재판 중심의 취재로 확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본 특파원 때의 경험이지만, 일본에서는 원고의 일방적인 주장으로 흐르기 쉬운 검찰 기사보다 피고와 원고가 동등하게 겨루는 법원 기사가 훨씬 크게 자주 등장한다. 공판중심주의가 옳은 방향이니 하며 해설하거나 검찰과 변호사의 반발은 이에 대한 저항의 표현이니 하며 분석을 하는 것도 언론의 일이겠지만, 언론이 공판중심주의의 정착에 가장 실천적으로 실질적으로 공헌하는 길은 검사의 방을 떠나 재판정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공판중심주의를 위한 법과 제도를 만드는 것은 언론이 직접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검찰 기사를 줄이고 재판 기사를 늘이는 것은 언론이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놔두고 이러쿵저러쿵하며 입만 놀리는 것은 실천적 지식인이 할 일이 아니다. '비가 오지 않을 때는 하늘만 쳐다보고 있지 말고 우리가 먼저 삽을 들고 땅을 파자.'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겨레 필진네트워크 나의 글이 세상을 품는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