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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서울 월세 출금기’였던 나, 김포서 ‘사람 대접’받는 기분이 들었다

등록 2021-06-05 17:51수정 2021-06-05 18:08

[토요판] 이런 홀로
나는 왜 김포 행복주택으로 이주했나
내 안에, 경기도에 대한 심리적 거리감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됐다. 휴대전화를 꺼내, 김포 행복주택 복도에서 찍은 노을 풍경 사진을 봤다. 경기도 인프피 제공
내 안에, 경기도에 대한 심리적 거리감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됐다. 휴대전화를 꺼내, 김포 행복주택 복도에서 찍은 노을 풍경 사진을 봤다. 경기도 인프피 제공

서울 어느 구석의 부동산 사무실. 6년여 지난 일이지만, 그 사람을 처음 만난 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햇볕과 바람이 적당한 날이었다. 중개를 맡은 두 중년 여성은 내게 “잘 선택했어요. 살기 괜찮은 곳이야”라는 말을 반복했다. 그가 도착하기 전까지 사무실에는 잔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크흠.” 기침 소리와 함께 등장한 그는, 인사를 나누고 의자에 앉자마자 ‘본론’으로 들어갔다. “계약 조건이 하나 있어요. 반드시 들어줘야 해.”

그의 조건은 ‘월세 세액·소득공제 신청을 하지 말 것’. 홀로 사는 내가, 연말정산 때 정부에 세액 조정을 요청해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항목 중 하나였다. 이런 신청을 원치 않는 집주인들이 더러 있다는 얘기를 온라인에서 봤지만, 실제 내가 겪은 건 처음이었다. 중개인들이 말없이 내 얼굴을 살폈다. 굳은 표정이었을 것이다. “그게… (제가 공제받는 게) 적은 돈은 아니어서요.” 훗날, 나는 차라리 이때 내가 “제가 신청 안 하면 월세나 관리비 깎아주시나요?”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그랬으면 그의 다음 말들을 듣지 않았을 수 있으니까.

6년 전 회사 가까운 집 계약날
월세 세액공제 신청 말라며
“집 많아 손해”라던 집주인에게
관리비 깎는 것밖에 못했던 나
이후로도 계속된 그와의 ‘밀당’

“아니, 아가씨. 내가 말이야, 집이 좀 많아. 그래서 내가 주택 임대하는 게 국가에 다 잡히면 (내가) 입을 손해가 커. 내 손해에 비하면 아가씨 손해는 엄청 작은 거라고.” 그의 얼굴에 떠오른 흐뭇한 미소는, 그가 어떤 ‘악의’를 품고서 하는 말은 아니라는 인상을 줬다. 오히려 너무 자연스러워서, 나는 잠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집주인인 자신의 손해와 세입자인 나의 손해를 동등하게 비교하는 그런 사고방식은 어디에서 비롯했나.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하나. 일단 주어를 분리시키자. “아.저.씨.입.장.은.알.겠.는.데.저.의.입.장.에.서.는.작.은.돈.이.아.니.거.든.요.” 한 손을 들어 그와 나를 번갈아 가리키며, 당신과 내가 서로 다른 존재임을 강조해봤다. 반응은 중개인들로부터 왔다. “아유~. 사장님이 관리비를 좀 깎으시면 되겠네요.” “그래요, 관리비에서 얼마를 뺄까요?”

밀당이냐, 사서 고생이냐

3년 뒤, 문제의 ‘그 집’에서 경기 김포시에 있는 행복주택 이주를 고민하던 때도, 그와 계약하던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나는 그날 이후로도 차곡차곡 추가로 쌓인 그와의 다양한 ‘추억’을 곱씹으며, 노트를 펼쳤다. 그리고 ‘김포 행복주택 이주의 장단점’ 표를 그린 페이지를 찾아, ‘장점’ 부분에 새로 한 줄 써넣었다. ‘집주인과 ‘밀당’할 필요 없음.’ 행복주택은 엘에이치(LH)나 에스에이치(SH) 등에서 청년·신혼부부 등을 대상으로 내놓은 공공임대주택의 하나다. 공기업과 임대차 계약을 맺는 것. 입주자 모집 신청 결과, 당첨이었다. 결단을 내려야 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서울이 생활권인 내가 김포에 있는 행복주택을 신청한 이유는 친구의 권유에 혹해서였다. 김포에 직장을 둔 친구는 이미 행복주택에 입주해 있었다. 그는 “살아보니 좋다, 가까이 살자”며 추가 입주자 모집 신청을 권했다. 모바일 지도에 회사와 행복주택 위치를 입력해봤다. 출퇴근 시간이 편도로 1시간50분, 왕복으로는 4시간 가까이 될 것으로 나왔다. 현재 출퇴근 시간의 10배. 이런 경우를 두고 ‘사서 고생한다’고 표현하는구나 싶었다. 친구에게 “출퇴근하다 죽을 듯”이라고 말했다.

친구 덕에 신청한 행복주택 당첨
출퇴근 왕복 4시간에 고민했지만
현관 열면 눈에 들어오는 노을과
수익 위한 ‘공간 영끌’ 덜한 모습에
서울에서 김포로 이주를 결심했다

그래도 ‘동네 친구’에 대한 미련은 남았다. 각자 원룸에 살아도, 치킨 한마리 시키면 홈웨어에 슬리퍼만 신고 나가 치킨을 함께 나눠 먹을 수 있는 사람. 그런 미련에 더해, 행복주택으로 마음이 더 기운 건 동네 풍경 때문이었다. “일단 한번 와서 보라”는 친구의 성화에, 이동 거리 체험도 할 겸 행복주택을 찾아갔다. 장시간 이동은 예상대로 지루하고 피곤했지만, 고층 빌딩이 적어 시야가 탁 트인 풍경은 예상외로 마음에 쏙 들었다. 복도식 아파트인 행복주택에서, 해가 질 무렵 현관문을 열어놓고 들판을 감싼 노을을 가만히 바라봤다. 매일 이런 풍경을 누릴 수 있다면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인구 밀도가 낮아서 그런지, 동네에서 느껴지는 시간의 리듬이 한결 부드러웠다.

행복주택 내부도 나쁘지 않았다. 원룸이지만, 민간에서 만든 원룸과 달랐다. 만듦새가 뛰어나다는 의미는 아니다. 서울에서만 월세살이 13년차, 평균 2년에 한번 이사하면서 매번 월세방을 수십 군데 돌아다녔다. ‘세상에 이런 집이?’라는 감탄사가 절로 튀어나올 기기묘묘한 방들이 널렸다. 가구를 두는 데 큰 상상력을 발휘해야 할 세모꼴 구조나, 창문을 열면 흙벽이 등장하는 방은 가소롭다. 하나의 방을 둘로 쪼개서 소음에 취약한 곳, 화장실 변기를 본 순간, ‘볼일 볼 때 백퍼센트 무릎이 벽에 닿겠다’ 싶은 방도 수두룩하다. 임대사업자가 임대료를 최대치로 뽑아내기 위해, 공간 활용에 무척이나 고심한 결과가 아닐까. 상대적으로, 행복주택의 원룸 공간에는 수익률을 위한 공간 ‘영끌’ 흔적이 민간보다 덜해 보였다. 방 안에 들어선 순간 ‘여기서 월세를 최대한 많이 뽑아내겠어!’라고 아우성치는 듯한 무언의 메아리가 줄어드니, 여러모로 편안했다. 공간으로부터 ‘월세 출금기’ 아닌, ‘사람 대접’ 받는 느낌이랄까.

장거리 출퇴근 해결책은 정신승리뿐?

인생은 저울질의 연속이다. 서울에서 김포 행복주택으로의 이주를 고심할 당시, 나의 저울에는 십수년 민간 월세방을 거치며 겪은 고단한 기억, 밀도 높은 서울살이의 피로함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다. 다만 ‘장거리 출퇴근’이라는 단점이 다른 모든 장점을 상쇄할 수 있을 만큼 강력했다. “길바닥에 시간과 건강과 돈을 모두 내버리는 일”이라는 경험담이 넘쳤다. 나는 다행히(?) 주 5일 매일 일정한 시간에 사무실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직종이었지만, 그래도 최소한 주 3일 이상 서울에서 일을 봐야 했다.

‘서울을 벗어난다’는 데서 비롯하는,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는 공포감도 느꼈다. 경기권에서 출퇴근하는 동료들을 종종 봐왔지만, ‘내 일’로 여긴 적은 없었다. 내 안에, 경기도에 대한 심리적 거리감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됐다. 휴대전화를 꺼내, 김포 행복주택 복도에서 찍은 노을 풍경 사진을 봤다. 그 바람, 그 온도, 그 리듬을 다시 감각해보려 했다. 친구와 그의 고양이 사진도 꺼내 봤다. 내가 그들 곁에서 지낼 수 있는 시간이 앞으로 얼마나 될까.

애써 ‘장거리 출퇴근 장점’을 열쇳말로 인터넷 검색을 해봤다. “장점은 없다”는 얘기가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일부 해외 블로그에는 ‘장거리 출퇴근 시간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만족도가 다르다’는 내용이 나왔다. 해결책은 ‘정신승리’밖에 없구나. 노트를 펼쳐 ‘김포 행복주택 이주의 장점과 단점’ 표를 찾고, 펜을 집어 들었다. ‘장점’ 부분에 아래 내용을 꾹꾹 눌러썼다. ‘장거리 출퇴근에 도전. 내가 버틸 수 있는 출퇴근 시간의 경계는 어디까지인지, 몸으로 알아본다.’ ‘서울 밖, 경기도민으로 살아볼 기회.’ ‘회사와 거리두기.’ ‘장롱면허 탈출 계기?’ 세상에 ‘사서 고생하기 대회’가 존재한다면, 내 결정은 빠르게 순위권에 진입할 수 있을 텐데. ‘출퇴근길에 사용할 전자책 리더기를 사야지’, 생각하며 표의 ‘장점’ 부분을 감싸는 큰 동그라미를 그렸다.

경기도 인프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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