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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용접의 달인이 100년을 일해도 최저임금

등록 2020-08-08 15:08수정 2020-08-08 17:41

[토요판] 이란주의 할 말 많은 눈동자
⑧한국에서 12년 일한 사말이 귀환하는 이유

2008년부터 한국에서 일한 사말
가족초청해 살다 귀국하는 이유

성실함으로 숙련인력 비자 얻고
용접의 달인 돼도 200만원 월급
두 딸 키우려 월급 올려달라고
간곡히 부탁해도 회사는 외면

사장 허가 없이 회사 못 옮기는
고용허가제에 치여 떠나지만
‘스리랑카 공동체’ 잘 이어지길
일러스트레이션 순심
일러스트레이션 순심

귀환을 준비하고 있는 사말(가명·40)은 2008년에 스리랑카를 떠나와서 무려 12년을 한국에서 일했다. 12년은 그에게 어떤 시간이었을까. 이주노동자 중에는 드물게 가족을 초청해 같이 지내기도 했고, 그 과정에서 겪은 일이 계기가 되어 돌아갈 것을 결심하기도 했다. 한국이 이주노동자에게도 공정하기를, 그는 꿈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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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함으로 혼자 E7비자 따내

이제 가려고요. 스물여덟에 와서 나이 마흔에 갑니다. 한국에서 일하는 사이에 청춘이 다 갔어요. 처음 고용허가제(E9비자)로 올 때 계약했던 회사에서 줄곧 12년을 일했어요. 오자마자 용접을 배워 지금껏 하고 있으니 용접만큼은 거의 달인 수준이죠. 첫 계약 3년 끝나고 1년10개월을 연장했어요. 그사이 회사를 옮기지 않으면 본국에 다녀와서 다시 4년10개월간 일할 수 있는 ‘성실근로자 제도’라는 것이 있어요. 나 역시 성실근로자로 인정받아 4년10개월을 더 연장해서 일했어요. 그 비자가 끝날 즈음에는 숙련기능인력(E7비자)으로 인정받아서 3년 더 있었고요. 숙련기능인력 비자는 E9비자로 5년 이상 일한 노동자 중에 연봉, 학력, 나이, 한국어 수준, 은행 저축액 같은 항목을 점수로 계산해서 52점을 넘으면 취득할 기회가 생기는 비자예요. 수가 일정하게 정해져 있어서 신청자가 많으면 높은 점수 순서로 선발한다고 해요. 여러 항목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연봉이 무조건 2600만원을 넘어야 한다는 거였어요. 우리같이 최저임금 받는 노동자들에게는 정말 갖추기 어려운 조건인 거지요.

나는 점수를 채우기 위해 한국어능력시험을 봐서 자격을 갖추고 지게차 운전면허를 땄어요. 회사에서 좀 도와줬더라면 수월했을 텐데, 너무 모른 척해서 섭섭했어요. 심지어 회사가 뿌리산업에 해당하면 점수를 더 받을 수 있다고 해서 확인서를 요청하니, 인증기간 연장 비용인가로 45만원이 든다고 그걸 나더러 부담하라지 뭡니까. 결국 그것까지도 내가 냈어요. 뿌리산업이 뭐냐면요. 자동차, 선반, 항공 같은 미래성장산업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6대 뿌리기술(용접, 주조, 금형, 소성가공, 표면처리, 열처리)을 기반으로 하는 산업을 말한대요. 내가 일하는 회사가 여기에 해당하기 때문에 그 확인서를 제출해서 필요한 점수를 몇점 더 확보했어요. 그렇게 어렵게 E7비자를 받아냈어요.

10년 가까이 일했는데도 더 연장을 하고 싶었느냐고요? 사실 E7 받고 계속 한국에 살 생각은 없었어요. 너무 늦지 않게 스리랑카로 돌아가서 내 사업을 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도 E7을 선택한 중요한 이유가 있었어요. 이 비자는 가족을 초청할 수 있기 때문이죠. 내가 처음 한국에 올 때는 총각이었는데, 첫 3년 계약 마치고 고향에 잠시 갔을 때 결혼을 했어요. 곧 예쁜 딸아이도 태어났죠. 휴가 받아 집에 갔다가 아내와 딸을 두고 나 혼자 떠나오려면, 헤어지기 싫어 가슴이 너무 아팠어요. 가족을 한국에 데려와 같이 살고 싶었어요. 내가 한국에서 경험하는 것을 아내도 함께 경험해볼 수 있기를 바랐어요. 경제적으로 발전한 한국, 스리랑카와는 사뭇 다른 문화와 역사를 경험하고, 우리와 비슷하고도 다른 한국 사람들을 만날 기회를 주고 싶었어요. 같이 기차 타고 여행하고 싶었고, 맛있는 한국 음식을 같이 먹고 싶었어요. 아이가 한국 아이들과 어울리며 한국어를 배웠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어요. 그런데 애석하게도 E9비자는 가족을 초청할 수 없다고 해요. 잠깐 여행으로 다녀갈 수도 없었어요. 너무 엄격하게 막아서 비참한 마음이 들 정도였어요. 그런데 마침 E9노동자도 E7비자로 변경할 수 있도록 새로운 제도가 생겼던 것이죠.

비자를 바꾸고 서둘러 아내와 아이를 초청해서 2년 반을 같이 지냈어요. 정말 꿈같았어요. 기숙사에서 나와 월셋집을 따로 얻어 지내자니 생활비가 몇배로 들었어요. 그래도 기쁨이 컸어요. 딸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냈더니 금방 한국말을 배워서 나보다 더 잘할 정도였어요. 예쁘고 사랑스러웠어요. 아이 어린이집 친구 집에 초대받아 가기도 했고, 그 가족을 우리 집으로 초대하기도 했어요. 스리랑카식으로 음식을 하면 손님들이 먹지 못할까봐 중국식으로 볶음밥을 만들었어요. 사모사(세모 모양의 튀김만두)와 볶음밥이 맛있다고 좋아하니 고맙고 기뻤어요. 그러면서 친구가 된 아내와 그 아이 엄마는 지금도 메신저로 시시콜콜 소식을 주고받아요.

문제는 돈이었어요. 그즈음부터 야근이 없어져서 잔업수당이 뚝 끊겼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받는 돈은 그저 200만원가량이거든요. 몇번 사장님에게 부탁했어요. 월급 좀 더 달라고요. 가족들과 같이 살기 힘드니까 도와달라고요. 그러나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회사도 힘들다는 말뿐이었어요. 내 기술을 생각하면 돈을 더 줘도 되는데, 참 야속했어요. 나는 다른 회사 사장님들에게 월급 300만원 이상 줄 테니 오라는 말도 자주 듣는데 말입니다. 그러다 둘째 아이가 생겼어요. 어린아이를 낳고 기르는 데 정말 돈이 많이 들더군요. 더 이상 월수입 200만원으로 버틸 수가 없었어요. 나는 다시 사장님에게 부탁했어요. 가족을 보내고는 내가 견딜 수 없으니 제발 월급을 올려달라고, 어렵다면 나를 다른 회사로 보내달라고요. 그 전에도 같이 일하던 여러 고용허가제 노동자들이 회사를 떠났는데, 다들 월급 문제였어요. 사장님 사인을 받아야 회사를 그만둘 수 있으니까 다들 애원하고 싸우고 일 안 하고 버텨가며 사인을 받아서 나갔어요. 나는 그러지 않았던 게 잘못이었나 봐요. E7노동자는 E9보다 쉽게 회사를 옮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것 또한 잘못 알았던 거예요. 내가 다른 회사로 보내달라니까 사장님이 그랬어요. 갈 수 있으면 가라고. 그 말을 믿고 출입국사무소에 갔더니 절대 안 된다는 거예요. 회사가 문 닫지 않는 한 계속 이 회사에서 일해야 한다고. 마음대로 옮기면 비자 취소된다고. 사장님은 처음부터 다 알고 있으면서 나를 놀린 것이었어요.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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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신 같은 ‘파주 스리랑카 사미티얼’

우리 회사 용접실을 내가 다 책임지고 있어요. 만약 한국인이 같은 일을 한다면 월급을 두배 이상 줘야 할 거예요. 하지만 나는 여기서 10년, 20년, 아니 100년 일한다 해도 똑같을 거예요. 10년 일해도 최저임금, 100년 일해도 최저임금… 아무리 좋은 기술로 오래 열심히 일해도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니 힘이 쑥 빠졌어요. 더 이상 이 회사에 정성을 들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거세게 밀려왔어요. 하지만 당장은 다른 방법이 없다, 가족들 비자가 다 나한테 달려 있으니 문제가 생기면 절대 안 된다, 그러니 일단 일을 계속하자. 그리고 결심했어요. 둘째가 비행기 탈 수 있을 만큼 자라면 가족을 먼저 보내고 1년 뒤에 나도 가야겠다. 그 시간이 다 지나고 이제 가야 할 날이 다가오고 있어요.

코로나19 때문에 비행기가 다 멈춰서 걱정이에요. 가끔 특별기가 있다고 해서 탑승 대기자 명단에 올려뒀는데, 대기 인원이 800명이라니 내 차례가 오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아요. 나는 스리랑카에 돌아가서 한국인을 전문으로 안내하는 여행사를 하고 싶어요. 연습 삼아 한국인팀을 꾸려 스리랑카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죠. 막상 해보니 배워야 할 것이 무척 많았어요. 돌아가서 1년 정도 공부해서 자격증 먼저 받으려고 합니다. 차근차근 준비해서 꼭 성공하고 싶어요. 슬픈 이야기가 있는 바위 왕궁 시기리야, ‘세상의 끝’을 향해 뚜벅뚜벅 걷는 호턴플레인스 트레킹, 엘라의 산악열차… 아름다운 스리랑카 구석구석을 여행자들과 함께 누비는 모습을 상상하며 여행 코스를 짜보기도 해요. 한국인 중에는 스리랑카라는 나라를 아예 모르는 이들도 많잖아요. 잘 알려서 한국인들이 우리나라에 많이 찾아왔으면 좋겠어요. 그런 준비를 하며 어수선하고 착잡한 마음을 달래곤 합니다.

그것 말고도 마음 쏟는 일이 또 하나 있어요. ‘파주 스리랑카 사미티얼(공동체)’이 앞으로도 훌륭하게 이어질 수 있도록 준비하는 일이죠. 내가 한국에 있는 동안 가장 잘한 일은 공동체를 만들어 10년을 지켜온 것이라고 생각해요. 여기 온 지 얼마 안 되어 어리바리하던 시절, 나보다 몇년 먼저 온 친구를 만났어요. 그 친구가 아픈 친구를 돕는 모습을 보고 감동받았는데, 나에게 경기도 파주 지역에서 스리랑카 사람들 모임을 만들어 서로 돕자고 했어요. 바로 의기투합했죠. 그때 의정부와 포천에 스리랑카공동체가 있어서 훌륭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 전에는 공동체가 무엇인지 이주민 인권단체가 무엇인지 전혀 몰랐어요. 선배 공동체들에 배워가며 파주에서도 모임을 만들고, 친구는 회장을 나는 총무를 맡았어요. 첫 활동이 2011년 설 행사였는데, 이리저리 도움 받아 신나게 행사를 마쳤어요. 처음 해보는 일이라 무지 힘들었지만 배우는 것도 많았어요. 그 일이 인연이 되어 파주샬롬의집과 특별한 연대감을 갖게 되어 지금까지 같이 활동하고 있어요. 혼자였다면 견디기 힘들었을 시간을 공동체와 친구들이 있어서 즐겁게 지낼 수 있었어요. 친구가 귀환한 뒤, 내가 4년간 회장을 맡아 일했으니 공동체는 거의 나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 친구들이 한국에서 제일 힘들어하는 것이 바로 외로움이에요. 아는 사람도 없고 내 편 들어주는 사람도 없는데, 아프기라도 하면 진짜 서러워요. 그럴 때 서로 힘이 되어 돕자고 만든 것이 바로 공동체죠. 우리 공동체는 누구에겐가 문제가 생기면 나서서 돕고 통역도 하며 마음을 많이 써요. 우리끼리 해결할 수 없는 큰 문제가 있을 때는 파주샬롬의집 같은 이주민 인권단체로 도움을 요청해요. 또 우리나라에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도 우리는 힘을 모아요. 스리랑카는 비가 많이 오는 나라라서 홍수가 정말 잦아요.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집을 잃어요. 우리는 먼 곳에 있어서 달려가 도울 수 없으니 대신 돈을 모아 보내죠. 먼저 귀환한 친구들이 그 돈을 받아서 고난당한 이웃에게 먹을 것을 전합니다. 아이들에게 물에 쓸려간 책과 옷을 다시 안겨줍니다. 나도 돌아가면 그 일을 열심히 하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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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원 어른신들과 잔치 가슴에 남아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우리 공동체는 금촌역 앞에서 우리 방식으로 불교 법회를 했어요. 희생당한 분들이 좋은 데 가시도록 기도하고 싶었어요. 지나던 한국인들이 모두 고맙다고 하니 작은 위로라도 되었나 싶어 마음이 좋았어요. 요양원에 계신 어르신들을 모시고 잔치를 열었던 일도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어요. 정말 감동이었어요! 그때 내가 어르신들께 이렇게 인사드렸어요. “제 첫번째 나라는 스리랑카이고 두번째 나라는 한국입니다. 한국이 발전한 이유는 30~40년 전에 열심히 일하셨던 어른들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이 나라를 이렇게 만든 덕분에 우리가 와서 돈 벌고 있으니, 어르신들이 우리 가족과 우리나라도 도와주시는 겁니다. 고맙습니다.” 낯간지럽다고요? 아이고, 왜 그러세요. 이게 진짜 내 마음이라고요! 진심이 전해졌는지 어르신들이 행복한 눈물을 흘렸어요. 멋쩍어하시는 분들 업어드리며 우리도 행복했어요. 우리 스리랑카에도 불교 문화가 깊고 어른을 공경하는 문화가 있어서 한국 어르신들과 정서적으로 잘 맞았던 것 같아요.

내가 떠난 뒤에도 공동체 회원들이 이런 활동을 하며 재미나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10년을 일해도 100년을 일해도 여전히 우리를 차갑게 대하는 한국이지만, 틈새란 늘 있는 법이니까요.

▶ 아시아인권문화연대 일꾼. 국경을 넘어와 새 삶을 꾸리고 있는 이주민들은 저마다 깊은 사연이 있다. 떠나온 사회와 살아내야 할 사회에 하고픈 말이 많지만 그 말은 발화되지 못한 채 눈동자에 잠기곤 한다. 그 이야기를 풀어내 당사자 시점으로 전한다. 4주에 한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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