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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옳은 일을 제때 행할 수 있게 하소서

등록 2020-12-19 09:53수정 2020-12-20 15:41

[토요판] 서필훈의 얼굴 있는 커피
(마지막회) 우리의 프로젝트

메노와 함께한 케냐 커피 혁명
실패로 돌아갔지만 다시 ‘도전’

“열심히 일하고 늘 기도하라”
71살 수쿠마르의 간절한 바람

매일 최저 매출 경신하는 업계
음료 한잔이 작은 위로 되기를

나의 구루 수쿠마르. 그는 인도 남부 케랄라 출신으로 대학에서 농업을 전공했다. 졸업 뒤 영국인이 운영하는 차 회사에 취직한 것을 시작으로 지난 48년 동안 차와 커피 농장을 관리해왔다. 현재는 바드라 커피 소속 4개 농장의 총지배인이다. 서필훈 제공
나의 구루 수쿠마르. 그는 인도 남부 케랄라 출신으로 대학에서 농업을 전공했다. 졸업 뒤 영국인이 운영하는 차 회사에 취직한 것을 시작으로 지난 48년 동안 차와 커피 농장을 관리해왔다. 현재는 바드라 커피 소속 4개 농장의 총지배인이다. 서필훈 제공

나는 얼마 전 절망스러운 연락을 받았다. 우리가 지난 3년 동안 네덜란드 커피회사 트라보카와 함께 케냐에서 추진한 프로젝트에 심각한 문제가 생겨 청산 작업에 들어가게 되었다. 트라보카 대표, 메노는 우리는 실패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 문제가 싸움의 근거다

케냐는 소수의 다국적 기업이 커피 생산에서 가공, 경매, 수출까지 수직계열화에 성공해 시장을 독점하고 있다. 케냐는 품질 좋은 커피로 오랫동안 명성을 누리고 있었고 국제 커피 시장에서 높은 가격에 거래되었지만 최근 커피 생산량이 대폭 감소하고 품질은 떨어졌다. 이유는 최소한의 생산 원가에도 미치지 못하는 커피 가격을 생산자에게 지불하면서 커피 농사를 포기하는 농가가 많아졌고, 농약과 비료 살 돈이 없어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커피나무는 병충해에 시들고 생산성이 하락했기 때문이다. 케냐 커피를 구매하는 그 어떤 회사도 이곳의 터줏대감인 다국적 기업과 각을 세우며 기존의 커피 거래 방식에 파문을 일으키고 싶어 하지 않았다.
트라보카 대표 메노(오른쪽). 우리는 지난 3년 동안 케냐에서 함께 프로젝트를 추진했지만 심각한 문제가 생겨 청산 작업에 들어가게 되었다. 사진 서필훈
트라보카 대표 메노(오른쪽). 우리는 지난 3년 동안 케냐에서 함께 프로젝트를 추진했지만 심각한 문제가 생겨 청산 작업에 들어가게 되었다. 사진 서필훈

하지만 20여년 전 에티오피아에서 처음으로 스페셜티 커피를 위한 혁신적인 구매 루트를 뚫었던 메노의 생각은 달랐다. 당시 그가 오토바이를 타고 커피 농장들을 찾아 에티오피아 오지를 누볐던 일은 지금도 커피 업계에 전설로 남아 있다. 몇년간의 사전 준비 작업을 마친 뒤 트라보카는 케냐의 커피 가공소 중 한곳인 은다로이니와 소속 생산자, 다국적 기업에 속하지 않은 독립 수출업체와 함께 케냐 커피 역사상 처음으로 가공소와 해외 구매업체 간의 직거래를 시도했다. 우리는 구매 파트너로 참여해 트라보카를 지원했다. 그리고 이 ‘은다로이니 프로젝트’를 알리기 위해 트라보카에서 제작한 소책자를 번역해 배포했고, 생산자들이 부엌에서 안전하게 조리하고 지역에서 더 이상의 삼림 파괴가 일어나지 않도록 50개의 태양열 스토브를 기증했다. 프로젝트가 시작되자 다국적 기업 카르텔의 온갖 방해와 협박이 있었지만 은다로이니 생산자들은 일치단결해 물리쳤고 첫 수출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케냐 언론은 이 사실을 크게 보도하며 케냐의 커피 혁명이라 일컬었고, 전세계 스페셜티 커피 시장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우리가 구매한 은다로이니 커피는 가격이 조금 높았는데도 좋은 품질과 프로젝트에 공감하는 소비자의 호응으로 일찌감치 동났다. 트라보카는 은다로이니 생산자들이 이전까지 받던 커피 대금의 두배 이상, 케냐에서 가장 높은 금액을 지급했고 가공소 설비 개선을 위한 자금을 추가로 적립했다. 영농학자를 고용해 생산자에게 체계적인 영농 기법을 가르쳤다.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1년이 지난 올해 초 수확 결과는 놀라웠다. 케냐는 60년 만의 최악의 흉작을 기록했지만 은다로이니는 오히려 수확량이 두배로 늘었다. 생산자가 작년에 트라보카에서 지급받은 수입으로 병충해를 적극 구제하고 비료를 쓰고 영농 기술을 발전시킨 결과였다. 올해 은다로이니 생산자의 수입은 작년의 두배로 늘었다.

하지만 은다로이니 이사진은 트라보카로부터 더 많은 돈을 받아내기 위해 조합원이 아닌 생산자에게서 헐값에 커피 열매를 구매하고, 심지어 허위로 커피를 구매했다고 장부를 조작했다. 게다가 가공소에서 거래하는 비료와 농약 판매 업체에 리베이트를 요구했다. 그들의 부정은 발각되었고, 사건은 케냐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이 프로젝트를 오랫동안 준비하며 많은 시간, 에너지, 지식, 돈을 투자했던 트라보카는 물론이고 지난 2년 동안 커피를 구매하고 프로젝트를 알리기 위해 노력했던 우리 회사로서도 큰 충격이었다. 이번 일에 대해 현 이사진은 법적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은다로이니 생산자들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다시 다국적 기업의 거래 시스템 안으로 들어가서 예전처럼 낮은 커피 가격을 받게 될 가능성이 크다. ‘반란’의 대가로 눈 밖에 난 그들은 예전보다도 못한 처우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
은다로이니 조합원 회의. 서필훈 제공
은다로이니 조합원 회의. 서필훈 제공

이사진을 비난하기는 쉽고, 케냐의 현실에 실망하기는 더 쉽다. 트라보카는 은다로이니 생산자들이 스스로 일어나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싸우고 현 이사진을 해산하지 않는 이상 프로젝트는 폐기될 것이라고 공지했다. 어려운 싸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은다로이니 생산자들의 삶은 그들 자신의 것이다. 현재 이사진은 이 모든 것이 카르텔의 사주를 받은 음모일 뿐이며 자신들은 결백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문제를 제기하는 생산자를 조합에서 내쫓겠다고 협박하고 있다. 나는 어제 메노와 화상회의를 했다. 그는 케냐의 다른 가공소와 새로운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라며 들떠 있었다. 은다로이니의 실패를 거울삼아 제도적인 보완을 마련했고 무엇보다 새 가공소는 이사진의 의지가 대단하다고 했다. 심지어 이제 막 수확을 시작한 커피의 품질도 훌륭하다며 좋아한다. 그는 이번에 은다로이니에서 발생한 모든 문제가 애초에 우리가 싸우기 시작한 이유이자 싸워야 할 증거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누군가에게는 그만둬야 할 이유가 그에게는 계속 도전해야 할 근거였다. 나는 미팅하기 전 그가 은다로이니 프로젝트의 실패로 의기소침해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내 예상은 빗나갔다. 그의 새로운 프로젝트 제안에 나도 모르게 같이 하겠다고 말하고 말았다. 우리 직원들한테는 아직 비밀이다.

나의 구루 수쿠마르

나에게는 진짜 구루(Guru)가 한명 있다. 그의 이름은 수쿠마르이고 올해 71살이다. 인도 남부 케랄라 출신으로 대학에서 농업을 전공했다. 졸업 뒤 영국인이 운영하는 차 회사에 취직한 것을 시작으로 지난 48년 동안 차와 커피 농장을 관리해왔다. 현재는 바드라 커피 소속 4개 농장의 총지배인이다. 다른 회사 소속의 농장 지배인들도 그를 깍듯하게 ‘서’(Sir)라고 부르며 달려와 자문하곤 한다. 나는 수쿠마르를 9년 전 처음 인도를 방문하면서 만났고 그 이후 매년 방문하며 마음 깊이 존경하게 되었다. 그와 커피 이야기를 할 때면 나는 그동안 주워들은 것을 신이 나서 얘기하게 된다. 마치 선생님 앞에서 학생이 그간 공부한 것을 칭찬받고 싶어 자랑하듯이. 그러면 수쿠마르는 자신의 경험과 지식으로 커피나무의 식생부터 가지치기 방식과 비료 주는 방법, 가공 방식의 장단점에 이르기까지 ‘자기 생각에는’이라는 겸손함을 더해 조곤조곤하게 얘기해준다. 그는 언제나 내 짧은 경험조차 존중하고 칭찬을 잊지 않는다. 하지만 그와 얘기하다 보면 나는 커피 구매자로서 다이렉트 트레이드 11년차가 알고 있는 커피 지식은 정말 보잘것없다는 것을 절감한다. 그는 내가 모르는 것이 얼마나 많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사람이다. 커피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경험을 가진 전문가를 꽤 만나봤고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워왔다. 하지만 수쿠마르는 지식 전달을 넘어 내가 스스로 깨닫고 노력할 힘까지 준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나의 구루 수쿠마르. 그는 인도 남부 케랄라 출신으로 대학에서 농업을 전공했다. 졸업 뒤 영국인이 운영하는 차 회사에 취직한 것을 시작으로 지난 48년 동안 차와 커피 농장을 관리해왔다. 현재는 바드라 커피 소속 4개 농장의 총지배인이다. 서필훈 제공
나의 구루 수쿠마르. 그는 인도 남부 케랄라 출신으로 대학에서 농업을 전공했다. 졸업 뒤 영국인이 운영하는 차 회사에 취직한 것을 시작으로 지난 48년 동안 차와 커피 농장을 관리해왔다. 현재는 바드라 커피 소속 4개 농장의 총지배인이다. 서필훈 제공

그는 내가 처음으로 그리고 유일하게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진지하게 물어본 사람이기도 하다. “거짓말하지 말아라, 열심히 일해라, 늘 기도해라.” 정말 뻔한 이야기다. 독실한 힌두교 신자인 그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옳은 일을 제때 행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와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며 두 손을 조용히 모아 얼굴에 갖다 댔다. 순간 나는 진부한 그의 말을 믿고 싶었고, 쉽지 않겠지만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매년 1월이 되면 어김없이 인도를 찾는다. 나는 바드라 농장을 방문할 때마다 수쿠마르와 함께 농장 근처에 있는 물라야나기리에 오른다. 이 산은 1930m로 카르나타카주에서 가장 높고 꼭대기에는 토굴 모양의 힌두 사원이 있다. 정상까지 계단이 놓여 있어 30분이면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하지만 매년 수쿠마르가 점점 더 버거워하는 것이 느껴져 마음이 쓰인다. 사원의 제단 앞에는 늘 향이 피워져 있고, 승려가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두 손을 모아 잠시 기도하고 헌금을 하면 승려는 재 같은 가루를 신문지 조각에 싸서 건네준다. 나는 일년 내내 그 조각을 지갑에 넣고 다닌다. 어떤 효험을 믿지는 않지만 수쿠마르와 함께 기도한 시간을, 그 평화를 기억하는 나의 방식이 되어버렸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건강과 커피로 만난 사람들의 행복을 빈다. 물론 그 토굴의 주인인 힌두의 이름 모를 신에게. 수쿠마르는 계단을 내려오며 은퇴할 나이가 이미 지났지만 농장주의 간청으로 은퇴를 못 하고 있다며 웃는다. “수쿠마르, 80살까지 일하다가 저랑 같이 은퇴해요.”
건조 중인 커피를 살펴보는 트라보카 대표 메노. 서필훈 제공 
건조 중인 커피를 살펴보는 트라보카 대표 메노. 서필훈 제공 

커피에 담긴 사연들의 우주

커피 마시는 것을 좋아하다가 커피를 업으로까지 삼게 되었다. 돈을 벌어보겠다고 전세계 커피 산지를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 그만큼 다양한 사연을 들었다. 돈벌이 수단으로만 생각했던 커피에 내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무수한 것들이 깃들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작은 커피 한알에는 불평등과 기회, 싸움과 평화, 절망과 용기, 가난과 희망, 변명과 사연, 욕심과 기도, 실패와 도전이 밤하늘의 별처럼 빼곡했다. 커피는 어느새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우주가 되어버렸다. 나는 그냥 장사꾼이고 커피에 대한 아무런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에게, 커피를 생산하는 그들에게 커피란 무엇이며 또 무엇이어야 하는가? 끊임없이 질문할 뿐이다. 은다로이니에서 커피 혁명이 일어나고 사그라들 때, 메노가 실패를 낙관하고 다시 도전할 때, 수쿠마르가 두 손을 모으고 신 앞에 설 때, 내 자리는 어디여야 할까? 절망이 아닌 실패는 어떻게 가능하고, 신이 보기에 합당한 일은 어떤 것일까? 그들은 그냥 직업에 충실할 뿐인 걸까, 거기에 커피라는 마법이 함께 작용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아직도 은다로이니 이사진이 밉고, 메노의 다음 프로젝트가 얼마나 성공적일지 확신하지 못한다. 내가 존경하는 수쿠마르의 지혜와 기도는 바쁜 일상에 밀려 늘 뒷전이다. 매일 숨이 차오르고 마음이 복잡하다. 그래도 생각해본다. 커피에 담긴 사연들의 우주라니, 대단한 허풍이고 믿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소소한 비밀이다. 미움과 불신, 조바심을 넘어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하며 용기를 내야 한다. 나는 여전히 한낱 음료에 불과한 커피를 렌즈 삼아 세상을 보고, 거울삼아 스스로를 돌아본다.
인도에서 수확한 커피 열매를 선별하는 모습. 서필훈 제공 
인도에서 수확한 커피 열매를 선별하는 모습. 서필훈 제공 

코로나로 많은 사람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커피 일을 하는 우리와 업계 동료들도 마찬가지다. 매일 최저 매출을 경신하고 있다. 초조하고 걱정된다. 화가 나지만 방향을 겨누지 못한다. 대책은 미덥지 못하고 미래는 새파랗게 질려 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더 답답하다. 나는 ‘옳은 일을 제때 행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려고 한다. 심호흡을 한번 크게 하고 혹시 이럴 때 커피가 해주는 말이 없나 귀 기울여 보려고 한다. 그리고 그냥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코로나에 사로잡힌 우리 삶에 커피 한잔이 작은 위로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끝>

서필훈 커피 리브레 대표. 15년 전 핸드 드립 전문점에서 바리스타로 시작해 현재는 로스팅과 생두 사는 일을 맡고 있다. 커피라는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본다. 아름다움과 참상, 희망이 한데 뒤섞여 있기는 매한가지다. 한 잔의 커피 뒤에 숨겨져 있는, 커피를 생산하고 가공한 사람들의 얼굴을 발굴하고 복원하는 일에 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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