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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은 나를 구원할 수 있을까

등록 2021-06-10 04:59수정 2021-06-10 21:23

강나연의 자는 것도 일이야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정작 내가 잠을 원하지 않는 건 아닐까? 결과가 어찌 되든 잠을 자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최선을 다했노라 자족할 요량으로 스스로 불면을 선택한 건 아닐까? 심지어 불면뿐 아니라 그 때문에 겪는 고통, 말하자면 내가 이토록 괴로워하고 있음을 자랑스러워하는 건 아닐까?

처음 느낀 지진이었다. 꿀렁대는 매트리스, 솟구치는 이불. 비명을 지르며 달려가 반사적으로 불을 켰다. 새벽 3시. 평화로운 풍경에 맥이 탁 풀렸다. 아아, 꿈이었구나. 0.5초 전까지 요란법석이던 내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모든 건 제자리에 얌전히 있었고, 얌전치 않은 건 옆에 누운 R뿐이었다. R의 몸부림이 먼저인지 지진 꿈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 집 매트리스가 격하게 꿀렁대는 것만은 분명했다. 이젠 정말 매트리스를 바꿔야 할 때라고 생각하며 달콤한 잠에 다시 빠져들었다…는 건 희망 사항이고, 그렇게 잠에서 홀라당 깨고 말았다.

성인 3명 중 1명은 불면증이라는 통계가 있다. 나는 그중 한 명이다. 쉽게 잠드는 건 고사하고 너무 쉽게 깬다. 한번 깨면 다시 잠들지도 못한다. 하루 평균 3시간 반 취침에, 자는 것도 아니고 안자는 것도 아닌 렘(REM)수면이 일상이다. 불면은 지나친 카페인 때문일 수도, ‘맵부심(매운 음식 잘 먹는 걸 과시하는 심리)’을 부리다 망가진 위장 때문일 수도, 저녁에 본 영화의 잔상이 너무 강렬해서일 수도 있지만, 내 불면은 지난해 7월 새 직장에 입사하면서부터 시작됐다. 회사의 실적을 기록한 엑셀 시트를 볼 때마다 멘탈은 알루미늄처럼 얇아졌고, 요동치는 페이지뷰(PV)를 볼 때마다 불안은 철근처럼 강해졌다. 24시간 추적 가능한 소셜미디어 알고리즘과 실시간으로 분석해야 마땅한 (것이라고 압박감이 드는) 데이터는 나를 불면의 세계로 이끈 매혹적인 전도사였다.

잠이 오지 않을 때 가장 먼저 시도하는 건 고전적인 방법이다. 양이나 닭, 염소 같은 걸 2천 마리씩 거꾸로 센다. 그래도 잠들지 못하면? 명상 앱을 켜고 수면 명상을 한다. 그조차 꽝이면? 그럴 땐 불면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잠을 못 자는 것보다 잠들지 못해 불안해하거나 자괴감을 느끼는 게 훨씬 더 해롭다는 걸 알고 있다. 나는 밤이건 새벽이건 회사 계정에 접속함으로써 불면에 투항하곤 했다. R은 그런 나를 보면 안쓰러움인지 한심함인지 모를 표정을 짓고는 이내 다시 코를 골았다.

우렁찬 코골이를 시전하는 R의 콧구멍을 꿰매고픈 충동에 자주 사로잡혔다. R은 머리만 대면 자는 위인이었다. 욕실이나 공원 벤치에서도, 뮤지컬공연 브이아이피(VIP)석에서도, 말이 좋아 게스트하우스지 귀신이 출몰하지 않는 게 신기한 여관방에서도, 심지어 지하철에 선 채로도 잘만 잤다. 나는 내심 그런 R이 부러웠다. 그의 예민하지 않은 성격이, 경쟁적이지 않은 세계관이, 꼬인 구석이라고는 없는 둥글둥글함이 부러웠고, 샘났으며, 때로는 미웠다. 왜 쟤는 되는데, 나는 안 될까. 왜 쟤는 자는데, 나는 못 잘까. 숙면이 능력이라면, 불면은 무능력이었다. 걱정해봤자 달라질 게 없는 현실과 통제 불가능한 미래를 놓지 못하는 무능력.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더는 참아줄 수 없었다. 원흉을 제거하자!

주말 아침이 밝기가 무섭게 R을 흔들어 깨웠다. R을 이끌고 도착한 곳은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을 내세우는 한 매트리스 매장이었다. 매트리스 종류는 충격적일 정도로 많았다. 직원은 지금 쓰는 매트리스가 하드한 타입인지 소프트한 타입인지 묻더니 제품 하나를 추천해주었다. 나는 그 위로 몸을 던져 뒹굴어보았고, R에게도 옆자리에서 마구 움직여보라고 했다. ‘유레카!’ 왜들 그렇게 이 회사 제품을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다. 광고에서처럼 흔들림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으나, 우리 집 매트리스와는 확연히 달랐다. 캐시미어가 함유돼서인지 온몸에 촉촉하게 감기는 느낌도 최고였다.

돌이켜보면 그때 감탄사를 연발한 것이야말로 우매함의 극치였지만, 그때만 해도 나는 제품에 홀딱 빠진 나머지 영혼도 팔겠노라는 티를 팍팍 내는 ‘호갱이’에 불과했다. 가격을 궁금해하는 내게 직원은 우리 집 침대 사이즈를 묻더니 사뭇 사무적이면서도 친절한 태도로 답했다.

“그 사이즈 매트리스는 맞춤형으로 하셔야 하고, 1천2백만 원입니다, 고객님.”

“네? 얼, 얼마요??” 작렬하는 동공지진을 피하기 힘들었다. 직원은 내 표정을 찰나에 포착하더니 기민한 태세전환에 돌입했다.

“그런데 고객님, 프로모션이 마침 오늘까지예요. 오늘까지만 20% 해드립니다. 포켓스프링이 들어간 메모리폼 베개, 면100% 퀼팅 이불 같은 사은품도 드려요. 좋은 기회이고, 건강을 위하는 길인데, 이 정도 가격은 투자할 가치가 있지 않을까요?”

직원의 말에 더욱더 힘이 빠지는 나. 이 정도 가격이라뇨. 할인해도 그 가격이라는 게 좌절 그 자체입니다만.

돌아오는 길에 격한 논쟁이 있었다. R은 밤마다 괴로워하는 나를 보는 게 고역이니 적금을 깨서라도 그 매트리스를 사자고 주장했고, 나는 아무리 꿀잠이 절박할지언정 경차 1대 값을 갈아 넣을 순 없다고 맞섰다. 평소 〈미움받을 용기〉로 유명한 정신의학자이자 프로이트와 상반된 주장을 펼친 알프레드 아들러를 떠받드는 R은 급기야 이런 궤변을 늘어놓았다.

“네가 지금 이러는 게 돈을 아끼기 위해서라고 생각해? 넌 스스로 불면을 원하는 거야. 네가 불면을 원하는 이유는 그게 너한테 유리하고 이득이 된다고 생각해서고.” 그건 아들러를 싫어하는 내 신경을 왕창 긁는 말이었고, 나는 속이 편하다 못해 시도 때도 없이 퍼지는 네가 불면의 괴로움을 어찌 아느냐, 웃기는 소리 좀 그만하라고 ‘버럭’했다.

숱한 날처럼 잠들고 싶은 욕망과 잠들지 못하는 절망감 사이에서 헤매던 그날 밤, 머릿속에는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어쩌면 R의 말이 맞는 게 아닐까? 정작 내가 잠을 원하지 않는 건 아닐까? 결과가 어찌 되든 잠을 자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최선을 다했노라 자족할 요량으로 스스로 불면을 선택한 건 아닐까? 심지어 불면뿐 아니라 그 때문에 겪는 고통, 말하자면 내가 이토록 괴로워하고 있음을 자랑스러워하는 건 아닐까? 그래서 지금 이렇게 불면에 얽힌 사연도 보란 듯 늘어놓는 거고.(아, 여기까지 쓰고 나니 급격히 졸음이 밀려온다.)

괜찮다, 괜찮아. 마감을 끝내면 원고료가 들어올 테니까. 나는 더욱더 ‘열일’할 것이고, 월급도 악착같이 모을 테니까. 낡은 매트리스를 탓하되 매트리스만 사면 불면이 해결될 거라는 희망을 품고 살 테니까. 그걸 위시리스트로 간직하며 돈을 모으는 한, 내가 불면을 적극적으로 해결하려 든다는 착각 또한 가능할 테니까. 일 때문에 불면이 생겼는데, 불면을 해결하려고 일하는 건 무슨 해괴한 논리냐고? 인정한다. 거지 같은 무한루프다. 어젯밤을 뜬눈으로 보낸 동지들이여, 그렇지 않습니까? 네?

△이 주의 ‘불면 극복’ 솔루션

1 명상 어플 뒤져 수면 명상하기 ★★★☆☆

2 동물 2~3천 마리씩 거꾸로 세기. 단위가 너무 커지면 뇌가 지나치게 각성돼 역효과 ★★☆☆☆

3 예산이 충분할 땐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을 자랑하는 매트리스’ ★★★★☆

4 메모리폼이나 라텍스 베개로 바꾸기. 인체공학적으로 굴곡진 경추 베개여야 함 ★★★★☆

5 연차 내고 연재 원고 쓰고 뻗어버리기 ★★★★★

강나연(〈허프포스트 코리아〉편집장)

**〈허프포스트 코리아〉 강나연 편집장이 3~4주에 한번 불면 극복 도전기를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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