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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건강한 몸 아니라 ‘아픈 몸’이 사회의 기본값

등록 2021-01-16 13:20수정 2021-01-16 21:45

[토요판] 조한진희의 잘 아플 권리
(2) 질병권으로 본 세상

아픈 몸으로 살아가는 시대
질병 겪는 상태도 ‘정상적’
아픈 몸 표준으로 설정하면
시민과 사회도 변화 가능해
‘아파도 괜찮은 사회’ 이동

건강권이 건강 증진을 중심으로 움직인다면, 질병권은 건강 추구와 치료를 누락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아픈 몸으로도 온전히 존재하는 것 자체를 중시한다. 게티이미지뱅크
건강권이 건강 증진을 중심으로 움직인다면, 질병권은 건강 추구와 치료를 누락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아픈 몸으로도 온전히 존재하는 것 자체를 중시한다. 게티이미지뱅크

모든 것이 낯설게 보였다. 몸이 바뀌자 시선이 바뀐 것이다. 마치 다리 골절을 당하고서야,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이 내 몸을 배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듯 말이다. 아픈 몸으로 평생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났더니, 사회를 다르게 인식하게 됐다. 흔히 우리 사회를 서구중심사회, 남성중심사회, 비장애인중심사회, 이성애중심사회 등으로 규정하는데, 이에 하나를 더 보태게 됐다. 건강중심사회라고 말이다.

내가 ‘건강중심사회’라고 말하면, 머리 위에 물음표가 떠다니는 듯한 표정을 자주 만난다. 건강은 언제나 당연히 옳고 좋은 것 아닌가. 서구, 비장애인, 남성, 이성애 중심 사회가 문제인 건 알겠는데, 건강을 중심에 둔 사회가 왜 문제라는 것일까.

당연한 물음이다. 어릴 적 교과서에서부터 건강은 인류가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라고 했다. 정부와 시민사회, 좌와 우를 넘어 한목소리로 건강을 강조한다. 세계보건기구를 비롯해서 많은 전문가가 ‘건강은 사회 참여와 행복의 전제조건이고, 불평등 해소로 모든 인류가 도달 가능한 최고의 건강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게 바로 ‘건강권’에서 주장하는 기본 문제의식이다. 그런데 아픈 몸이 되고 보니, 이 오래되고 당연한 주장이 낯설게 다가왔다. 이 문장이 내 몸을 소외시키는 것만 같았다. 더 나아가 변화한 지금 사회를 반영하지도 못하는 듯했다.

질병은 회복 아니면 죽음인가

생각해보면, 과거에는 질병이 회복 아니면 죽음이었다. 그리고 질병은 그 양갈래 사이의 ‘임시’적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의학의 발전 그리고 의학의 발전 방향으로 인해 완전히 회복되지 않지만 죽음도 아닌, 아픈 몸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상당수인 시대가 됐다. 개성처럼 만성질환을 하나쯤 달고 있어야 현대인이지 않냐는 우스갯소리를 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 이들은 죽을 때까지 아픈 몸을 적당히 관리하며 살아간다. 이런 현실에서는 건강의 강조도 중요하지만, 아픈 몸으로도 온전히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게 질병권(잘 아플 권리)이라는 말이었다.

질병권이 건강권을 포함하지만 초점을 이동시킨 말이라는 게, 막연하고 어려운 것 같지만 사실 단순하다. ‘건강은 사회 참여와 행복의 전제조건이고, 불평등 해소로 모든 인류가 도달 가능한 최고의 건강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건강권’의 문제의식을, ‘질병권’의 관점에서 다시 읽어보면 이렇다. 건강해야만 사회 참여가 가능한 것인가, 건강하지 않은 사람도 사회 참여가 가능할 수 있어야 좋은 사회인 것 아닐까. 건강하지 않으면 꼭 불행해지는 것인가, 질병이 있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닐까.

건강은 의료적으로 ‘정상’ 수치에 부합하는 것을 상정하지만, 사실 ‘정상’에 다다를 수 없는 몸이 수두룩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회복되지 않는 아픈 몸’은 생산성과 효율성이 떨어지는 ‘쓸모없는 몸’이자 사회의 짐이 된다. ‘삶의 전제조건이 건강’인 사회에서, ‘건강’은 아픈 몸들이 간절히 갖고 싶은 대상이자 절망의 이유가 된다. 아무리 노력해도 ‘표준의 건강’을 쟁취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삶의 전제조건이 건강이라는 말은 아픈 몸들을 철저히 패배자로 만들 뿐이다.

이런 현실을 직시할 때마다, 아무리 노력해도 건강을 회복하기 어려운 이들 앞에서 ‘어떻게 더 건강해질 수 있는가’라는 공회전 같은 질문을 들이미는 게 더욱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아픈 몸으로도 평등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반복해서 힘주어 말하게 됐다. 건강을 지키며 살기 어려운 사회이기 때문에, 더욱 강박적으로 건강을 추구하는 한국 사회라는 것을 다시금 떠올렸다. 누구나 어디서나 건강을 말하고, 건강 강박이나 건강염려증에 시달리는 개인이 많은 사회이니, 건강이라는 단어 자체를 조금 덜 쓰는 게 나을 듯했다. 건강이 아닌 질병을 중심으로 말할 때, 건강에 대한 강박과 집착으로부터 조금이나마 더 거리를 둘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도 ‘건강’권보다는 ‘질병’권이라는 말을 더 적극적으로 하게 됐다.

기본적으로 건강권이 전제하는 문제의식은 인류가 더 나은 건강을 쟁취하는 것, 즉 “(아픈 몸을 포함한) 시민을 어떻게 건강하게 만들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으로 보인다. 당연한 말이지만, 건강권 사고의 중심에는 건강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건강한 몸을 사회의 표준 몸으로 설정하고, 임시적이고 예외적인 상태로서 아픈 몸을 본다. 따라서 빠르게 ‘건강한’ ‘정상적’ 상태가 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하는 의무가 부과되고, 의료적 치료와 회복을 다 하고 난 이후에야 삶의 권리를 주장하길 권장받는다.

반면 질병권의 문제의식은 건강해야만 행복할 수 있다며, 행복의 전제조건으로 건강을 말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즉 “회복되지 않는 아픈 몸으로도 어떻게 온전하고 행복한 삶이 가능하도록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다. 질병권 사고의 중심에는 질병이 있다. 아픈 몸을 사회의 기본 몸으로 설정하며, 질병을 겪는 상태도 삶의 ‘정상적’ 시기로 본다. (생로병사는 모두 삶의 정상적 과정이다!) 건강권이 건강 증진을 중심으로 움직인다면, 질병권은 건강 추구와 치료를 누락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아픈 몸으로도 온전히 존재하는 것 자체를 중시한다.

아픈 몸을 표준으로 보면

다시 ‘건강중심사회’라는 단어로 돌아와보자. 기본적으로 ‘○○중심사회’라는 것은 특정 조건만을 정상, 표준, 보편으로 두고 그것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것을 의미한다. 비장애인중심사회라는 것은 비장애인의 몸을 우리 사회 기본 몸으로 설정하고, 비장애인 중심으로 사회가 설계되며, 장애인조차 비장애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는 사회다. 남성중심사회라는 것도 남성의 경험이 보편이고 정상이며 여성의 경험은 특수라는 것이고, 여성조차 남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에 익숙하다는 의미다. 결국 건강중심사회라는 것은 건강을 중심에 두고, 건강한 사람을 기본 몸으로 설정하며, 건강한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읽는 사회를 의미한다. 반면 질병권은 건강한 사람의 눈으로 정의되어 있는 건강중심사회에서, 아픈 몸을 기본 몸으로 두고 아픈 몸의 눈으로 세상을 다시 읽어보자는 제안이기도 하다.

젠더, 돌봄, 코로나19 등을 질병권으로 읽는다면 어떻게 다른 사유를 만나게 될까? 젠더에 따라 잘 아플 권리를 주장할 때 필요한 게 많이 다르다. 지난 몇년간 아픈 몸들을 인터뷰해왔는데, 남성과 달리 여성은 돌봄을 받지 못해서 힘들었다는 내용이 많다. 실제 통계를 봐도 기혼 남성 암환자는 아내에게 간병받았다는 경우가 절대다수지만, 기혼 여성 암환자들은 셀프 간병 비율이 가장 높다. 우리가 질병 관련 정책에서 의료접근권이나 경제적 지원을 중심으로 논의하고, 돌봄에 관해 덜 논의해온 것도 남성 환자 중심으로 사고해온 결과임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돌봄의 경우도 아픈 몸을 사회의 표준 몸으로 설정한다면, 집과 일터에서 돌봄이 공기처럼 흐르는 사회를 구상하게 될 것이다. 이는 더 많은 돌봄노동자와 더 커지는 돌봄시장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돌보는 몸으로 ‘진화’해가는 것을 의미한다. 코로나19의 경우도 감염되지 않는 게 최선이지만, 감염되어도 적절한 돌봄을 받을 수 있고 감염자를 잘 치료하면서 유지할 수 있는 사회는 어떻게 가능할까를 고민할 것이다. 이는 단순히 치료제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초점이 ‘아파도 괜찮은 사회’로 이동되면서 안전망을 중심으로 프레임 전환이 되는 것을 말한다. 젠더, 돌봄, 코로나19를 포함해서 질병권으로 읽었을 때, 다르게 보이는 세상에 대해 차차 더 자세히 말해 나갈 것이다.

질병권으로 다시 만나는 세계가 우리를 구원하지는 못할지라도, 다른 세계를 향한 일말의 상상력은 열어줄 수 있지 않을까.

▶ 여성, 평화, 장애 관련 운동을 넘나들며 활동하는 탈식민페미니스트. 국제 현장 연대 활동에서 건강이 손상된 뒤 투병 경험을 정치사회적으로 접근한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를 썼다. 알티브이(RTV) 시사다큐 <나는 장애인이다>와 여러 다큐멘터리를 연출했다. 공저로 <라피끄: 팔레스타인과 나> <비거닝> <포스트 코로나 사회>가 있다. 아픈 몸을 둘러싼 사회·경제·정치적 문제를 다룬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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