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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경계를 넘어서는 모험을 함께 해볼까요?

등록 2020-05-23 08:55수정 2020-06-07 19:37

[토요판] 기획
페미니즘 어디로 가는가? ④멀티트랙 운동
“아무도 죽이지 않는” 예술 꿈꾸는
페미니스트 래퍼 슬릭의 가사처럼
“아무도 죽이지 않는” 운동 가능할까?

정상성 전복하는 젠더 전유해온
“페미니즘이 트랜스젠더 안고 가느냐”
역사 보면 제대로 된 질문 아니야
나의 문제 사소화하지 않으면서도
너의 문제 함께 고민하는 연대체로
멀티트랙의 페미니즘 운동 가능해
5월14일 첫 방영 된 엠넷 <굿걸: 누가 방송국을 털었나>에서 래퍼 슬릭이 성소수자 인권을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 사이에서 공연했다.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소개한 슬릭은 ‘여성과 젠더퀴어, 그리고 성별 이분법을 벗어난 모든 가능성들을 위한 빵과 장미’를 노래했다. 엠넷 제공
5월14일 첫 방영 된 엠넷 <굿걸: 누가 방송국을 털었나>에서 래퍼 슬릭이 성소수자 인권을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 사이에서 공연했다.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소개한 슬릭은 ‘여성과 젠더퀴어, 그리고 성별 이분법을 벗어난 모든 가능성들을 위한 빵과 장미’를 노래했다. 엠넷 제공

지난 5월14일 엠넷(Mnet) 프로그램 <굿걸: 누가 방송국을 털었나>에서는 아주 인상적인 무대가 펼쳐졌다. 하얀 옷을 입고 맨발로 무대에 오른 아티스트가 ‘여성과 젠더퀴어, 그리고 성별 이분법을 벗어난 모든 가능성들을 위한 빵과 장미’를 노래했다.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소개한 래퍼 슬릭이었다. 그의 양옆에선 성소수자의 인권을 상징하는 무지개 프라이드 플래그가 휘날리고 있었다. 역동적이었고, 아름다웠다.

페미니스트의 프라이드 플래그

슬릭은 계속 이어갔다. “고민하지, 어떤 게 예술가의 삶, 누구 위에 있기 위해선 존재하지 않아, 고민하지, 아무도 죽이지 않는 노랫말, 그 앞에선 어떤 게임도 시작 버튼 눌리지 않아.”

그는 이 가사를 통해 지금까지 남성 래퍼들이 자신들의 ‘위태로운 삶’을 전시하기 위해 그 위기를 초래한 구조를 문제 삼기보다는 공격하기 쉬운 대상으로 여성과 소수자를 (가사로) 짓밟아온 문화를 비판한다. 슬릭의 무대 위에서 마초적인 힙합 문화는 완전히 낡은 것이 되어버렸다. 그가 구습을 비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또 다른 미래를 열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광범위한 젠더 스펙트럼 위에 존재하는 수많은 다양성 간의 연대, 그리하여 쟁취할 ‘우리’를 위한 빵(생존권)과 장미(정치)가 있는 미래다. 이야말로 나의 억울함을 호소하여 오직 나만이 무대 위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부당하게 다른 희생양을 세우지 않는, “아무도 죽이지 않는” 예술이었다.

슬릭의 무대를 보며 생각했다. “아무도 죽이지 않는” 운동은 가능할까? 슬릭의 랩처럽 뜨거운 용기를 필요로 하지만 동시에 담대할 수 있는 운동을 우리도 꿈꿀 수 있을까. 특정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등장한 트랜스 배제적 목소리를 생각하면, 이런 급진적이면서도 대중적인 운동의 기획은 생각처럼 쉽지 않은 것 같다. 소라넷, 강남역 여성살인사건(을 비롯한 수많은 폭행·살인 사건들), 게임계 사상검증, 채용 차별, 현실정치에서의 여성 과소대표 등 산적한 문제를 앞에 두고 페미니스트들은 때로 절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렇게 조급해지면 이미 나 있는 익숙하고 빠른 길을 택하게 된다. 최근 한국 사회를 충격으로 몰아넣은 텔레그램 엔(n)번방 사건의 경우에서도 “나는 이제까지 연대를 말하는 페미니스트였지만, 이제부터 여자만 챙기겠다”고 말하는 여성들이 등장했다. 여기서 ‘여자’란 물론 트랜스 배제적인 범주다.

“트랜스젠더는 버리고 간다”라는 선언과 함께 만들어지는 ‘여성 정체성’은 일견 선명한 듯 보이고, 여성들 앞에 놓인 복잡한 상황이 조금이라도 간단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도 모른다. 문제는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생물학적 본질주의와 배타적인 여성 범주에 기대어 누군가를 배척하는 운동은 여성을 차별과 위험에서 해방시켜 평등하고 안전한 세계로 인도하지 않는다. 그건 여성을 성기로만 축소해온 가부장제의 낡은 세계관을 답습함으로써 여성을 피해자의 자리에 고착시키고 다시 또 가부장제의 테두리 안에 가두는 결과를 초래하기 쉽다. 견고한 여성 정체성을 구성하여 “여성을 세력화하려는 정체성의 정치학과 가부장제가 규정한 여성 정체성 간의 거리가 유지되고 있는지”(조주현) 세심하게 살펴봐야 하는 이유다.

그보다는 사회가 단단하게 쳐놓은 정상성의 경계를 질문하고, ‘젠더’를 더욱 전복적인 페미니스트 이론과 실천의 방법론으로 전유하는 것이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가능하게 한다. 무슨 말일까?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트랜스젠더 담론과의 상호작용 안에서 확장해온 페미니즘의 역사를 함께 복기해보자.

페미니즘과 트랜스젠더 담론의 오랜 공생

지난 두 세기에 걸쳐 페미니스트들은 신의 자리에 올라선 과학이 만들어낸 환상, 그러니까 섹스는 생물학적으로 확정되어 있다는 환상과 싸워왔다. 18세기에 이미 “남성도 여성처럼 교육을 받으면 여성화될 것”이라고 말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에서, 1940년대에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길러지는 것”이라고 선언한 시몬 드 보부아르를 지나, 1970년대 초 아직 ‘젠더’라는 표현이 정착되지 않았을 때 “성계급”(sex class)이라는 개념을 썼던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페미니스트들이 해명하려고 했던 건 성역할이란 남녀의 자연적 차이가 아니라 사회적·문화적으로 구성된 차이라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페미니스트들의 고심과 분투는 1970년대에 이르러 ‘젠더’라는 말과 만나게 된다. 가히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할 만한 ‘젠더’라는 개념의 발견. 이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젠더는 1960년대 말까지 대체로 문법에서 여성·남성·중성을 일컫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이것이 소위 ‘생물학적 성’으로 이해되는 섹스와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사회적으로 구성된 성’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한 중요한 계기를 제공한 것은 1968년 성심리학자 로버트 스톨러의 <섹스와 젠더>(Sex and Gender)라는 책이었다. 그가 의학적으로 지정된 성별과 다른 성별 정체감을 가진 내담자들을 상담하고 이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젠더’라는 말의 의미가 정립되어간다. 그리고 페미니스트 이론가와 활동가들이 이를 적극적으로 차용했다. 페미니즘과 트랜스젠더 담론의 접점에서 ‘젠더’란 말이 지금과 같은 용법으로 구성된 셈이다.

한편, 근대 성담론의 형성과 함께 ‘특이한 존재’로 식별되고 주목받기 시작한 트랜스젠더를 일컫는 용어 역시 계속 변화해왔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애초에 근대 성과학이 트랜스젠더를 논하기 시작할 때, 그들을 일컫는 첫 용어는 독일의 성과학자 마그누스 히르슈펠트가 고안한 ‘트랜스베스타이트’(transvestite, 지금 번역으로는 복장도착자)였다. 동성애자, 크로스드레서, (20세기 초 당시 의학적 소견으로 표현할 때) ‘성전환증 환자’가 잘 구분되지 않았던 시절, 트랜스젠더는 일종의 ‘복장도착자’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이후 히르슈펠트는 이 용어를 ‘트랜스섹슈얼’(transsexual)로 수정한다. 이는 남성 신체에서 여성 신체로(mtf), 혹은 여성 신체에서 남성 신체로(ftm), 그야말로 ‘트랜스섹스’하는 존재를 일컫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후 하나의 섹스에서 다른 섹스로 이행했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트랜스섹슈얼’이라는 단어가 성별이원제 자체를 위반하고 그 경계를 ‘트랜스’하는 존재를 충분히 표현할 수도, 포괄할 수도 없다는 문제의식이 등장한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대안적 용어로서 제안된 것이 ‘트랜스젠더’다. 트랜스젠더는 ‘태어날 때 지정받은 젠더와는 다른 젠더로 살기 위해 의료적 조치를 원하는 사람’으로 단순하게 정의되지 않는다. 이 용어는 ‘사회가 규정한 지배적 젠더 규범에 부합하지 않거나 저항하는 드래그퀸, 드래그킹, 부치 레즈비언, 여성스러운 게이, 젠더 비순응자, 젠더 규범에 순응하지 않는 이성애자 등을 모두 포괄하는 용어’(레즈비언 트랜스젠더 액티비스트 레슬리 파인버그)다. 그야말로 “모든 스펙트럼 위의 가능성들”(슬릭)인 것이다.

페미니즘과 트랜스젠더 운동은 갈등과 경합, 그리고 연대의 역사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상관적으로 구성하고 또 확장하면서 지속적으로 변화해왔다. 페미니즘이 ‘젠더’를 발견하고, 트랜스젠더 담론이 ‘트랜스페미니즘’의 고안과 함께 스스로의 전복성을 언어화해온 과정은 이를 잘 보여준다. 따라서 “페미니즘이 트랜스젠더를 안고 가느냐 마느냐”는 제대로 된 질문이 아니다. 페미니즘과 트랜스젠더 운동은 독자적인 자리를 점하고 있으면서도 서로 분리되지 않는, 일종의 ‘보로메오의 매듭’처럼 얽혀 있다. 이런 관계 맺기야말로 나의 문제를 사소화하지 않으면서도 너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는, 그렇게 유연한 연대체로서 ‘우리’의 운동을 조직하는 멀티트랙의 운동을 가능하게 한다.

2016년 강남역 여성살인사건 역시 멀티트랙의 기획이 필요했던 사건이었다. 여성들은 이를 ‘여성혐오 살인사건’이라고 규정했지만 일부 전문가들과 공권력은 조현병 환자의 ‘묻지마 살인사건’이라 주장했다. 이는 한국 사회에 쉽게 받아들여졌다. 여성혐오를 이해하는 감수성보다는 쉽게 ‘장애 탓’을 하는 장애혐오가 훨씬 더 강했기 때문이다. 장애혐오는 사건의 본질인 여성혐오를 가렸고, 동시에 여성혐오를 반성하지 않는 사회는 장애혐오를 더욱 강화시켰다. 그러나 이 비극을 통해 페미니즘은 여성혐오를 대중적인 개념으로 만들어냈고, 장애인 인권운동은 조현병에 대한 편견을 넘어서는 대항 담론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각자의 영역에서 각자의 싸움을 하면서도 서로가 서로에게 맥락이 되고 힘이 되는 운동, 멀티트랙의 운동은 다양한 방식으로 조직될 수 있다.

유연하게 열리고 닫히는 범주로 ‘여성’ 상상하기

“섹스는 이미 젠더”라고 말하는 퀴어 페미니즘은 “성적인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셀 수 없이 많은 성적 변수를 ‘두 개의 정상적인 섹스’로 한정하는 언어로는 인간의 다양성을 이해할 수도 포착할 수도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퀴어 페미니즘이 젠더 개념을 통해 ‘여성 신체’의 물질성을 폐기하려 한다는 것 역시 오해다. 이는 각 개인의 신체성을 더욱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고려하려는 기획에 가깝다. 마찬가지로, 여성이 경험하는 차별과 폭력의 실체 역시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차별과 폭력이 어떻게 개인을 사회적으로 ‘여성이라는 위치’에 다시 고착시키는지 분석하고, 그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고자 한다.

“억압받는 나는 누구인가”에 기대는 정체성의 정치는 목소리를 박탈당한 자들에게 유용한 싸움의 도구이다. 그러나 역사와 문화 이전에 존재하는 본질적인 여성됨을 상정하는 것은 페미니즘 정치의 가능성을 제한한다. 정체성 정치의 힘은 정체성을 본질로 만드는 사회의 관습 자체를 질문하면서 그 경계를 열어 다른 정체성들과 적극적으로 연결되기 시작할 때 더 넓게 확장될 수 있으며, 더 강한 힘을 가지게 된다. 우리는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침해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물신화하지 않으면서, 가부장제에 저항하는 일종의 거점으로 삼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 정체성을 유연하게 열고 닫는 이중 전략이 필요하다. 이미 여성으로 식별되었기 때문에 경험하게 되는 부정의와 불평등에 저항할 때에는 ‘여성이라는 주어진 위치’를 중심으로 연대하되, 그 위치를 부여하는 구조와 근본적으로 싸우기 위해서는 과감하게 ‘여성 정체성’의 허구성을 심문하는 것. 그리하여 규정이 모호한 ‘여성’이라는 정체성에 특권을 부여하기보다는 수많은 주변적 위치들과 손을 잡고 ‘함께’를 도모하는 것. 한국의 대중 페미니즘 운동은 아직 이 이중 전략을 충분히 시험해보지 못했다. 이제부터 함께 모험을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 아무도 짓밟지 않는 운동을 꿈꾸며 말이다.

손희정 페미니스트

▶ 한국의 페미니즘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강남역 사건 이후 등장한 새로운 페미니즘 흐름 앞에 던져진 질문이다. 페미니즘들 사이의 입장 차이는 점점 분명해지고 있지만 비판적 논의는 사실상 침묵 속에 있었다. 페미니스트 연구자 김은실, 권김현영, 김영옥, 손희정, 이현재가 연속 기고로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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