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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번아웃, 남 인정 없이 못 사는 ‘비대한 공적 자아’의 최후

등록 2021-01-16 15:29수정 2021-01-16 22:36

[토요판] 이병남의 보내지 못한 이메일
(13) 번아웃이 걱정될 때

일어나기 힘들고 집중력 저하
누구나 에너지는 한정돼 있어
몰입으로 생산성 확보 가능

외부 인정 필요한 ‘공적 자아’
그보다 자족하는 ‘사적 자아’
사적 자아가 더 성장해야
쓰러진 공적 자아 일으켜

노동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면서 사적 자아를 키우는 방법은 나만의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게티이미지뱅크
노동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면서 사적 자아를 키우는 방법은 나만의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게티이미지뱅크

Q. 회사 생활 20년차입니다. 밤낮없이 일하다 보니 일중독이라는 얘기도 곧잘 듣습니다. 최근에는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고 일할 때 집중력이 떨어지는 경험을 합니다. 번아웃이 아닌가 싶은데, 함께 일하던 동료 몇몇이 큰 병까지 걸려 더욱 불안해졌습니다. 새해에는 일중독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미국 생활 15년을 정리하고 귀국해 1995년 1월3일 첫 출근을 했습니다. 새벽같이 출근하고 저녁 늦게 귀가하는 대기업 임원으로서의 회사 생활이 시작된 것이지요. 주5일 근무는 엄두도 내지 못하던 때라 토요일도 평일과 다름없이 출근해 점심식사 후에나 퇴근이 가능했습니다. 갑자기 생활방식이 완전히 바뀐 셈이었는데 이에 적응하는 것이 보통 힘든 게 아니었습니다. 꽉 짜인 생활 속에서 생존해야 한다는 강박에 저도 힘들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아빠를 그리워하며 아이들도 울며 지내야 했습니다.

미국의 대학원생, 교수로 살 때에는 아이들을 유치원, 학교에도 데려다주고 여름방학에는 국립공원을 다니며 캠핑도 했답니다. 공부하고 가르치는 절대적 시간은 길었지만 가족들과 일상을 보내도록 제가 시간을 조절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한창 일하고 아이들을 키워야 하는 나이였기 때문에 무척 바빴지만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아이들의 성장을 곁에서 똑똑히 볼 수 있었고, 그래서 저 나름대로 뿌듯하고 즐거웠던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대기업의 일정은 아침부터 밤까지 빼곡히 차 있어 가족과 함께할 틈을 낼 수 없었습니다. 하루 쉬는 일요일만이라도 아이들과 성당에 가고 점심을 먹는 오랜 전통을 유지해보려고 애썼습니다. 하지만 예전과는 너무도 다른 생활이 이어졌지요. 나만의 시간은 꿈꾸지도 못했습니다. 어느 날 가까이 지내던 집안 어른이 걱정스레 말씀하셨습니다. “자네도 좀 쉬어야 할 텐데….” 그 말씀에 저는 갸웃했습니다. 나 혼자 쉬는 건 사치라고만 생각했거든요.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는 정말 나중에야 깨달았지요.

일하는 방식을 개선하는 일

우리가 지닌 에너지는 한정돼 있고, 따라서 여기저기로 분산하면 낭비가 생깁니다. 일이 많고 생각이 복잡할수록 일상의 리듬은 단순화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지속가능한 회사 생활을 위해 ‘나만의 원칙’을 세웠습니다. 첫째, 회식을 하더라도 2차는 가지 않는다. 직원들과의 친밀감을 높이려고 2차 노래방에서 부를 노래를 열심히 배우는 임원들도 있었지만, 저는 그 부분을 포기했습니다. 노래를 못 부르고, 무엇보다 체력이 받쳐주질 않았습니다. 대신 근무시간에 직원들과 눈맞춤하고 마음을 다하며 가까워지려고 했습니다.

둘째, 밤 10시를 통금시간으로 정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잠을 충분히 자야 하는 체질이라 다음날 아침 머리가 맑도록 자정 전에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가까운 지인과의 저녁식사 자리라도 양해를 구하고 일찍 일어났습니다. 셋째, 조찬강연 모임을 가지 않았습니다. 처음 몇번은 분위기에 휩쓸려 참석했지만 네트워킹이 주된 목적이라는 걸 알고는 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배우고 싶은 영역이 생기면 따로 전문가를 찾아가서 만나는 게 더 효과적이더군요. 조찬모임을 갈 시간에 홀로 명상하거나 집 근처 산에 오르는 게 훨씬 도움이 됐습니다.

일이 많다고 무작정 일하는 시간을 늘리는 것은 상책이 아닙니다. 양보다 질로 승부해야 합니다. 선진국에 진출해서 현지법인을 운영할 때 생기는 공통적인 문제 중 하나가 한국 파견 직원과 현지 채용 직원의 근무 형태가 아주 다르다는 점입니다. 한국 직원들은 밤늦게까지 일하는 반면 현지 직원은 칼퇴근하는 것이었지요. 본사와의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한데 시차가 있어서 늦은 시간까지 일해야 할 때도 있는데, 그 일은 한국 직원의 몫입니다.

인화원장 시절 스웨덴에 가보니 현지 직원들은 오전 9시에 출근해 오후 3시면 퇴근하더군요. 현지법인 관리담당에게 근무시간이 이렇게 짧은데 운영이 되냐고 물었습니다. 스웨덴 법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그는 답하면서, 현지 직원들은 출근하면 100% 일에 몰입한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면 신문을 본다거나 인터넷 사이트를 돌아다닌다거나 하는 일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지요.

그는 한마디 더 덧붙였습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우리같이 오래 일하면 한국 회사는 스웨덴 회사와 절대 경쟁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지금같이 덜 일하는 게 우리한테는 기회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목표로 해야 할지를 가르쳐주는 말입니다. 사실 노동생산성이라는 것은 투입된 노동의 양과 질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기술과 자본 그리고 기업문화에도 영향을 받습니다. 노동시간을 줄이더라도 일하는 방식을 개선하고 일에 대한 몰입도와 집중도를 높임으로써 생산성을 제고할 수 있는 것이지요.

타인의 인정과 다른 충만감을

일중독자에 대해서 회사에서는 걱정을 해주는 듯하면서도 은근히 치켜세우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위험한 발상입니다. 심지어 고성과자의 경우 심리테스트 결과 자신의 스트레스 수준이 동료들보다 낮다고 진단받으면 안심하기는커녕 내가 혹시 일을 덜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강박적 우려를 하기도 합니다.

일중독자는 일을 통한 성취와 더불어 그에 대한 회사와 사회의 인정에 매우 민감할 수 있습니다. 자칫 타인의 인정을 지나치게 추구하게 되면서 다른 방식으로는 내적 충만감과 심리적 이완을 경험하기 어려워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런 이들은 높은 수준의 긴장과 만성적 스트레스에 갇혀 있기 쉽습니다.

일중독자의 경우 그의 공적 자아는 발달해 있지만 사적 자아는 미발육 상태에 머문 경우가 많습니다. 사적 자아는 외부의 성취와 인정이 아니라 나 자신 그 자체로서 아름답고 훌륭하고 또 사랑받고 있다는, 관계 속에서의 체험에서 성장하는 것이지요. 모든 에너지를 공적 자아의 실현에 쏟아부어 많은 사회적 성취를 이루었지만 간혹 실패의 순간이 오기도 하는 법입니다. 지속된 높은 수준의 긴장도로 인한 극단적인 스트레스 상황 속에서 충분히 성장하지 못한 사적 자아는, 쓰러진 공적 자아를 도와 일으켜 세우지 못합니다. 자아의 한 영역에서 불이 났는데 끌어 올려 불을 끌 물이 없는 위험한 상황이지요. 에너지를 소진한 번아웃 상태가 되거나 큰 병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노동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면서 사적 자아를 키우는 방법은 나만의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하지만 회사 생활을 할 때 대다수는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없습니다. 배우자와 자녀들이 있는 경우에는 특히 그렇지요. 인화원장으로 일할 때, 그래서 ‘자기성찰여행’을 기획했습니다. 프로그램 이름이 말하듯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홀로 있을 수 있는 시간을 회사가 공식적으로 지원한 것입니다. 지방의 산사 등 평소 가고 싶었던 곳들을 3박4일 혼자 여행할 계획을 내면 교통비, 숙박비를 지원해주었습니다.

1순위 대상자는 배우자와 자녀가 있는 남녀 직원이었습니다. 배우자에게 감히(!) 혼자 여행 가겠다고 말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일차 목표였습니다. ‘회사 의무사항이라서 안 가면 승진을 못 한다’고 말하도록 말이지요. 첫해 신청자는 한명밖에 없었지만 그가 참 좋은 시간이었다고 주변에 말한 덕에 다음해에는 10명 가까이로 늘었습니다.

개인마다 회사마다 형편이 다릅니다. 그러나 주어진 조건 속에서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표현을 썩 좋아하지 않습니다. 일과 삶은 배타적으로 다른 영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은 삶의 일부, 다시 말해 부분집합이니까요. 그렇기에 일이 빠진 삶이란 공허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부분집합으로서의 일 때문에 삶이 망가져서도 안 되겠지요. 2021년 일이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 수 있도록 ‘나만의 원칙’을 정해봅시다.

▶ 이병남.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조지아주립대에서 경영학을 가르치다 1995년 엘지(LG)그룹 임원으로 입사해 인사, 교육, 노사관계 및 지배구조 업무를 맡았다. 2008년 사장으로 승진하면서 인화원장으로 부임해 8년간 원장직을 수행하고 2016년 퇴임. 인간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지만 이를 풀어낼 해법 역시 인간에게서 비롯된다는 그의 경영 철학은 저서 <경영은 사람이다>(2014)에 담겼다. 인간 존중이라는 경영의 본질을 잊지 않고 21년간 숨 가쁘게 현장을 누벼온 그가 일터에서 겪는 우리의 고민을 함께 나눈다. 4주에 한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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