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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여대는 ‘생물학적 여성’이 안전한 곳인가

등록 2020-05-16 17:36수정 2020-06-07 19:36

[토요판] 기획
페미니즘 어디로 가는가? ③ 성평등 시대, 여대와 페미니즘

트랜스젠더 배제 입장이 힘 얻으며
여성 ‘안전 문제’가 위험뿐 아니라
위협과도 쌍 이루는 문제 되었다

스스로 래디컬이라 부르는 페미니즘
급진주의·자유주의·부족주의 뒤섞여
불화 원인 외부서 찾아야 공존 가능

‘피해자 정체성’ 역량 강화 토대라면
페미니즘 운동 역사 퇴보시키는 것
여대 존립 이유는 대항적 공공성
지난 2월6일 서울 숙명여자대학교에 트랜스젠더 입학을 환영하는 대자보와 반대하는 대자보가 나란히 붙었다. 이런 논란 끝에 결국 숙대에 합격한 트랜스젠더 여성은 입학을 포기했다. 연합뉴스
지난 2월6일 서울 숙명여자대학교에 트랜스젠더 입학을 환영하는 대자보와 반대하는 대자보가 나란히 붙었다. 이런 논란 끝에 결국 숙대에 합격한 트랜스젠더 여성은 입학을 포기했다. 연합뉴스

2016년 5월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로 한국 사회 여성들은 ‘안전’에 매우 민감해졌다. 여성혐오가 만연한 한국 가부장 사회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의 위험이 얼마나 극단적으로 구체적일 수 있는가를 깨달았고, 그만큼 잠재적 피해자 의식도 깊어졌다. 대응방식 또한 뚜렷하게 달라졌다. ‘불편한 용기’가 이끈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 시위(2018년), 임신중단 합법화를 외친 비웨이브 시위(2016~2019년) 등 이어지는 시위들에서 다양한 성폭력 고발의 목소리와 함께 트랜스젠더 ‘여성’의 ‘여성 아님’이 반복적으로 주장되면서 트랜스젠더 배제가 맥락적으로든 논리적으로든 깊이 있게 사유되거나 토론되지 않은 채 점차 하나의 ‘입장’으로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 2020년 2월7일 숙명여대 법과대학에 합격했던 트랜스젠더 ‘여성’이 결국 입학을 포기하게 되었을 때, 그의 입학을 반대한 ‘숙명여대 학내 모임 트랜스젠더 ‘남성’ 입학 반대 티에프(TF)팀’이 “여성으로 태어나 페미사이드에서 살아남은 우리의 존재는 지워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라며 ‘환영사’를 발표했을 때, ‘생물학적 여성(중심)주의’는 혐오의 논란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되었다.

이제 그들이 추구한 여성의 ‘안전 문제’는 위험과 쌍을 이룰 뿐 아니라 위협과 쌍을 이루는 정치와 인권의 문제가 되었다. 위험에서 나-우리를 지켜내는 적극적 행동이 누군가의 존재와 교육권뿐 아니라 안전권마저도 위협한다. ‘무서워서’ 입학을 포기한 그의 안전과, ‘살해의 위험’ 때문에 그를 밀어낸 이들의 안전은 도무지 풀리지 않는 부조리의 한 쌍으로 우리 앞에 던져졌다. 왜 그의 안전과 ‘우리’의 안전은 함께 지켜질 수 없는가.

여대: 생물학적 여성이 안전한 공간?

내가 강의하고 있는 숙명여대 학생들에게 그들이 경험한 ‘여대’에 대해 물어보았다. 열명 정도였던 그들 모두는 무엇보다,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 정체성이 기본값이 된다는 것, 그래서 마음껏 ‘나댈 수’ 있으며, ‘너 페미 그런 거 해?’라는 질문에 떨 필요 없이 학내와 사회 문제들에 대해 ‘불편’을 말할 수 있는 자유를 언급했다. 둘째로 그들은 ‘동료 여성’의 존재를 언급했다. 여성인 자신들의 목소리가 청취되고 이해되고, 적절한 반응을 누릴 수 있는 곳이 여대라고 했다. 다음으로 그들은 동아리방이나 과방에서 성추행당할 염려 없이 잠잘 수 있다거나, 추리닝을 입고 돌아다닐 수 있는 등의 신체적 자유를 말했다. 이들이 말한 여대의 안전성은 물리적 안전과 상징적 안전, 두 가지 측면을 지닌다.

특히 학생들이 주목한 것은 말하는 주체로서의 ‘여성’이었다. 대리되지 않겠다는, 스스로 결정하고 나서고 말하겠다는 주체의지의 강조였다. 남성을 여성의 보호자로 간주하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들은 연단에 서기 위해, 대출을 받기 위해, 낯선 곳으로 여행을 하기 위해, 중요한 프로젝트의 책임자나 결정권자가 되기 위해 용기를 내서 모욕과 위험에 맞서곤 해야 했다. 형식상 평등이 보장되었다지만 공학에서는 여전히 남학생을 학생집단의 대표로 여기는 관습이 강하게 남아 있다. 여대를 다니는 여성들은 이 사실을 정확히 의식하고 있었다. 말하는 주체로서의 여성이고자 하는 여성이 발현하는 주체성은 ‘여성’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여성들은 내가 되어야 한다고 사회문화 규범이 지시하는 그 ‘여성’과, 여성인 내가 살면서 느끼고 경험하는 것들 사이의 불편한 간극을 거의 매 순간 느끼며 산다. 학생들과의 대화에서 이 간극에 대한 자각은 분명했다. 그런데 투쟁의 국면에서 외부를 향해 발언할 때는 왜 ‘생물학적인 여성’이 주장되는 것일까.

여대는 ‘여자라서’ 고등교육이 필요 없고, 공동체 만들기에 기여할 수 없다는 가부장제에 이의제기 하면서, ‘여자라서’를 성찰하고, 그 성찰을 토대로 세상의 모든 ‘~라서’를 재해석하며 세상을 바꿔왔다. ‘여자는 여자로 태어났으니까 여자다’라는 환원주의적 동어반복은 여대의 교육이념과 너무나 동떨어져 보인다. ‘여자로 태어났으니까 여자인’ 이 ‘여자’가 생물학적인 여자라는 주장도 더 고민해봐야 한다. 페미니스트 과학철학자인 도나 해러웨이나 샌드라 하딩은 생물학 또한 특정 사회문화적 맥락 안에 상황적으로 위치된 지식체계라는 것을 누누이 강조했다. 자연·물질세계 그 자체인 것처럼 보이는 생물학은 이미 특정 필요와 관점에 의해 관찰되고 해석된 자연, 즉 상징-언어적으로 물질화된 담론이다. 생물학적인 여자라는 말도 ‘여성/성’이 특정 권력구조에 의해 구성된 것임을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기호학적 대당으로 이해해야 한다.

여대에서 여성은 다른 여성을 동료로 만나 일종의 언어 공동체를 이룬다. 사회에서 늘 변방의 방언을 사용하면서 느꼈던 소외를 딛고 이곳에서 여성들은 ‘서로 속함’이 선사하는 존중과 가치를 확인한다. ‘여대’에서 여성들이 안전을 누릴 수 있다면 그 안전은 무엇보다 ‘나는 나를 정의할 권리가 있다’는 권리선언에서 출발한다. 여대가 진화해온 역사는 이것을 구체적으로 명료하게 제시한다. 여대에서 여성들은 가부장제 사회의 고질적인 성별신분제에 저항하며 ‘자기 정의’에 입각한 정체성을 구축해왔다.

이제 여성은 대학에서나 일터에서,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평등’을 보장받게 되었다. 여성들이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빗장이 여기저기서 열리고 있다. 이렇게 여성들의 ‘바깥활동’이 다양해지자 여성들은 보편주의 정신에 어긋나는 편파·분파적이고 본질적인 정체성의 정치를 펼치는 것으로 비난받으며 험한 백래시에 휘말린다. 이 비난이 비대면 인터넷 공간에서 일어날 때 양상은 한결 더 극단으로 치닫는다. 가학성 조리돌림과 험한 용어들이 빠른 속도로 증식되는 가운데 매우 실재적인 위협과 공포의 정동이 확산된다. 강남역 살인사건은 사이버 공간에서의 위협이 오프라인 공간에서 구현된 것으로 경험되었고, 이후 목소리를 포함한 신체는 내 편인가 적인가를 구분하는 핵심 잣대가 되기 시작했다. 지금 여대에서 구성원들이 ‘안전’을 내세우며 ‘다른 누군가’의 ‘진입’을 ‘침입’으로 진단하고 원천봉쇄를 시도하는 것은 동시대 페미니즘이 인터넷 일상화 시대에 정체성의 정치학으로서 맞닥뜨린 이러한 곤란함을 반영한다. 그리고 이것은 신자유주의 시대 불확실해진 삶과 연관된다.

남성의 로망, 여성주의 의도 공존해온 공간

가부장제 문화 이데올로기가 심한 한국에서 여대는 ‘이성애 남성들의 로망’이라는 가부장적 이미지, 그리고 여성 지도자 양성 공간이라는 여성주의적 의도가 공존하는 곳이(었)다(나임윤경). 2017년 이후 지구적인 미투 물결은 여성들의 입장에 유의미한 변화를 가져왔다. 현재 한국에서 영(영)페미니스트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행동강령인 탈코르셋과 4비(비혼, 비출산, 비연애, 비섹스), 그리고 여성이 안전한 공간으로서 여대 인식 등은 상호 간에, 그리고 다른 소수자운동과의 관계에서 봉합되지 않는 모순들을 보인다. 글로벌하게 관찰되는 주류 페미니즘과 신자유주의적 질서의 공모가 일정 부분 이 모순들의 맥락을 형성한다.

예를 들어 ‘여성의 공간 사수’를 강조하며 트랜스젠더 여성의 입학을 저지한 숙대 래디컬 페미니스트 여성들은, 5·18 망언과 세월호 유가족 폄훼 발언을 한 김순례 의원에게 동문으로서 면죄부를 주자고 주장한 바 있다. 그들은 여성의 정계 진출이 여전히 어려운데 좀 감싸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왜 여성에게만 유독 가혹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가부장제 관습을 후배 여성들이 따라해야 하느냐고 반문했다. 두 경우 모두 ‘여대’의 정체성과 존재 이유를 현재 시점에서 깊게 포괄적으로 묻게 만드는 사건이다.

이 페미니즘은 스스로 래디컬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거기에는 (엄격한 탈코르셋과 4비를 주장하는) 급진주의와 (정계와 재계 등의 ‘자리’라는 파이를 나누려는) 자유주의, (여성의 ‘권익’을 위해 설립된 여대에 ‘페미사이드 공포도 겪지 않은’ 트랜스젠더가 진입하겠다는 것은 가당치 않다는 공정성을 내세우는) 신자유주의 부족주의 등이 공존한다. 이 입장의 차이들은 불화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을 때 불화 없이 공존할 수 있다. 계속 불화하지 않기 위해 이 페미니즘은 ‘진짜 여성’, 진짜 피해자를 검증하기 위한 염색체 검사를 하자고 제안한다. 강남역 살인사건의 경험이 일종의 원형적 트라우마로 계속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듯이 생물학을, 그것도 염색체를 존재 증명의 토대로 삼겠다는 것은 페미니즘이 아니라 과학사의 관점에서도 지지받기 어려운 제안이다. 염색체가 근간이라면, 외모를 전적으로 바꿔주는 호르몬은 무엇인가? 신경과학자들은 염색체가 아니라 뇌세포와 호르몬이 ‘당신은 누구인가’를 밝혀준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뇌세포들은 마음–몸 동작의 반복적 훈련을 통해 지속적으로 새로운 지도를 그린다. 인간은 하나의 내용, 하나의 형태로 불변하는 무엇이 아니다.

‘안전하지 못하다’는 여성의 느낌은 단지 신체적 위협을 가리키지 않는다. 온·오프라인에서의 성적 부자유와 불안정한 시민적 지위, 경제적 불확실성 등이 신체의 온전함에 대한 권리를 약화시키고 두려움을 강화한다. 막아낼 수 있는 단 하나의 원인이 아닌 여러 요인들의 교차가 만들어내는 불안전성인 것이다. 이런 교차적인 어려움 속에서 ‘여대, 안전한 공간’이라는 화두가 떠오른 것이다.

그런데 지금 여성‘들’이 역량 강화와 연대를 기획하는 토대가 ‘피해자 정체성’이라면, 이것은 그동안 여대들이, 페미니스트들이 진화시킨 여성의 시민권과 인권의 역사를 퇴보시키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아내나 어머니, 누이 등) 남성과의 관계 속에서 기본 정체성을 갖는 여성들은 투쟁의 집단주체가 될 수 없다는 편견을 깨고, 여성들은 사적이고 개별적인 것처럼 보이는 ‘피해자의 자리’를 집단적 분노와 사회정의를 향한 투쟁 연대의 장으로 만들어왔다. 일상이나 일터, ‘놀이터’ 등 어떤 영역에서 어떤 피해를 입은 것이든, 피해자가 생존자와 활동가의 공공적 자리로 이동해온 과정은 페미니즘 역사의 축적된 역량이고 자부심이다. 어떤 새로운 형태의, 혹은 강도 높은 젠더 폭력이 발생한다 해도 이 힘과 자부심은 무너지지 않는 귀중하고 단단한 자원이어야 한다.

여대는 급진적 공간이 될 수 있는가

여성이 ‘생식기를 중심에 두는 단순 해부학의 몸’이 아니듯이, 여자대학은 영토가 아니다. 깃발을 꽂거나 문을 잠금으로써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여자대학은 주류 사회 전반에 대한 급진적·대항적 문화정치 투쟁의 장으로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고등교육에의 접근 기회가 성평등해진 지 이미 오래된 상황인데도 현재 여대가 존립해야 할 이유는 바로 이 대항적 공공성에 있다. 이제까지 여대는 선도적인 비전으로 가부장제 주류·비주류 남성 동맹들의 기만적인 주의주장에 맞서 지식체계나 사회정의의 감각을 재편해왔다. 앞으로도 여대는 페미니즘 가치의 훈련장으로서, 개방적 다원주의의 공간으로서, 여타의 편협하고 폭력적인 배제나 억압과 맞서는 곳으로서 자기 변신을 거듭할 것이다. 누구의 안전이 누구의 위험을 대가로 보장되는지, 주어진 안전 뒤에는 어떤 타율적 보호주의가 거래되고 있는지, 그야말로 급진적으로 안전이 사유되는 이곳에서 페미니즘의 갱신이 지속될 것을 믿는다.

김영옥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공동대표

▶ 한국의 페미니즘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강남역 사건 이후 등장한 새로운 페미니즘 흐름 앞에 던져진 질문이다. 페미니즘들 사이의 입장 차이는 점점 분명해지고 있지만 비판적 논의는 사실상 침묵 속에 있었다. 페미니스트 연구자 김은실, 권김현영, 김영옥, 손희정, 이현재가 연속 기고로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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