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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처벌받지 않은 소라넷의 후예가 ‘박사들’이 됐다”

등록 2020-03-28 09:05수정 2020-03-28 17:10

[토요판] 커버스토리
플랫폼 바꾸며 진화해온 ‘엔번방’

‘소라넷’부터 ‘에이브이스누프’
‘웹하드’ 거쳐 ‘엔번방’까지
조직적·산업화한 성폭력 이어져

처벌은 가볍고 돈 버는 구조
소비자가 유포자에서 제작자로

디지털 성범죄 특별법·양형 기준에
강력 처벌 요구하는 목소리 담아야
그래픽 박향미 기자 phm8302@hani.co.kr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소라넷’의 수익 구조를 본뜬 불법·유해 사이트는 끊임없이 생성되고 운영되고 있다. 여성과 아동·청소년에 대한 조직적이고 산업화한 성폭력을 이제는 멈춰야 한다.”

지난해 7월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소라넷 운영자의 2심 선고를 비판하며 이렇게 말했다. 운영자 송아무개(47)씨는 징역 4년형을 받았고, 14억1천만원의 추징 명령은 파기됐다. 1999년 시작된 소라넷은 2003년 회원제 커뮤니티 사이트로 바뀌어 2016년 폐쇄될 때까지 17년 동안 불법 촬영물 유포, 성폭행 모의 등 성폭력 범죄를 전시·조장하면서 수백억원의 부당이득을 취했다. 재판부는 “소라넷 운영에 따른 불법 수익금이라는 점이 명확히 인정·특정되지 않는다”고 했다.

추징금 0원, 처벌받은 범죄자는 단 1명. 공동운영자 3명은 아직도 잡히지 않았고, 100만명의 회원 대부분에게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디지털 기술에 기반을 둔 성착취는 플랫폼만 바꿔가며 계속 이어졌다. ‘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는 “처벌받지 않은 소라넷의 후예들이 ‘박사들’이 됐다. 청산되지 않은 과거가 현재를 만들었듯 2020년 현재와 제대로 단절하지 않으면 우리는 절망적인 미래를 맞이하게 될 것”(3월26일 기자회견)이라고 했다.

엔(n)번방 사건은 ‘예견된 참사’

디지털 성범죄의 심각성은 피해가 무한 유포되고 재생산된다는 데 있다. 이수정 경기대 교수(범죄심리학)는 “자기 집 방에 혼자 앉아서도 성범죄를 당할 수 있는 사회가 됐다”고 말했다. 성착취 사진·동영상 파일이 바이러스처럼 계속 증식되고 국경도 없이 퍼져 나간다. 처벌은 가볍고 돈이 되기 때문이다.

소라넷의 뒤를 이은 건 ‘에이브이스누프’(AVSNOOP)였다. 2013년 말 개설돼 무료로 운영되다 1년 만에 유료로 바뀌었다. 아동·청소년이 등장하는 영상물을 포함해 46만개의 불법 촬영물이 사이트에 게시됐고, 회원 수가 120만명에 달했다. 2017년 5월 검거된 운영자 안아무개(36)씨는 1년6개월형을 받았다. 1심 재판부는 “잘못을 인정하고 별다른 전과가 없으며 피고인이 직접 음란물을 게시한 것은 아닌 점, 사이트 검색 기능에 금지어를 설정하는 등 아동음란물이 올라오는 것을 막고자 나름 노력한 점 등을 고려했다”고 양형 이유를 설명했다. 또 “현금과 달리 물리적 실체가 없는 전자파일 형태”라는 이유로 그가 받아 챙긴 비트코인을 몰수 대상에서 제외했다. 검찰의 추가 수사 이후 2심에서 191비트코인(당시 25억원) 몰수 판결이 내려졌다.

2018년 8월 불거진 ‘양진호 웹하드 사건’으로 성착취물을 조직적으로 산업화하는 실태가 드러났다. 불법 촬영물을 올리는 헤비업로더, 이를 유통하는 웹하드 업체, 불법자료를 거르는 필터링 업체, 피해자에게 돈을 받고 삭제해주는 디지털 장의업체까지 한 회사가 운영하거나 담합하는 ‘웹하드 카르텔’이다. 양씨의 성범죄 혐의에 대한 기소는 지난해 7월30일에야 이뤄졌다. 검찰은 그가 웹하드 업체 2곳 등을 운영하며 성착취 영상물을 유통해 얻은 71억원에 대해 몰수보전 조처를 했다.

‘정준영 사건’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단체대화방을 통한 성범죄 사건이다. 정씨 등 유명 연예인들이 여성을 성폭행하고 단톡방에서 낄낄거리며 불법촬영 영상을 함께 본 사실이 밝혀졌다. 남성들이 모이는 커뮤니티에 ‘우리도 버닝썬처럼 영상 찍어 돌려 보자’는 게시물이 우후죽순 올라왔고, 보안이 뛰어난 메신저 텔레그램방으로 몰려갔다.

2019년 1월 텔레그램 ‘엔번방’을 매개하는 ‘고담방’을 만든 ‘와치맨’은 “소라넷의 계보를 잇겠다”고 공공연히 말했다. 그리고 에이브이스누프 이름을 딴 블로그를 만들어 고담방을 홍보했다. 엔번방 사건의 주요 피의자인 와치맨 전아무개(38)씨는 ‘박사’ 조주빈(24)씨가 검거돼 큰 파문이 일어나기 이전인 지난해 10월 이미 텔레그램방에 아동·청소년 성착취물을 유포한 혐의로 구속돼 있다. 앞서 2018년 6월 음란물 유포죄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풀려난 뒤 저지른 짓이다. 그에게 검찰은 지난 19일 징역 3년6개월형을 구형했고, 비판 여론이 쏟아지자 부랴부랴 전씨에 대한 보강 수사에 들어갔다.

‘웰컴투비디오’는 한국이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1등 국가’이자 ‘처벌에 관대한 나라’라는 걸 보여줬다. 지난해 10월 미국·영국 등 32개국이 이 사이트에 대한 국제공조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운영자는 손아무개(24)씨였고, 검거된 이용자 310명 중 한국인이 223명이었다. “성인 포르노는 올리지 말라”는 공지가 떠 있을 만큼 아동·청소년을 노린 다크웹 사이트로, 압수된 영상이 25만여개에 달했다. 당시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은 “다른 나라에서는 중형의 처벌이 이뤄졌는데 가장 많이 업로드되고 많이 본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썼다. 손씨는 청소년성보호법으로 최고 10년형이 가능한데 1심에서 “나이가 어리고 초범이어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가 2심에서 1년6개월형을 받아 다음달 출소를 앞두고 있다. 미국에서는 아동·청소년 성착취물을 제작하면 초범이라도 징역 15~30년형을 선고받을 수 있다. 영상물을 보려고 접근하거나 소지만 해도 최대 10년 이하의 징역형을 선고받을 수 있다.

엔번방 사건으로 끝내야 한다

특히 엔번방 사건을 계기로 성착취물을 소비하는 ‘회원’을 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성착취물을 돈 주고 보는 행위는 ‘야동 돌려 보는 것’ 정도가 아니라 성범죄다. 아동·청소년 성착취물은 소지 자체가 불법(1년 이하 징역 또는 2천만원 이하 벌금)이다. 특히 소비자가 유포자가 되고, 유포자가 제작자로 변하며 범죄가 재생산되고 있다. 서울경찰청은 지난달 20일 텔레그램 비밀대화방 ‘태평양원정대’를 운영하며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등을 유포한 혐의로 16살 ㄱ군을 구속 송치했다. ㄱ군은 박사방의 유료회원 출신이다. 지난해 10월 직접 운영진에 합류했고, 경찰 수사가 본격화하자 다른 보안 메신저로 옮겨 활동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와 정치권은 조주빈씨 검거 이후 분노하는 여론이 들끓자 앞다퉈 대책을 내놓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텔레그램 엔번방 재발 방지 3법’을 20대 국회 회기 안에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성적 촬영물을 이용해 협박하는 행위를 형법상 특수협박죄로 처벌하고, 불법 촬영물을 내려받는 행위 자체를 처벌하고, 불법 촬영물에 대해 즉각적인 조처를 하지 않은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를 처벌하는 등의 내용이다. 스트리밍 시청이나 온라인 그루밍 등에 대한 처벌 등 입법의 빈틈을 메우고, 여러 범죄로 흩어진 법을 모은 ‘디지털 성범죄 특별법’ 제정도 추진된다. 대법원 양형위원회도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양형 기준을 만들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엔번방’의 수익 구조를 본뜬 불법·유해 사이트는 끊임없이 생성되고 운영되고 있다. 여성과 아동·청소년에 대한 조직적이고 산업화한 성폭력을 이제는 멈춰야 한다.”

‘소라넷’을 ‘엔번방’으로 바꿔도 달라지지 않는다. 플랫폼은 변해도 범죄는 변하지 않았다. 이제는 멈춰야 한다.

이지은 기자 jieu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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