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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과로사, 이제 산재로 가야죠…‘개인의 잘못’ 아닙니다”

등록 2021-06-15 04:59수정 2021-06-15 07:30

9일 출간 <과로의 섬> 번역 장향미씨 인터뷰
산재 제기조차 못하고 잊혀진 과로사 여전
“솜방망이 노동법 처벌이 기업 탈법 부추겨”

신간 &lt;과로의 섬&gt;(나름북스)을 번역한 장향미씨가 14일 오후 서울 석촌호수에서 &lt;한겨레&gt;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신간 <과로의 섬>(나름북스)을 번역한 장향미씨가 14일 오후 서울 석촌호수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대만의 한 반도체 회사 엔지니어인 스물아홉살 쉬샤오빈은 쉬는 날 없이 하루 10∼19시간씩 일했다. 퇴근 후에도 휴대전화를 붙들고 회사 지시를 기다리기 일쑤였다. 밤새워 야근을 하던 어느 날, 그는 자기 방 책상에 엎드린 채 세상을 떠났다. 가족들은 격무로 인한 과로사라고 주장했지만 회사는 “업무와 연관 없는 병사”라며 책임을 회피했다.

최근 출간된 대만의 과로 실태를 다룬 책 <과로의 섬>(나름북스)에 나온 과로사의 사례다. 이 책은 장향미(42)씨가 번역했다. 그는 온라인 강의업체에서 일하던 동생을 3년 전 과로자살로 떠나보낸 과로사 유가족이다. 게임회사 15년 차 직장인 장씨 자신도 격무와 괴롭힘 문제가 잇달아 불거지는 정보기술(IT) 업계에 몸담고 있는 노동자다.

14일 서울 송파구 송파동 한 카페에서 만난 장씨는 연평균 노동시간이 2000시간에 달하는 ‘과로의 섬’ 대만의 이야기가 “한국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해도 전혀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장씨는 ‘주 최대 52시간 노동 시간제’ 도입으로 노동시간 상한선을 둬도 기업들의 직장 과로가 ‘현재 진행형’이라고 말한다. 지난달 네이버에서는 한 직원이 격무를 호소하는 메모를 남기고 극단적인 선택을 한 데 이어, 카카오는 임산부 등에게 불법으로 시간 외 근무를 시키다가 적발되기도 했다. 그는 최근 IT업계에서 불거지는 노동 문제를 거론하며 “동생이 다니던 에스티유니타스에서도 동생의 죽음 이후 고용노동부 근로감독을 통해 근로기준법 위반이 무더기로 드러났지만, 지난해 감독에서 그때와 비슷한 내용이 적발됐다. 과로사로 이슈화되지 않을 뿐 격무 중 숨지는 직원들은 다른 회사에서도 여전히 많다”고 지적했다.

장씨는 ‘소수에 집중된 직장 내 권력’을 과로 문제의 근본 원인으로 짚었다. 창업자의 ‘개인 기량’이 회사 성패를 결정하던 시절의 의사결정 구조와 수직적인 상하 관계가 여전히 남아 노동자들을 옥죄고 있다는 것이다. 장씨는 “과거 IT기업들의 모습은 한 명의 ‘왕’이 직원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체계였는데 이 기업들이 오늘날 대기업이 돼서도 이런 문화를 버리지 못했다”며 “이런 환경에서는 직원들이 권리를 가진 사람이기보다는 ‘부하’로 남는다”고 말했다. 그는 “한정된 자원으로 빠른 성장을 해야 하는 후발주자 회사일수록 이런 현상이 심각하다”며 “IT업계만이 아닌, 압축성장을 겪은 한국 기업문화 전반의 문제”라고 덧붙였다.

근로기준법 등 노동법규 위반에 대한 감독 당국의 솜방망이 처분도 탈법적인 노동 관행을 부추긴다고 장씨는 지적했다. “다른 과로사 유가족들을 만나며 매번 느끼는 것은 한국 노동법은 액자 속에 보기 좋게 걸어놓은 그림 같은 법이라는 점입니다. 고용부가 과로사 발생 사업장을 근로감독해 위반 사항을 대거 적발해도 벌금형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드물어요. 기업 입장에선 ‘지켜야 할 법’으로 인식되지 않는 것입니다.” 실제로 에스티유니타스의 경우 지난 2019년 노동부가 근로기준법 위반 혐의 등으로 검찰에 송치했지만 기소유예 처분이 나왔다. 회사가 유족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했고, 재발 방지책을 내놓는 등 뉘우치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장씨는 과로의 굴레를 끊기 위해서는 과로를 ‘산업재해’로 보는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기업이든 정부 당국이든 격무로 인한 죽음은 ‘개인의 잘못’으로 치부하는 관행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장씨는 “유가족 중에는 과로로 가족을 잃고도 ‘가족이 오래 몸담았던 회사에 폐가 되는 것 같다’며 산재 신청조차 하지 않으려는 분들도 있다”며 “특히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자살의 경우 가족들이 과로자살 사실을 주변 사람에게조차 알리지 않으려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정부가 과로사에 대한 예방 활동을 펴고 그로부터 구제받을 수 있는 길을 국민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알코올 중독이나 마약 중독을 막는 것이 정부의 일인 것처럼 ‘일 중독’ 방지에도 나서야 해요.”

과로가 회사로부터 입은 ‘피해’라는 것이 인식될 때 직원들이 서로를 연대의 대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장씨의 생각이다. ‘내게도 언제든 이런 피해가 닥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파편화 돼 있는 노동자들에게 자기 권리에 대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사내 권력 집중 문제를 해결하는 시작점도 될 것이라고 장씨는 강조했다. 장씨는 지금도 반복되는 과로사 피해자 가족들에게 “여러분의 잘못이 아니다”라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고 했다.

“과로사는 사회 구조가 만들어낸 비극이지 당사자나 가족들이 부족해 생긴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힘들지라도 피해를 적극적으로 알리고, 그런 피해를 입힌 사람들이 정당한 처벌을 받도록 나서기를 응원합니다.”

과로사 유가족인 장향미씨가 번역한 &lt;과로의 섬&gt;(나름북스) 표지. &lt;한겨레&gt; 자료사진.
과로사 유가족인 장향미씨가 번역한 <과로의 섬>(나름북스) 표지. <한겨레> 자료사진.

천호성 기자 rieux@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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