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사회일반

페미니즘은 여성을 피해자로만 생각하는 그 생각과 싸워왔다

등록 2020-05-09 15:28수정 2020-06-07 19:36

[토요판] 기획
페미니즘 어디로 가는가? ②피해자 페미니즘을 넘어

여성폭력, 사법정의 구현 안되고
피해자 비난문화 난무하는 사회
페미니스트들, 피해여성 대변해와
불가피했으나 피해경쟁도 가속화

‘잠재적’ 피해자의 정체성 정치
보호 논리가 페미니즘 언어되고
위험지대 여성의 삶 타자화 우려
상처받아도 계속되는 여성의 삶
‘피해자 페미니즘’ 다음 단계로 가야
“내 몸 쳐다볼 시간에 손부터 씻어!!!” 이런 문구를 쓴 여성들이 2017년 9월 서울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성폭력의 원인은 피해자의 옷차림이 아니라는 주제로 ‘슬럿라이드’ 시위를 열었다. 여성들은 “어떤 옷을 입든 문제는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에게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참가 이유를 밝혔다. 슬럿 라이드는 노출이 있는 옷을 입고 자유롭게 행진하는 슬럿워크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한국에선 2011년 ‘잡년행진’이라는 이름으로 슬럿워크가 열리기도 했다.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내 몸 쳐다볼 시간에 손부터 씻어!!!” 이런 문구를 쓴 여성들이 2017년 9월 서울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성폭력의 원인은 피해자의 옷차림이 아니라는 주제로 ‘슬럿라이드’ 시위를 열었다. 여성들은 “어떤 옷을 입든 문제는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에게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참가 이유를 밝혔다. 슬럿 라이드는 노출이 있는 옷을 입고 자유롭게 행진하는 슬럿워크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한국에선 2011년 ‘잡년행진’이라는 이름으로 슬럿워크가 열리기도 했다.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지난 5월1일치 <한겨레> 인터뷰에서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익명의 여성들이 모여 만든 ‘리셋’팀이 발간한 160쪽에 이르는 보고서를 읽고 “사법기관이 해야 할 일을 민간인들이 했다. 부끄러웠다”고 말했다. 사법기관의 무능과 방조가 디지털 성착취 문제를 키워오는 동안 여성들이 스스로를 구한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추 장관의 말대로 이것은 정부가 해야 할 일이었지 민간 영역에서 할 일이 아니었다.

그동안 여성에 대한 폭력 문제에 사법기관이 제대로 대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페미니스트들은 대책위원회를 만들어 피해자 여성을 지원하는 일을 해왔다. 이런 현실 속에서 페미니스트들은 점점 피해 여성을 대표하는 ‘역할’(이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페미니스트에게 주어진 ‘성역할’이었다)을 맡게 되었다. 지난 20여년간 페미니스트라면 대부분 성폭력 사건을 지원하거나 대책위원회 활동을 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페미니스트 조직이 여전히 필요한 이유로 언급되었지만 여성의 자유와 평등에 대한 해방적 전망을 만들어나가는 다각도의 활동은 조직 내 성폭력 관련 역할 정도로 축소되었다. 이는 각 대학의 총여학생회와 조직의 여성위원회 등이 사라지는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이것이 ‘피해자 페미니즘’을 지금 이 시점에서 새삼스럽게 고민하는 이유다.

페미니즘은 여성을 피해자로만 생각하는가

“페미니즘은 여성을 피해자로만 생각한다.” 이는 2019년 3월 한국리서치가 <시사인>의 의뢰로 실시한 20대 남자 대상의 설문조사에서 안티페미니즘 성향을 가늠하는 데 사용된 문장이다. 20대 남자 중 59.2%가 이 문항에 ‘매우 동의’했고, 20대 여자는 12.7%만이 같은 보기를 골랐다. ‘매우 동의’와 ‘약간 동의’를 모두 포함하면 세대별 차이는 있지만 절반에 가까운 남자와 여자 모두 페미니즘은 여성을 피해자로만 생각한다는 의견에 동의했다.

정말 페미니즘은 여성을 피해자로만 생각하는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페미니즘은 피해자 개인이 더 조심했어야 한다는 식의 피해자 비난(victim blaming)에 저항하면서 또한 그 피해자 여성들에게 그 피해가 얼마나 불가역적인 고통을 안겨주는지를 강조하며 두려움을 증폭시키는 방식(‘성폭력은 영혼을 살해한다’ 식의 수사)도 모두 경계한다. 피해 자체를 또다시 구경거리로 소비하는 타자화에도 단호하게 반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살펴보면 피해자를 존중하되 피해에만 매몰되지 않기라는 페미니즘의 두 가지 목표가 사람들에게 제대로 전달된 것 같지는 않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특히 피해자를 비난하는 문화를 바꾸기 위해 노력해왔다. 여성의 옷차림이나 귀가시간, 음주 여부, 에스엔에스(SNS) 사용 방식 등이 성폭력을 유발했다는 말이 아직도 공론장의 ‘의견’(?)으로 통용되는 현실에 맞서는 저항을 조직했다. 피해자가 입었던 옷(대부분 일상복이다)을 전시하고, 노출이 있는 옷을 입고 아무리 밤늦게 다녀도 그것이 성폭력을 당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는 내용의 시위를 조직하고(슬럿워크, 밤길되찾기 시위 등), 손팻말(“성폭력의 원인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에게 있다”)을 만들고, 에스엔에스 해시태그(“우리는 피해자가 궁금하지 않다”)를 제안하고 실시간 검색어로 올리기 위한 총공세를 펼친다.

피해에만 매몰되지 않으려는 노력도 이어졌다. 예컨대 여성에 대한 폭력 문제는 선정주의적 보도로 이어지거나 피해자에 대한 타자화에 기반하여 대중 감정에 호소하게 되기 쉽다. 페미니즘 내부에서도 특히 폭력 피해에 대한 집중적 조명이 자칫 대중들을 선동하는 포퓰리즘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의제라고 생각하여 이를 경계해왔다.

그 결과 가정폭력 피해 여성이 구타당하고 살해당한 사진을 직접 전시하거나 성폭력 피해 상황을 대중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자세하게 묘사하는 일이 점차 줄어들었다. 최근 텔레그램 엔(n)번방 사건과 관련해서도 한 신문의 기획보도가 피해 상황을 지나치게 자세하게 묘사하고 중계한다는 비판이 있었다. 피해 사실이 적시되어 있는 공소장의 내용을 그대로 보도하여 피해자를 특정하게 만드는 보도 역시 문제로 지적되었다. 피해와 가해 구도로만 설명되지 않는 관계를 함부로 피해와 가해의 이분법으로 규정하지 않으려고도 애써왔다. 페미니스트들은 데이트 폭력을 비롯하여 친밀한 관계에서도 당연히 강간이 성립할 수 있다고 보지만, 모든 것을 피해로 수렴하기보다는 관계의 상호작용 내에서 자신에게 궁극적으로 해가 되는 욕망에 대해 함께 고민해보고 스스로 가진 내면의 힘을 길어내는 과정을 중시해왔고, 이는 여성주의 상담과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이라는 분야로 발전되었다.

하지만 이런 실천들은 앞서 언급한 기본적인 사법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현실과 만나게 되면 우선순위에서 밀리거나 대중의 분노와는 동떨어진 소수의견으로 취급되기 십상이었다.

피해를 증명하고 경쟁하는 문화

페미니스트들이 피해자 비난에 맞서 싸운 덕분에 피해자에 대한 비난은 일정 정도 그 영향력이 줄어들었지만 누가 진정한 피해자인가를 둘러싸고 피해를 증명하고 경쟁하는 문화는 가속화되고 있다. 사법정의가 극도로 협소하게 실현되고 사회정의 전반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사회에서는 자격 있는 피해자가 누구인가를 두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진다. 이때 피해는 그 자체로 해결되어야 할 사회문제가 아니라 피해를 통해 증명되는 사회적 위치를 확보할 수 있는 조건이자 자원이 된다. 이렇게 되면 여성과 남성은 서로가 자신이 입고 있는 피해 사실을 경쟁적으로 전달하는 데 힘을 집중하게 된다. 앞서 언급한 설문조사를 기획한 <20대 남자>의 저자들에 따르면 20대 남자들 넷 가운데 한 명은 남자라는 이유로 차별받으며 남자야말로 진짜 약자라고 주장한다.

무슨 소리인가. 성폭력의 가해자는 압도적으로 남성들이 많고 피해자 대부분은 여성이다. 법무부가 발행한 ‘2020 성범죄 백서’에 따르면 등록된 성범죄자 중 99.1%가 남성이다. 대검찰청의 ‘범죄분석통계’에 따르면 전체 성폭력 범죄자 중 여성 피해자는 96.3%이다. 노동시장의 성차별은 단순히 임원 직급에 여성이 진출하지 못하고 있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위기마다 구조적으로 여성을 더 취약한 상태에 밀어넣는 성별 구조조정을 통해 강화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근거를 들면 곧바로 남자의 피해 사례가 반증으로 이어진다. 일례로 산업재해 사망자의 경우 2018년 기준 남성이 전체 산업재해 사망자의 94.7%이고 이는 대부분 건설업과 운수업 등에서 발생하는 사고라는 점이 남성이 더 힘들다는 증거로 제출되는 식이다.

여성과 남성은 성별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피해를 입는 조건에 노출된다. 남성의 피해는 여성의 피해에 대한 ‘반증’이 아니라 젠더화된 사회에서 각각의 성별은 계급과 연령 등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경험한다는 증거다. 예컨대 건설업과 운수업 등 남초 직업군에서 산업재해 사망자가 집중적으로 발생하는데도 보호장비를 추가하고 안전기준을 높이는 등의 변화가 발 빠르게 따라오지 못하는 이유는 이러한 안전조치들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남자답지 못하다는 인식에서 기인한다는 분석도 있다. 여성 대상 범죄의 가해자가 주로 개별 남성이라면 달리 산업재해의 가해자는 개인이라 아니라 구조로서 존재한다. 이 말은 여성에게 남성은 그 자체로 구조적 장벽이라는 의미이다. 이처럼 젠더는 남자와 여자의 피해 모두를 더 잘 설명해주는 분석도구가 될 수 있지만, 피해의 경쟁장에서는 그저 공방의 하나로 소모되고 만다.

피해자 페미니즘을 넘어

아이러니한 것은 피해자 정체성의 정치를 가장 열성적으로 하는 것은 실제 피해자가 아니라 ‘잠재적’ 피해자들이라는 점이다. 일부 남자들이 “그렇다면 나도 피해자”라며 피해 위치를 전유한다면, 일부 여자들은 잠재적 피해 가능성을 제거하자며 위험으로부터 안전할 권리를 주장한다. 남자들 모두를 잠재적 가해자로 간주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필요하지도 않다. 그렇게 하면 직접 행동을 한 가해자, 그들의 행동을 응원하고 격려했던 또 다른 가해자, 한때의 호기심이라며 선처해준 가해 공모자 등 가해자 블록을 남성 일반 뒤에 숨겨줄 뿐이다. 남자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가해자일 수 있다는 말은 남성 일반을 공격하는 말이 아니라 남자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변명으로 훨씬 더 자주 사용된다. 마찬가지로 여성들을 모두 잠재적 피해자라고 생각하면 잠재적으로 위험이 될 수 있는 (주로 외부적이고 이질적인) 것으로부터 보호하자는 논리가 페미니즘의 언어처럼 사용되고 여성들 스스로 서로를 단속하면서 피해자가 되지 않는 것을 독려하고, 위험한 여성들과 자격을 갖추지 않은 여성들을 비난하는 문화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위험으로부터 안전할 권리를 주장하는 ‘잠재적’ 피해자주의는, 위험지대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혹은 위험을 때로는 기꺼이 감수함으로써 규범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에 저항하고자 하는 여성들의 삶을 타자화하거나 비가시화시킨다. 이는 페미니스트라면 그 누구도 원하지 않는 흐름일 것이다.

다시 강조하자면 페미니즘은 여성을 피해자로만 생각하는 바로 그 생각과 싸워왔다. 페미니즘은 피해자를 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존중하자고 하지 피해자의 말이 무조건 옳다고 하지는 않는다. “당신 잘못이 아니다”라는 말은 피해자를 부당하게 비난하는 말을 막아내기 위해서 필요했지, 여성이 어떤 것도 진정으로 선택할 수 없다거나 모순과 혼란을 경험하며 스스로의 삶을 만들어가는 과정 중의 주체라는 것을 부인하려는 말은 아니다. 피해자를 존중한다는 것은 피해자를 진공상태에서 보호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 피해를 경험하고 때로는 그 경험에 대한 해석을 변화시키면서 성장해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어떤 경험은 피해일 수도 있고 피해가 아닐 수도 있는 회색지대에 존재한다. 그 경험들을 모두 피해와 가해의 이분법으로 분류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며,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다.

아무에게도 상처받지 않고,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는 무해한 존재로 사는 것을 목표로 삼게 되면 세상은 온통 위험한 것으로만 가득 차 있다는 두려움만 계속해서 증폭된다. 공포로 가득한 세계에서 모든 잠재성을 피해 혹은 가해로 치환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상처받아도 그것으로 인생이 끝나지 않고, 약하고 부족하고 좀 이상하고 불편해도 그것이 바로 인간으로서의 여성이 사는 여러 모습 중 하나라는 것을 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는 것, 이것이 ‘피해자 페미니즘’을 넘어서는 다음 단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권김현영 여성학 연구자

▶ 한국의 페미니즘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강남역 사건 이후 등장한 새로운 페미니즘 흐름 앞에 던져진 질문이다. 페미니즘들 사이의 입장 차이는 점점 분명해지고 있지만 비판적 논의는 사실상 침묵 속에 있었다. 페미니스트 연구자 김은실, 권김현영, 김영옥, 손희정, 이현재가 연속 기고로 답한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생존 해병 “임성근, 가슴장화 신고 물에 들어가라 지시했다” 1.

생존 해병 “임성근, 가슴장화 신고 물에 들어가라 지시했다”

‘자두밭 청년’ 향년 29…귀농 7년은 왜 죽음으로 끝났나 2.

‘자두밭 청년’ 향년 29…귀농 7년은 왜 죽음으로 끝났나

“열 사람 살리고 죽는다”던 아버지, 74년 만에 백골로 돌아왔다 3.

“열 사람 살리고 죽는다”던 아버지, 74년 만에 백골로 돌아왔다

해병 녹취엔 “사단장께 건의했는데”…임성근 수색중단 묵살 정황 4.

해병 녹취엔 “사단장께 건의했는데”…임성근 수색중단 묵살 정황

채상병 기록 이첩 직후, 대통령실 ‘등장’…국수본·해병·국방부에 전화 5.

채상병 기록 이첩 직후, 대통령실 ‘등장’…국수본·해병·국방부에 전화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