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사회일반

커피는 불평등으로 오염된 땅에서 자란다

등록 2020-10-24 09:17수정 2020-10-24 09:39

[토요판] 서필훈의 얼굴 있는 커피
⑫ 커피와 불평등

1970~80년대 내전 겪은 중미
내전의 상흔과 인종간 불평등
니카라과 계절노동자는 수확철
코스타리카 농장에 가서 일하고

중미 커피노동자 중 백인 못 보고
능력 있는 여성도 성차별로 고생
11년 커피 생산국 방문했지만
현지인 일부 통해서만 봐왔을 뿐
중미에서 커피를 수확하고 나르는 일은 원주민의 몫인 경우가 많다. 과테말라 원주민 노동자는 커피를 수확할 때 아이들만 숙소에 둘 수 없어 함께 나온다. 서필훈 제공
중미에서 커피를 수확하고 나르는 일은 원주민의 몫인 경우가 많다. 과테말라 원주민 노동자는 커피를 수확할 때 아이들만 숙소에 둘 수 없어 함께 나온다. 서필훈 제공

과테말라 안티과 지역에 있는 아드리안의 농장은 대단한 규모였다. 내가 그동안 방문했던 전세계 수백개 커피 농장 중 가장 컸는데 수천헥타르에 이르는 농장은 해발 4천미터급 아카테낭고 화산 거의 절반과 세개의 마을을 품고 있었다. 농장은 구석구석 잘 정돈되어 있었고 온갖 농기계와 커피 처리 시설은 최신식이었다. 커피 구매를 위해 함께 커핑하는데 아드리안은 꼭 필요한 샘플 일부를 과테말라시티에 두고 왔다며 아쉬워했다.

한시간쯤 지났을까 갑자기 헬리콥터가 건물 옆 잔디밭에 내리더니 샘플을 던져주고 바로 이륙해 날아갔다. 우리는 마저 커핑을 끝낼 수 있었다. 아드리안은 농장 내 마을 주민을 위해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무료로 운영하고 있다. 마침 찾아간 초등학교에서는 아이들이 각자 노트북을 앞에 두고 컴퓨터를 배우고 있었다. 대부분 원주민과 메스티소였는데 학교에서는 일반 교과목뿐만 아니라 저축하는 방법, 서류 쓰는 방법, 기본 위생 등 실생활에 필요한 내용을 가르치고 있었다. 농장 안에는 병원과 치과도 있는데 마을 주민뿐만 아니라 농장 밖에 사는 주민의 친척까지 모두 무료다.

_________
조용히 그들의 대화를 듣다

중미의 니카라과, 엘살바도르, 과테말라는 1970~80년대 심각한 내전을 겪었다. 수십만명의 사람이 죽거나 실종됐다. 사람들 사이에 내전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지만 쉽게 드러낼 수 없는 상흔으로 남아 있다. 나는 그 시절 얘기를 선뜻 물어보지 못한다. 일행이 먼저 얘기를 꺼내면 몇몇 질문을 해볼 뿐이다. 당시 커피 농장주 중 대토지를 소유했던 사람 상당수는 내전이 심각해지자 외국으로 피신했다. 그들 중에는 농장을 아예 몰수당한 경우도 있고 나중에 농장의 일부만 되찾은 사람도 있었지만, 어쨌든 대부분의 커피 농장은 오랜 내전을 거치며 황폐해진 뒤였다. 내전이 끝나자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왔다. 하지만 재산과 농장을 빼앗기고 어려운 타지 생활을 해야 했던 경험은 좌익에 대한 뿌리 깊은 적개심으로 남았다. 그들 중 일부는 내전 시기 반대편에 서서 자신을 몰아세웠던 사람들과 여전히 같은 동네에서 마주치며 살아가기도 한다.

니카라과 오코탈에서 커피 농장을 운영하는 옥타비오는 이 지역 유력 가문 출신이다. 옥타비오 일가는 내전이 있기 전 방대한 농장을 소유하고 시내에 많은 건물을 갖고 있었지만, 내전에서 승리한 산디니스타 혁명 정권이 들어서자 가족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외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옥타비오 가족은 온두라스와 미국으로 피신했고 그는 코스타리카에서 대학을 나와 직장을 구했다. 한번은 차를 타고 오코탈 교외를 지나는데, 옥타비오가 창문 밖을 가리키며 예전에는 여기 보이는 땅이 전부 아버지와 가족 소유였다며 말끝을 흐렸다. 그의 농장에는 지금은 말라버린 작고 낡은 분수가 있었다. 옥타비오는 자신이 어렸을 때 좌익 민병대가 농장에 침입해 관리인을 죽이고 처박아 분수에 피가 흥건했던 기억을 갖고 있다.

인도의 커피 농장주 키리트는 인도에선 드물게 무종교주의자다. 서필훈 제공
인도의 커피 농장주 키리트는 인도에선 드물게 무종교주의자다. 서필훈 제공

몇년 전 인도에서 두 농장주와 함께 차를 타고 이동하고 있을 때다. 키리트는 나와 동갑인데 인도에서 보기 드문 무종교주의자다. 아파두레이는 힌두교 사제로 봉직하고 있는데 자신이 브라만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갑자기 아파두레이가 인도의 무슬림에 대해 불평하기 시작했다. 무슬림은 폐쇄적이며 공격적이고 자녀를 너무 많이 낳아 인도 내 인구 비율이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 그런데도 정치인들은 표를 더 얻기 위해 무슬림 눈치를 보고 있는데 이것은 인도의 미래를 위해 좋지 않다며 열변을 토했다. 키리트는 무슬림도 인도 국민이며 국가를 운영해나가는 데 있어 특정 종교에 치우친 정책은 분열을 낳기 때문에 좋지 않다고 했다. 곧이어 아파두레이는 파키스탄에 대해 더 강경한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고 키리트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뒷좌석에서 그들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중미에서 파나마에 이어 가장 소득수준이 높은 코스타리카에서는 커피 수확 철이 되면 국경을 개방해 니카라과 사람들을 커피 수확 노동자로 받아들인다. 이들은 수확 철에 서너달 일하고 돌아간다. 이들은 계절노동자로 불리는데 가족이 함께 일하러 오는 경우가 많다. 집을 떠나 임시 숙소에서 지내며 일하는 것은 힘들지만 니카라과보다 임금이 높아 웃돈을 주고라도 코스타리카에 와서 일하고 싶어 한다. 코스타리카에는 계절노동자 외에도 농업, 건설, 가사 노동 분야 등 3디(D) 업종에 많은 니카라과 사람들이 종사하고 있다. 500만명이 채 되지 않는 인구 중에 합법적인 니카라과 이주 노동자만 30만명이 넘는다. 이들은 월급을 고국의 가족에게 송금하며 니카라과 경제와 외화수입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내가 만난 니카라과 사람들은 코스타리카에 대해 양가적인 감정이 있었다. 한편으로 그들의 풍요로움을 부러워하고 다른 한편으로 그들이 인종차별적이고 가식적이라며 싫어했다. 코스타리카는 중미에서 백인 비율이 가장 높고 메스티소와 원주민 비율은 제일 낮다. 코스타리카의 커피 수출업체 대표에게 이유를 물어보니 원래 이 지역은 오래전부터 원주민 거주 비율이 낮았다고 한다. 코스타리카는 중미에서 가장 온화한 기후와 기름진 토양을 갖고 있기로 유명하다.

_________
클라우디아, 나한테도 좀 팔아

중미 모든 국가에서 커피를 재배하지만 나는 커피 수확 노동자 중 백인을 본 적이 없다. 커피 수확은 원주민과 메스티소의 일이다. 이들은 보통 커피 수확 철에는 커피를 따고 나머지는 다른 작물을 기르는 농장이나 도시 일용직 노동자로 일한다. 하지만 실업률이 워낙 높아서 일자리 구하기가 쉽지 않다. 과테말라의 한 농장주는 원주민 노동자와 일하는 것이 골치라고 했다. 술 먹고 일을 나오지 않거나 자기들끼리 도박으로 돈을 탕진하고 싸움을 일으켜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잦다고 한다. 번거로워도 임금은 주급으로 지급할 수밖에 없는데 월급으로 한꺼번에 주면 그 돈 받고 만족한 나머지 일을 그만두기 일쑤라고 한다. 원주민은 경제관념이나 미래에 대한 계획이 전혀 없다며 혀를 찼다. 중미에서 백인이 차지하는 인구 비율은 나라마다 차이가 있지만, 백인 대부분은 계층 피라미드 최상층에 속해 있다. 메스티소는 주로 중/하층, 원주민은 최하층에 위치한다.

계절노동자로 건너와 코스타리카 커피 농장에서 커피를 수확하는 니카라과 출신 노동자. 서필훈 제공
계절노동자로 건너와 코스타리카 커피 농장에서 커피를 수확하는 니카라과 출신 노동자. 서필훈 제공

클라우디아를 처음 만난 것은 2011년 니카라과에서였다. 당시 그는 커피 수출회사의 품질관리 담당이자 영어 통역을 맡고 있었다. 클라우디아는 오랫동안 커피 일을 해왔고 똑똑했지만, 집이 워낙에 가난했다. 많은 중남미 여성이 그러하듯 십대에 임신해서 아이를 낳았고 남자는 떠났다. 집안일과 아이를 돌보고 부모를 부양하는 일, 돈 버는 일까지 모두 그의 몫이었다. 한번은 회사에서 클라우디아가 일을 가르쳤던 후임을 자신의 상사로 임명하자 사장에게 따져 물었다. 사장은 거친 남성 커피 생산자를 상대해야 하는 일이라 어쩔 수 없다고 답했다. 클라우디아는 매번 반복되는 일이라 크게 놀라지 않았지만, 다시 한번 회사를 떠났다. 다른 회사들도 그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중책을 맡기기 꺼렸고 같은 일을 하는 남성에 비해 늘 낮은 임금을 주었다. 그는 여러 회사를 전전했고 커피 수확 철에만 이곳저곳의 회사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했다. 나는 니카라과를 방문할 때마다 클라우디아를 만났지만, 그는 계속 안정적인 일자리를 잡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클라우디아로부터 건강이 나빠져서 일을 쉬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한동안 만나지 못했다. 3년 전 다시 그를 만났는데 표정이 밝았다. 유명한 오스트레일리아 커피 회사로부터 실력을 인정받아 투자를 받았고 작은 커피 농장을 사서 새로운 가공 방식을 발전시켰다. 그가 개발한 방식으로 처리한 커피는 인기가 좋아서 전량 오스트레일리아로 수출하고 있었다. 나한테도 좀 팔라고 기분 좋은 부탁을 했다.

과테말라는 상위 1%가 65%, 상위 5%가 85%의 부를 소유하고 있다.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혁명 지도자였던 오르테가 현 대통령은 2018년 반정부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해서 약 600명의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인도의 무슬림 인구 비율은 15%로 총 2억명에 이른다. 니카라과는 중남미 최빈국이며 코스타리카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니카라과의 3.5배다. 코스타리카의 백인 비율은 80%, 원주민 비율은 1%로 국경을 맞댄 니카라과, 파나마와 큰 차이가 있다. 2018년 국제커피기구(ICO)에서 발표한 ‘커피 분야 성평등 보고서’에 따르면 전세계 커피 농장의 20~30%는 여성이 운영하고 있고 커피 생산에 필요한 노동력의 70%는 여성이 제공하고 있다.

나는 지난 11년 동안 여러 커피 생산 국가를 방문했지만, 정작 그곳의 사회와 문화, 사람들과 삶에 대해 깊이 알지 못한다. 내가 만난 현지인 일부를 통해서만 그곳을 봐왔기 때문이다. 커피 수확 노동자나 원주민 노동자와 함께 웃으며 사진을 찍었어도 나는 이들과 제대로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다. 앞에서 이들을 언급하며 아는 이름 하나 대지 못한 이유다. 그래서 커피 산지에 대한 나의 경험과 지식은 흩어진 파편들에 불과하다. 어쩌면 이 작은 파편들이 그곳의 사회와 사람들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작은 틈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것들은 오히려 나와 우리 사회를 비추는 작은 거울 조각에 더 가깝다.

_________
커피는 상품이고, 나는 장사꾼이지만

포대를 옮기는 니카라과의 커피 농장 노동자. 서필훈 제공
포대를 옮기는 니카라과의 커피 농장 노동자. 서필훈 제공

때로는 지리멸렬한 현실과 부조리함으로 가득한 한국 사회에서 도망치고 싶었고 산지에서 잠시라도 위안을 얻고 나만의 이상향을 찾고 싶었다. 아름다운 풍경과 따듯한 사람들, 멋진 커피가 자라고, 지금도 늘 그리워하는 곳이다. 하지만 그 사회와 사람들을 낭만화하는 것은 단지 나의 투사이자 현실 왜곡일 뿐이었다. 산지에도 우리처럼 빈부 격차와 좌우 대립이 있고, 종교와 인종, 노동과 젠더를 둘러싼 갈등이 있다. 마찬가지로 평화와 화해도 있다. 코로나의 전세계적 유행은 국가와 지역의 경계를 넘어 우리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공통감각을 일깨웠다. 어쩌면 우리는 배경과 양상은 조금씩 다를지라도 다양한 사회적 질병들을 이전부터 함께 앓아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커피는 맛있지만, 엄연히 자본주의의 상품이고 나는 그저 장사꾼이다. 사실 내 머릿속은 온통 일 걱정뿐이다. 아주 가끔 그곳에서 마주했던 커피밭과 커피 기르는 사람들의 얼굴이 생각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곤 한다. 세상 속에서 커피가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이며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내가 산지를 떠돌건 한국에서 커피를 팔건 모든 것은 이 질문에 답하는 과정일 뿐이다. 그래도 커피를 좋아한다. 많이. 정녕 무엇을 좋아한다는 것은 노력과 책임이 필요한 일인 것 같다. 코로나 때문에 적어도 내년까지는 중남미를 방문하지 못할 것 같다. 의료체계가 열악한 대부분의 커피 산지는 지금도 큰 어려움에 놓여 있다. 그래도 그곳 사람들은 오늘도 커피나무를 돌보고 무언가를 또 희망하고 있겠지. 그들의 안녕을 기원한다.

서필훈 커피 리브레 대표. 15년 전 핸드 드립 전문점에서 바리스타로 시작해 현재는 로스팅과 생두 사는 일을 맡고 있다. 커피라는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본다. 아름다움과 참상, 희망이 한데 뒤섞여 있기는 매한가지다. 한 잔의 커피 뒤에 숨겨져 있는, 커피를 생산하고 가공한 사람들의 얼굴을 발굴하고 복원하는 일에 관심이 있다. 4주에 1번 연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조민에 이례적 집행유예 구형했던 검찰, 1심 벌금형에 항소 1.

조민에 이례적 집행유예 구형했던 검찰, 1심 벌금형에 항소

정부 “의사 집단에 굴복 않겠다”…‘2천명 증원 철회’ 요구 일축 2.

정부 “의사 집단에 굴복 않겠다”…‘2천명 증원 철회’ 요구 일축

‘윤석열 명예훼손 혐의’ 기자 “재판에 대통령 불러 처벌 의사 묻겠다” 3.

‘윤석열 명예훼손 혐의’ 기자 “재판에 대통령 불러 처벌 의사 묻겠다”

서울 도심서 ‘13중 추돌’ 아수라장…1명 사망·16명 부상 4.

서울 도심서 ‘13중 추돌’ 아수라장…1명 사망·16명 부상

검찰의 불법 자백? ‘윤석열 검증’ 압수폰 촬영본 “삭제하겠다” 5.

검찰의 불법 자백? ‘윤석열 검증’ 압수폰 촬영본 “삭제하겠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