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요단강을 어떻게 건너셨나요? 요단강은 얼마나 멀었습니까? 그리고 그 물은 얼마나 깊었습니까? 그 어두운 강, 요단강을 어떻게 다 건너셨나요? 여울은 얼마나 많고 바닥은 얼마나 험하더이까? 물살은 얼마나 세고 그 물은 얼마나 차갑더이까? 바윗돌은 얼마나 날카롭고 거칠더이까? 물속에 어머니를 해치려는 괴물들이 우글대지는 않더이까? 그 캄캄한 밤에 무엇에 의지해 강을 건너셨습니까? 그믐밤에 그 칠흑같이 어두운 강을 어떻게 살피셨으며, 무엇을 등대 삼으셨습니까? 그리고 누구를 동무하여 건너셨습니까? 어머니! 애통(哀慟)의 강, 애곡(哀哭)의 강이라는 그 강을 어머님이 어떻게 건너셨는지, 저는 아직도 그 길을 감히 가늠조차 하지 못하겠나이다.
작년 12월 말에 어머니께서는 허리뼈에 실금이 가는 바람에 동촌의 한 병원에 입원하셨습니다. 올해 초 문병을 갔을 때, 다리에 힘을 쓸 수 없어 휠체어를 타고 병원 생활을 하시는 걸 보고도 몇 달 고생하며 뼈만 붙으면 바로 퇴원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 후 금호강을 건너 수성구의 요양병원으로 옮기실 때에도 누나 집 가까이로 옮긴다 하니 잘된 거겠지 했습니다. 그 후에 대구에 코로나19 사태가 본격화되었고, 2월 말경 어머니가 계신 병원에서 간병사 중 한 분이 확진자로 나오고, 얼마 후 입원환자 중에서 한 분이 또 확진을 받더니 곧 어머니 옆자리의 할머니 한 분도 확진을 받았다 하더라는 얘기를 어머니로부터 들었지만, 어머니는 계속 음성판정을 받으셨고 병원에서도 어련히 알아서 최적의 조치를 하겠거니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확진 직전에, “허리가 아픈 줄은 모르겠는데 며칠 전부터 입맛이 없고 목이 자꾸 마른다”라고 하시더라는 얘기를 동생으로부터 전해 들었을 때도 어머니가 다시 신천을 건너 동산병원으로 가시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금호강과 신천 다음에 또 다른 강 요단강이 있을 줄을 어찌 꿈엔들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3월16일 늦은 오전, 어머니가 확진판정을 받았다는 연락이 대구시 북구보건소에서 왔다는 동생의 문자를 받았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한참 동안 어리둥절했습니다. 확진은 뉴스에서만 보는 남의 일인 줄 알았고, 대구에서 확진자가 속출하고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안전한 병원에 계시던 어머니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반신반의하며 어머님께 전화를 드렸을 때 어머님은 “같은 방에 있던 네 명 모두 8층으로 옮겼다. 나 하나만 옮기라 했으면 확진인가 눈치를 챘을 텐데 이유도 바로 이야기하지 않고 모두 옮기라 하니 뭔 일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고 있다. 아마 확진이라는 것 같다. 곧 다른 데로 옮긴다더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갑작스런 소식에 기가 막혔지만, 그러나 아무런 증상도 없다고 하시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셔서 저는 뭔가 착오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아무런 증상이 없다면 별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점심시간 이후에 북구보건소에 전화하여 확진이 사실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어머님이 계시던 요양병원에 전화를 해 보고는 그리 심하신 것은 아니지 않나 추측했습니다. 병원 관계자는 “지금은 입·퇴원을 자유롭게 할 수 없고 시에서 시키는 대로 이동하고 치료해야 합니다. 상태는 별것 없었고 열이 조금 있었는데 갑자기 확진으로 나왔습니다. 어머니부터 동산병원으로 이송할 계획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부터 옮긴다는 것은 어머니가 가장 위중하다는 뜻이냐고 물었더니, 꼭 그런 것은 아니고 보건소에서 옮기라는 순서대로 옮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믿고 싶은 대로 믿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확진자가 8000명이 넘었지만, 사망자는 70여 명에 그치고 있어 치사율이 1%도 안 되었으니 어머니는 당연히 나머지 99%에 들 것이라고 통계에 의지하고 숫자에 기댔습니다.
오후 늦게 성준이 엄마가 어머니와 통화했는데 모 한의원에 있다 하시더라는 말을 듣고는 확진자를 한의원으로 보냈다는 것은 상태가 가벼워 생활치료센터 같은 곳에서 격리생활만 하면 되는 정도로 생각하고 오히려 안심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안심은 잠시일 뿐이었습니다. 퇴근하여 집에서 전화를 드렸을 때, 어머님은 “차를 타고 와서 잘 모르겠다만 동산병원인 것 같다. 아주 큰 병원이다”라고 하셔서 그제서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정말 중한 상태가 아닌가, 겁이 덜컥 났습니다. 그런데 아까 성준이 엄마한테는 왜 한의원이라고 하셨냐고 했더니 “약봉지에 그렇게 적혀 있는 것을 옆 사람이 보고 말해 주어서 그렇게 얘기했다”라고 하셔서 그 말을 듣고는 걱정이 더 커졌습니다. 주변 상황을 제대로 살필 정신이 아니시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불편한 허리와 다리로 이동용 침대에 누운 채 창문조차 없거나 창밖도 잘 보이지 않는 구급차에 실려 이동을 하셨을 텐데 어디로 가는지, 얼마나 가는지를 어떻게 제대로 살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입원해 있던 요양병원에서 같이 있던 네 명이 같이 와서 지금도 한 방에 같이 있다고 하시는 말씀에 다시 한번 근거 없는 안도를 했고, 치료되면 다시 간다고 그 병원에서 짐도 거의 두고 가라고 했다는 말을 듣고는 또 안심했습니다. 상태가 가벼우니 곧 치료가 될 것으로 병원에서 판단하고 있는 것 같으니 정말 다행한 일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걱정 반, 곧 괜찮아지시겠지 하는 기대 반으로 그날 밤을 보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동생이 어머니와의 통화녹음을 카톡에 올렸습니다. 어머니께서는 7층 707호실이라고 또렷하게 말씀하시고 “밥을 못 먹어 못 살겠다. 과일도 가져왔지만 먹고 싶지 않다. 밥을 두 숟가락밖에 못 먹는다. 기운이 없어 말도 못 하겠다”라고 하시면서 “옆자리 할매가 두 번째 검사받고 8층으로 가더니 우리는 며칠 더 있다가 7층으로 올려보내더라”라며 원망 섞인 경위 설명도 하셨습니다. 치료는 어떻게 받고 있냐고 물으니 “치료는? 오나가나 치료해 주는 것은 없다. 약만 주지 뭐, 약 주는 것밖에 없어. 저기서 먹던 약 그대로 처방해 주지 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어머니의 목소리는 환자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분명하고 또렷했습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때 처방받았다는 약은 그 전 요양병원에서 먹던 혈압약과 당뇨약을 말씀하신 것이었지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직접 치료하는 약이 없다는 말을 들어 놓고도 치료약이 있는 줄로 착각했습니다. 그러면서 무슨 약이라도 약을 쓰고 있을 테니 좋아지지 않을까 기대했습니다.
다음 날 오전 일찍 전화를 드렸을 때도, 전화 받는 것도 힘들어하시면서도 “아무 증상이 없다. 그냥 대기하며 약만 먹고 있고, 아침밥은 겨우 반 그릇을 먹었다. 병원 측에서는 전화를 해서 수시로 현재의 상태를 묻는다. 같은 병원에서 직접 와서 묻지 않고 왜 전화로 묻는지 모르겠다”라고 하셔서, 의사들이 바쁘고 혹 감염 우려가 있어 그런 것 같으니 그래도 묻는 대로 대답 잘하시고 작은 변화라도 있으면 간호사한테 즉시 얘기하시라고만 말씀드렸었지요. 오후에는 동생이 통화하였는데, 점심은 국에 말아서 많이 드셨다 하고 열은 내렸다 하시더라는 말을 듣고 이제 서서히 회복이 되려나 했습니다. 열도 내리고 밥맛도 돌아온다면 무슨 약인지 몰라도 쓰고 있는 약이 듣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기대를 걸었습니다.
다음 날인 19일 오전 일찍, 동생이 다시 어머니와의 통화녹음을 카톡에 올렸습니다. 전화 받기도 힘겨우신 듯 “왜 자꾸 전화를 하노? 아침밥을 못 먹고 있다가 늦게 먹는데 한두 숟가락 떠 넣으니 목이 맥히고 배가 아파 죽을 애를 먹었다. 간호사가 밀고 두드리고 해서 괜찮아졌다. 그 후에 국에 말아서 억지로 조금 먹었다. 열도 안 나고 아무 증상도 없다”라고 하신 것을 들었습니다. 힘은 들어도 밥도 조금은 드시고 특별한 증상도 없다고 하시니 곧 괜찮아지겠지 하는 희망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날 오후 늦게 동생이 다시 올린 통화녹음은 그동안 가져왔던 막연한 기대가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게 만들었습니다. 목이 타고 팔과 다리엔 힘이 풀렸습니다.
“나는 오늘 죽는 구덩이에 왔는지 죽을 것 같다. 7층에 있다가 5층으로 왔다. 넷 중에 혼자만 왔다. 여기 와서 오만 검사를 다 했다. 사진을 이리 찍고 저리 찍고 수도 없이 찍었다. 검사 후 코 막고 입 막고 숨도 못 쉬게 해서 갖다 놓으니 검사받다가 죽을 것 같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의사나 간호사가 왔다 갔냐고 물으니, “이 병원으로 오고는 의사 안 왔다. 간호사들은 바빠서 정신이 없다. 여기 불려 가고 저기 불려 가고 얼마나 바쁜지 모른다. 병실이 환자들로 꽉 찼다”라고 하셨습니다.
동생이 간호사와 통화하게 해 달라고 하니 “오냐, 오냐” 하시며 “자리도 불편해서 죽을 지경이다. 양손이 벌벌 떨리고 죽겠다. 조금씩 떨렸는데 오늘은 검사받는다고 더 떨린다. 환자들은 여기 꽉 차게 누웠다. 총총히 붙어 있어. 먹을 게고 쓸 게고 끌고 다니다가 다 잃어버렸다”라며 소지품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데 대한 걱정까지 하셨습니다.
7층에서 5층으로 왔다는 말씀이 일반병실에서 중환자실로 옮겼다는 뜻이었는데 저는 그 뜻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일반병실에 있다가 중환자실로 옮겼다면 정말 위중한 상태가 되었다는 것일 텐데 저는 두 손을 쳐 맨 채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동생이 간호사와 통화하게 해 달라고 했으니 전화가 오겠지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병원으로 전화하여 상황실 전화번호를 알아보고 담당 의사를 찾아서 어머니 상태가 어떤지 물어라도 보았어야 했는데 그렇게 할 줄을 몰랐습니다. 유능한 의사들이 알아서 적극 조치하고 있겠지 했습니다. 어머님이 죽을 것 같다는 데도 어디에 물어볼 궁리조차 하지 못했으니, 이런 아둔한 아들이 또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퇴근을 하여 저녁 8시경 제가 전화를 드렸을 때는 어머님이 검사 후 휴식으로 그나마 조금은 정신을 차리신 것 같았습니다. “엑스레이 사진을 많이 찍었어. 오만 검사를 다 해서 힘들어 죽겠다. 숨도 못 쉬게 코 막고 입 막아서 눕혀 놓으니 죽을 지경이다”라고 동생에게 했던 것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같이 있던 할매 하나가 맨날 울기만 해서, 울기는 왜 저렇게 우는고 싶더니 오늘은 나도 울고 싶어”라고 하시는데 가슴이 미어졌지만, 최고의 의사들이 알아서 잘 검사하고 처방할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만 했습니다. 그리고 “굵은 알약을 일고여덟 알 주는데 먹기가 많이 힘들어. 목도 안 아프고, 배도 안 아프고, 아픈 데는 아무 데도 없어. 정신도 맑고”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밥도 다 드시고 약도 빼놓지 말고 드시라 하고, 이미 완치 후 퇴원자가 1,500명이 넘으니 어머니도 의사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곧 퇴원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전화를 끊었었지요. 죽음의 공포 앞에 불안해하실 어머니께 고작 제가 한 일이 어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 걱정하지 마시라고 말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입 막고 코 막고”라는 말씀이 산소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는데, 이 미련한 아들은 그 말이 그냥 일반 마스크를 쓰고 있다는 뜻으로 들었습니다. 나중에 의사와 통화한 후에야 알았습니다. 동산병원에 온 다음 날부터 산소마스크를 쓰기 시작했다고 의사가 말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녹음한 어머니와의 통화내용을 반복해 들어봐도 어머니는 통화 중에 숨차하시거나 호흡을 가빠하지 않으셨습니다. 울고 싶다며 많이 상심해 계셨지만, 말씀도 또렷하게 하시고 아무 데도 아픈 데가 없다 하시며 정신도 맑다고 스스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정도라면 곧 좋아지겠지 라고 생각했습니다. 폐렴으로 아픈 것이 아니라 각종 검사를 받느라고 아픈 것이라 하시니 그것은 하루 정도 쉬고 나면 괜찮아지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정신도 맑다는 어머니의 음성이 귓가에 생생한데 그 전화를 끊은 지 채 두 시간도 지나지 않은 밤 10시경, 날벼락 같은 전화를 받았습니다. 담당 의사라고 하는 사람의 전화였습니다. 호흡기내과 김 교수라고 하였는데, 50대로 생각되는 차분한 목소리의 남자였습니다. 어머니의 상태를 알려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환자는 오후에 중환자실로 왔는데 인공호흡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폐렴이 있어 폐가 기능을 못 하면 산소수치가 떨어집니다. 오늘 점심때 중환자실로 와서 한나절 경과하였는데 산소마스크를 쓰고 있습니다. 산소를 한계치를 다 드리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번 폐렴은 약이 없습니다. 효과가 있을 수도 있는 기존의 약은 다 쓰고 있습니다만 연세가 많아 예측이 어렵습니다. 혈압약과 당뇨약까지 복용 중이었습니다. 가장 심한 상태입니다.”
“폐렴이 폐 전체에 확산되었습니다. 이번 폐렴의 특징이 본인은 증상이 얼마나 심한지를 모른다는 겁니다. 폐렴 확산 정도와 산소를 투입해야 할 정도, 나이 등을 보면 이 정도면 일반 폐렴환자도 어렵습니다. 기계를 통해 강제로 폐에 산소를 넣을 건데 아마 지금 병실에서 시술을 하고 있을 겁니다. 산소투입은 직접적 치료를 위한 것이 아니라 폐 기능을 도와주어 약들이 효과를 낼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한 것입니다. 목구멍에 관을 넣기 위해 마취를 시켰으므로 당연히 통화는 불가능합니다.”
헉! 이 말을 듣는 순간 저는 숨이 막혔습니다. 두 시간 전까지 정신이 맑다던 어머니를 폐에 산소를 공급한다며 갑자기 의식불명으로 만들다니요? 회복이 어려운 상황이라면서 사전에 아무런 말도 없이 마취를 하여 의식이 없게 만들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두 시간 전의 통화가 어머니의 마지막 육성이 될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마취하기 전에 면회를 하게 하든가 통화라도 하게 하여 어머니를 안심이라도 시켜 드리게 할 일이지, 상황이 얼마나 급박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의사가 야속했습니다. 어머니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듣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니 기가 막힐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어머니를 어떻게 치료하고 있느냐는 저의 질문에 의사는 말했습니다. “10명이 있는 병실에 있습니다. 환자 간 거리는 상당히 떨어져 있고, 병원 전체가 오염구역이므로 음압병실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 음압병실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후부터 빠른 속도로 나빠지고 있는데 고령이라 기계사용도 사실은 위험합니다. 이 병원으로 온 다음 날 아침부터 산소마스크를 대고 있었고, 오늘부터 피와 심장기능 등을 검사했는데 객관적으로 안 좋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의사는 자신들이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아무런 과오 없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강변했지만 ‘안 좋을 가능성’이라니요? 환자의 가족에게 처음으로 전화한 의사가 이게 할 소리입니까? “면회도 안 됩니다. 혈압이 떨어지면 임종 단계에서 가족 중 한 명만 면회는 가능합니다. 우주복 같은 보호장구를 갖추고 들어가야 하고 보호장구 해제 시 감염 우려도 있고, 면회 후 2주간 격리도 해야 하므로 권장하지는 않습니다. 면회하는 분도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사망하시면 전염병 관련법에 따라 ‘선화장(先火葬) 후장례(後葬禮)’의 절차를 따라야 합니다. 사망 후 병동 건물 밖에서 유가족이 고인의 얼굴을 확인한 후 바로 입관합니다. 시에서 하라는 대로 따라야 합니다. 화장은 오후 늦은 시각에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화장 후 가족들이 빈소를 차리는 것은 가능합니다만 문상객이 거의 오지 않으므로 안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밤에 악화될 수 있습니다.”
두 시간 전에 어머니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었는데, 그리고 환자의 상태를 설명한다며 처음으로 전화한 의사가 벌써 어머니의 임종과 장례절차를 이야기하다니요. 참으로 어이가 없었습니다. 어떤 판관(判官)이 첫 재판에서 바로 선고를 한단 말입니까? 그것도 사형선고를요. 그래서 저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생각하며 그냥 흘려들었습니다.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어렵게 잠이 들었는데 휴대폰의 진동음이 울렸습니다. 비몽사몽간에 무슨 소리인지 몰라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습니다. 새벽 1시 50분이었고 야간 담당 의사라고 했습니다. 전날 저녁에 통화한 의사보다는 다소 젊은 남자였습니다. “혈압이 떨어지고 있고 소변숫자(?)가 감소하고 있습니다. 약을 쓰고 있지만 안 될 것 같습니다. 악화되면 또 전화 드리겠습니다.”
통화는 짧았습니다. 의사는 뭔가에 쫓기는 듯했습니다. 자다가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 멍했습니다. 뭐라 제대로 물어보지도 못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시골 작은외삼촌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확진 사실은 확진 다음 날 바로 말씀드렸지만 돌아가셨다는 것을 갑자기 알려 드릴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잠들지 못한 채 날이 샜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낮 시간도 흘렀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7시경 담당 의사의 전화가 다시 왔습니다. 낮에 누나가 간호사에게 전화하여, 의사더러 전화해 달라고 독촉한 결과인 듯했습니다. 의사의 목소리는 역시 차분했습니다. “혈압은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습니다. 산소 수치도 90 이상입니다. 많이 최대로 드리고 있습니다. 콩팥 기능이 많이 저하되어 소변량이 아주 적습니다. 엑스레이상 폐의 차이는 없습니다. 더 심해지지는 않았다는 뜻입니다. 열이 39도로 여전히 위험한 상태입니다. 내일도 여전히 소변량이 적으면 피검사를 해 보고 혈액투석을 해야 합니다. 계속 마취상태이므로 의식은 없고 진통제를 계속 주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회복 가능성을 물으니 “점점 악화되고 있는 중입니다. 기다리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습니다. 60대 중에는 이 상태에서 회복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80대는 힘들다고 봅니다. 여러 장기의 기능을 유지시키는 것이 최선입니다. 투석은 위험하므로 안 할 수도 있습니다. 계속 치료하며 2주까지 경과를 봐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의사의 말 중에 좋은 말만 골라서 들었고, 또 듣고 싶은 대로 들었습니다. “혈압은 유지, 더 심해지지는 않아, 회복되는 경우 있다, 2주까지 경과를 봐야” 2주나 경과를 본다는 것은 최소 2주는 살아 계실 것이라는 뜻이고, 그 기간이면 회복될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졌습니다.
다음 날인 토요일 오전 시간을 노심초사하며 보냈는데 오후 1시 넘어 담당 의사의 전화가 왔습니다. 전화가 안 와야 하는데 기어이 전화가 왔습니다. “점점 악화되어서 혈압이 떨어졌고 산소를 늘려도 산소 수치가 올라가지 않습니다. 혈액 투석 예정이나 혈압이 낮으면 투석도 위험합니다. 오히려 악영향을 줄 수도 있습니다. 몸 상태 유지에 노력 중입니다. 혈압 등이 유지되다가 다시 떨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에크모는 평소에도 고령에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사용을 검토 중입니다. 다만, 쓴다고 하더라도 생존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에크모는 큰 혈관을 사용해야 하는데 사용 중에도 위험할 수 있습니다. 환자는 폐렴이 심한 상태입니다. 사진을 보면서 이야기해야 하는데… 이 폐렴은 증상이 없어서 본인은 느끼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지난 목요일 저녁 저와 통화 시 어머니는 멀쩡했는데 왜 강제 산소주입 시술을 했냐고 물으니 “혈압과 산소 등 수치를 보고 결정합니다. 다른 장기에 이미 전이된 상태였고, 약도 용량을 넘어서 사용하는 것은 연명치료일 뿐입니다. 지금 상태에서 에크모 치료는 고통만 더할 뿐입니다. 위독한 상태입니다.” 그러면서 “이 상태면 갑자기 사망할 수 있습니다. 미리 직전에 연락할 예정인데 집이 어디입니까? 대구 사는 분 있습니까? 급히 오실 수 있습니까?”라고 하기에 누나가 대구에 산다고 하니 의사는 누나와 통화하겠다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전화를 끊고 생각하니 의사는 누나가 임종하러 올 수 있나를 물으려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누나에게 바로 전화하여 누나도 임종면회 하러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어머님은 의식도 없는 상태이고, 방호복을 입고 임종을 한다 해도 방호복을 벗을 때 감염위험이 크고 2주간 격리도 해야 한다고 하니 면회를 안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습니다. 연락을 해도 임종하러 오는 사람은 없다고 하고, 혹시 규정상은 가능한데 안 알릴 경우 유족들이 항의할 수 있으므로 얘기하는 것 같더라며 면회 가는 것을 말렸습니다.
어머니! 이 불효를 다 어찌한단 말입니까? 멀리 있다는 것을 핑계 삼아 임종을 하러 가지도 않으면서 누나가 가는 것조차도 말렸습니다. 마지막 가시는 길, 마취상태에서 의식이야 있건 없건 손이라도 잡아 드리고 귓가에 “어머니 사랑합니다.” 한마디라도 넣어 드렸어야 하는데, 이 아들은 바이러스가 무섭다고 임종조차 거부하며 어머니 손을 뿌리쳤습니다. 어머님이 무엇을 위로 삼아, 누구에 의지하여 그 험한 요단강을 건너라고 그리했단 말입니까? 이 불효를 다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다음 날인 22일은, 음력 2월 28일로 어머니 생신날이었습니다. 병원에 안 가셨으면 조촐한 생일상을 차려 드렸을 텐데요. 아침에 형제자매 카톡에 문자를 올리며 어머니의 쾌유를 비는 무력한 기도를 올렸습니다. “오늘은 어머니 생신일입니다. 어머니는 이 순간도 바이러스를 물리치기 위한 치열한 싸움을 하고 계십니다. 머지않아 어머니와 함께 생신상에 둘러앉아 이 순간을 추억 삼아 즐거이 얘기할 시간이 오리라는 것을 믿고 또 간절히 기원합니다. 오늘도 기도합시다.”
어머님은 사경을 헤매고 있어도 자식은 밥알이 목구멍으로 넘어갔습니다. 아침을 먹고 문득 정말 어머니가 위독하신 것이 맞나 하는 의심이 생겼습니다. 의사가 말한 환자가 정말 우리 어머니가 맞을까? 그제 저녁에 통화할 때 그렇게 생생한 목소리를 들려주시던 어머님인데 뭔가 병원의 착오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환자가 바뀐 것이 아닐까? 전화를 해 보면 어머니가 받으시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떨리는 손으로 어머니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기대는 이내 실망으로 바뀌었습니다. 신호음조차 울리지 않고 바로 전원이 꺼져 있다는 차가운 기계음만이 흘러나왔습니다. 한 번 더 해 보았지만 마찬가지였습니다. 병원 의사한테서는 종일토록 아무 전화가 없었습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생각했습니다. 상태가 조금이라도 호전되고 있거나 최소한 악화되지는 않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악화되었다면 분명 너무나도 성실한 의사가 바로 전화를 했을 테니까요.
다음 날은 월요일이었지만 하루 휴가를 내고 집에 머물렀습니다. 오전에 두 번이나 간호사에게 전화하여 상태를 물었으나 간호사는 자신은 상황실에 있어 환자의 상태를 알 수 없고 병실에 드나드는 의사만 안다 하며 의사에게 전화 드리라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더니 점심시간도 한참 지나서야 전화가 왔습니다. “어머니는 지금 투석 중입니다. 혈압은 90/60으로 떨어져, 올리는 약을 쓰고 있고, 가슴 사진은 그대로입니다. 일종의 쇼크 상태에 있는데 혈압 올릴 때 쇼크가 왔습니다. 신장 기능을 투석이 대신하고 있고 그에 따라 피검사 결과는 좋아졌습니다. 심장기능도 많이 떨어지고 있는데 기능이 돌아오려면 시간이 좀 걸립니다. 일시적일 수도 있지만 1~2주면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약은 다 쓰고 있습니다. 염증 감소와 심장기능 회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목요일 저녁에 통화 시 멀쩡했는데 왜 마취를 하고 삽관을 했는지를 다시 물었더니 “이 병의 특징이 증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방송에도 나왔는데 나도 인터뷰를 했습니다만, 환자는 증상을 못 느끼는데 산소 수치는 떨어집니다. 갑자기 장기 기능이 무너지고 의식이 없어집니다. 집에서 갑자기 사망하는 경우가 그런 경우입니다. 댐이 무너지는 것과 같습니다. 작은 구멍은 있어도 댐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 구멍이 어느 정도 커질 때까지는 무너지지 않다가 어느 정도 커지면 그때 한순간에 무너집니다. 그때 가서 조치를 하는 것은 늦습니다. 그래서 기준에 따라 수치를 보고 조치합니다.” “약을 쓰면서 균이 줄어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조치를 하면 2~3일에 확 좋아지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환자는 시간이 더 걸리는 경우인 것 같습니다. 물론 갑자기 안 좋아질 수도 있습니다. 중환자실로 왔을 때 환자는 혈압약과 당뇨약을 복용하고 있었습니다. 일반병실에 있을 때부터 먹었습니다. 그전 먹던 약 처방을 참고하여 이 병원에서도 중환자실로 오기 전에 처방한 것 같습니다. 혈압약과 당뇨약은 그 양으로 볼 때 이 병원에서 처음 처방한 양이 아닙니다. 상당히 높은 약을 먹고 있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어머님이 잘못되어도 의사는 자신의 능력이나 노력이 부족한 탓이 아니라 어머님의 기저질환이 문제라는 말을 하고 싶은 듯했습니다. 어쨌든 저는 어머님이 혈압약과 당뇨약까지 드시고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작년 여름 언젠가 한 번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것 같은데 불민한 아들은 흘려듣고 말았으며 염려조차 제대로 해 드리지 못했습니다.
3월 24일 화요일, 출근하여 마음을 둘 곳 몰라 서성이다가 사무실에 홀로 앉아 집에서 준비해 간 도시락으로 점심을 막 마쳐 가는데 담당 의사의 전화가 왔습니다. 점심시간에 전화를 했다는 것은 어머니께 상상을 해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났다는 뜻이 아닌가 하여 긴장했습니다. “환자는 상태가 극도로 안 좋습니다. 투석 중인데 혈압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최대로 세게 쓰고 있습니다. 더 올리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투석 중이나 나쁜 물질이 쌓이고 있고 해결이 안 됩니다. 이런 경우 갑자기 혈압이 떨어져 사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장지(葬地) 등을 준비하시고 마음의 준비도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마음의 준비라니요? 어떤 준비를 하라는 겁니까? 그 순간이 준비한다고 다르게 맞이할 수 있는 순간입니까? 어머니! 저는 말문이 막히고 손이 떨렸습니다. 무엇을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습니다. “이 정도면 소생 안 할 가능성이 큽니다. 차후 연락은, 더 이상의 치료를 포기한다거나 또는 사망소식을 알리는 것이 될 듯합니다. 에크모는 부작용이 커서 쓸 수 없습니다. 충격으로 바로 사망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의사는 선화장 후장례를 해야 하고, 지금은 면회도 안 되며, 인공호흡기를 대고 있고 의식도 없으나 임종 직전에 면회는 가능하다 하고, 사망 후의 신원확인 절차와 화장 등에 대해 다시 한번 설명하고는 전화를 끊었습니다. 의사는 어머니를 살리는 일보다 돌아가신 후에 어떻게 하면 빨리 처리하느냐에 더 신경을 쓰는 것 같았습니다.
그날 초저녁, 제발 전화가 오지 않기만을 빌고 있을 즈음 담당 의사의 전화가 또 왔습니다. 이제는 전화 진동음만 들어도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혈압 올리는 약을 쓰고 있으나 오늘 밤 또는 내일 새벽에 운명하실 것 같습니다. 약은 이 이상 쓸 수 없습니다. 고통만 줍니다. 갑자기 돌아가실 수 있습니다.” “오늘 밤 또는 내일 새벽”이라 했고 “마음의 준비”를 넘어 이제는 더욱 선명한 “운명(殞命)”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의사는 임종면회를 할 거냐고 또 물었습니다. 아들의 불효를 의사는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은 듯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며칠 전 생각했던 대로 대답했습니다.
저는 멀어서 한 시간 이내에 갈 수가 없고, 다른 사람도 감염 위험이 있고 면회 후 자가격리도 해야 하고, 어차피 어머니는 의식도 없다 하시니 임종 면회를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어머니! 임종이라는 것이 자식이 부모에게 하는 마지막 효도일 텐데 그 마지막 효도조차도 하지 않겠다고 냉정히 걷어찼습니다. 어머니 혼자 요단강을 건너시게 했고, 아무도 손잡아 주는 효도를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용인에서 대구까지 네 시간은 걸린다 하니 의사는 “출발 준비를 해 놓고 자다가 전화 받고 바로 출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원래 사망 후 바로 얼굴을 확인하고 입관해야 하는데 네 시간은 기다려 주라고 영안실에 말해 놓겠습니다. 저는 부속건물의 상황실에 있는데 병동과는 분리되어 있고, 밤 11시까지 근무하므로 그 후에는 환자에 대해 설명 드릴 수 없습니다. 설명이 필요하면 다음에 상황실로 전화하여 미리 예약 시간을 잡은 후 오시면 설명 드리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망 후의 일은 영안실 전화번호를 알려 주며 거기에 전화하여 설명을 들으라고 했습니다.
기가 막혔습니다. 확진판정을 받고 입원한 지 3일 만에 중환자실로 가시고, 그런지 다시 5일 만인데 벌써 사후의 일을 논하다니요? 이 순간이 이렇게 빨리 와도 되는 것입니까? 모든 것을 부정하고 거부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어찌하겠습니까? 무력한 아들은 의사가 가르쳐 준 영안실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안실 담당자도 ‘선화장’임을 강조하여 말했습니다. 그리고 “사망하시면 대표자 한 분이 상황실로 오시면 됩니다. 소독을 철저히 한 2중 비닐백에 넣은 고인을, 2층에서 1층으로 모시고 내려오면 병동 뒤에서 차량에 관을 대기하고 있다가 유족이 얼굴을 확인하고 신원을 확인하면 바로 입관을 합니다. 그리고 유족 중 한 명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희가 보건소 등에 신고하면 화장장을 잡아 주는데, 밤중에 돌아가시면 아마 내일 오후 4시 명복공원에서 화장할 것입니다. 화장장 참관도 권고사항이지만 한두 분만 가능합니다. 감염 우려 때문에 방호복을 입고 참관합니다. 개인 승용차로 이동하면 대기실에서 방호복을 입게 되는데 텔레비전에서 보던 의사들이 입고 있는 우주복 같은 것입니다.”
“화장 후 빈소를 차리는 것은 가능합니다. 개인적으로 장례식장을 임대하여 제사를 지내는 것도 가능은 합니다. 그러나 조문을 받는 것은 아마 불가능할 것입니다. 아무도 안 옵니다. 집에서 제수를 마련하여 제사를 지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담당자의 설명과 저의 질문이 뒤섞였고 저는 설명을 열심히 받아 적었습니다. 가슴이 떨리고 손도 떨려 제대로 글씨를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망연자실 손을 놓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사경을 헤매고 계실 어머니를 불쌍히 여길 겨를도 없었습니다. 임종은 안 해도 신원 확인은 해야 했습니다. 이는 자식된 자의 권리이기 이전에 당국이 요구하는 유족된 자의 의무였습니다. 그래서 자형과 통화하여, 일단 저녁에 대구로 내려가서 자형 집에 있다가 전화가 오면 병원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잔인한 시간은 그리 오래 기다려 주지 않았습니다. 8시 38분, 다시 담당 의사의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성준이 엄마와 대구로 내려갈 준비를 거의 다 마쳤을 때였습니다. “혈압이 감소하더니 심장 박동이 더 이상 없었습니다. 의학적으로 사망한 것입니다. 시간은 20시 30분입니다.”
의사의 말은 짧았고 사무적이었습니다. 어머니의 명복을 빈다는 빈말도 한마디 없었습니다. 그럼 돌아가셨다는 말입니까? 정말입니까? 하나 마나 한 소리를 버벅대고 있는데 몇 시쯤 도착할 수 있느냐고 의사가 물었습니다. 새벽 1시쯤에 도착할 것 같다고 하자 서문시장 건너편에 있는 주차장으로 들어와서 상황실을 찾으라고 했습니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지만, 누나와 동생들에게 알리고 대구로 달려갔습니다. 당국이 요구하는 유족 된 자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새벽 0시 30분쯤 동산병원 주차장에서 누나와 자형을 만나 함께 상황실로 갔습니다. 상황실 입구에서 60세쯤으로 보이는 어떤 남자가 코로나19 유족 다큐를 제작한다고 협조를 구하는데 저는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 다큐가 웬 말이란 말입니까? 다큐보다 더 생생한 이 엄혹한 현실 앞에서 무엇을 기획하고 무엇을 연출한단 말입니까?
손 소독을 하고 상황실에 들어섰을 때 간호사 한 명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역시 유족 중 한 명만 어머니 얼굴을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푸르스름한 비닐 옷을 입고 장갑을 끼고, 마스크를 새로 끼고 물안경 같은 고글도 꼈습니다. 어머니를 보러 가는데 이렇게 중무장을 했습니다. 상황실에서 나오니 현관에 동생이 도착해 있었습니다. 현관 앞, 보안실이라고 쓰인 사무실에서 방호복을 입은 남자 하나가 나오더니 저만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습니다. 상황실에서 비탈길을 내려가 왼쪽으로 꺾으며 상황실 건물과 병동 건물 사이로 난 으슥한 골목길로 안내를 했습니다.
삼사십 미터쯤 주춤거리며 따라갔을 때 병동의 뒷문 앞에 흰 천막 하나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때 병동의 작은 문이 열리고 흰 비닐 방호복을 입은 남녀 둘이 이동용 침대를 밀고 약간의 비탈면을 내려왔습니다. 나를 보자 대뜸 차는 가져왔느냐고 물었습니다. 무슨 차냐고 하니 영구차라고 했습니다. 그런 말 못 들었다고 하고, 차량준비도 부서 간에 제대로 손발이 안 맞냐고 언성을 높이니 저더러 저쪽에 가 있으라고 했습니다. 10여 미터 떨어져 서 있는데 어디론가 전화를 하더니 잠잠했습니다. 그제야 절차를 안 모양이었습니다. 그 시간, 저를 안내해 온 남자는 온데간데 없었고 멀리 어둠 속에서 누나가 저 있는 쪽을 바라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서 있는 시간이 그렇게 길 수가 없었습니다. 저기 저 이동용 침대 위에 어머니가 누워 계신 것이 분명한데 달려가 부둥켜안고 목 놓아 울기는커녕 3월의 쌀쌀한 새벽 공기에 떨고 바이러스의 공포에 떨며 그냥 망연히 서 있었습니다.
5분여 후, 소형 구급차 한 대가 왔습니다. 어머니가 누워 계신 이동용 침대를 지나갔다가 천막 반대 쪽에서 천막 안으로 후진하여 차 뒤편을 이동용 침대 앞에 댔습니다. 그때 침대 앞으로 다가가니 아까 그 방호복 입은 여자가 신원 확인을 했습니다. 어머니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부르면서 맞느냐고 물었습니다. 제가 어찌 어머니 주민등록번호를 뒷자리까지 다 기억하겠습니까? 앞 생년월일이 맞는 것 같아 그렇다고 하니 가까이 와서 얼굴을 확인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어머님이 누워 계신 비닐백의 얼굴 부위에 나 있는 작은 반원형 지퍼 문을 열었습니다.
그 순간 비닐 아래 어머니의 망극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머니가 입고 있는 환자복 옷자락이 조금 보였으며 머리는 다소 헝클어져 있었으나 얼굴 색깔은 하얀색이었습니다. 약간의 붓기가 있는 듯하였으나 평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비닐백 안이다 보니 비닐이 얼굴에 달라붙어 이곳저곳이 약간 일그러져 보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겨우 5일 전 생생한 목소리로 통화했던 어머니가 싸늘한 주검으로 누워 계시는데, 그런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도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바이러스가 내 손에 묻을까 봐 비닐로 싸인 어머니 얼굴에 손을 내밀다 말았습니다. 2중 비닐백이라는데 바이러스가 제 손에 묻을까요? 오염된 중환자실에서 비닐백에 넣었더라도 비닐백 밖은 소독을 다 하였을 텐데도 그래도 저는 무서웠습니다. 그 시간 그믐밤에 칼날 같은 조각달조차 없었습니다. 그 어두컴컴한 곳에 어디선가 희미한 가로등 불빛만이 소리 없이 흘러들고 있었습니다. 그 병동 뒤 으슥한 곳에서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보았습니다. 후미진 뒷골목에서 범죄자들과 은밀한 불법적 거래를 하듯 그렇게 어머니를 보았습니다.
그때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습니다. 몸속 깊숙한 곳에서 가슴을 찢으며 터져 나오는 오열(嗚咽)은 고사하고 한방울의 눈물조차 흘리지 않았습니다. 고통 속에 가신 어머니의 뺨을 한 번 쓸어 드리지도 않았고 손끝조차 잡아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 칠흑같이 어두운 요단강을 어머니는 오롯이 혼자서 건너셨습니다. 아들조차 손잡아 주지 않는 요단강을 어머니께서는 무엇에 의지하고 무엇을 등대 삼아 그 강을 다 건너셨습니까? 어머니!
어머니의 참담한 모습을 겨우 살피고 있는데 방호복 입은 여자가 됐냐고 날카롭게 물었습니다. 그들은 급했습니다. 많이 기다려 주지 않았습니다. 아니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엄청 많이 기다려 준 것일 것입니다. 운명하신 지 네 시간을 넘게 기다려 주었으니까요.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냥 맥없이 됐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재빠르게 비닐백의 지퍼창을 닫았습니다. 그러자 구급차에서 내려 대기하고 있던, 역시 방호복을 입은 두 사람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차에 연결된 받침대를 당겨 나무 관을 앞으로 당기더니 관의 뚜껑을 열었습니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큰 흰 천을 관 바닥에 넉넉히 펴서 깔았습니다. 그리고는 넷이서 어머니를 이동용 침대 위에 깔려 있던 침대보까지 함께 들어 관속으로 거칠게 밀어넣었습니다.
아! 어찌합니까? 어머니! 이를 어찌해야 하옵니까? 망극하기 그지없는 광경을 보았나이다. 그러나 이 아들은 피를 토하며 울부짖어야 할 그 순간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요동치는 제 심장 하나를 제대로 가누는 것조차 힘들어하며 숨죽이고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그들은 관 바닥에 깐 흰 천의 남은 자락을 모아 다시 어머니를 덮었고, 관 크기만 한 흰 천을 다시 어머니 위에 덮었습니다. 그리고 관 뚜껑을 닫고 관 위에 덮개 천 한 장을 더 덮고는 굵은 흰 줄로 관을 세 군데 묶었습니다. 그리고 구급차에 받침대를 밀어 올려 어머니를 싣고는 떠났습니다. 구급차를 타고 왔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저를 따라오라고 했습니다. 아까 병동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나온 두 사람은 언제 어디로 사라졌는지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뒤를 돌아보았을 때 누나와 자형, 성준이 엄마와 동생이 저 멀리 어둠 속에서 저를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장례식장 건물 뒤의 귀퉁이 작은 방에서 한참을 기다린 후 장례비용과 화장 절차 등에 대해 설명을 들었고 관련 서류에 서명을 했습니다. 어머니를 싣고 떠난 차를 따라가 왜 싣고 가느냐고, 어디로 가느냐고 대들지도 않았고 그만 내려 달라고, 그만 보내 달라고 울고불고 애걸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머니를 구금하고 연행해 간다는데 그 여직원이 내민 서류에 그냥 순순히 태연하게 서명을 했습니다.
이 여직원을 비롯하여 이 병원의 의사와 간호사, 안내하던 사람, 어머니를 침대에 싣고 온 사람, 입관을 한 사람, 이들이 다 누구입니까? 의사와 간호사의 이름을 달고도 어머니를 바이러스로부터 구하지도 못했고 전염병을 빙자하여 어머니를 모시는 데 예를 다하지도 않은 자들이 아닙니까?
그 값싼 중국산 나일론 수의조차도 입혀 드리지 않은 채 입고 있던 환자복 그대로 2중 비닐백에 모시는 것이 이게 어느 나라의 법도란 말입니까? 그 어두컴컴한 뒷골목에서 불편하기 짝이 없는 자세로 어머니를 얇은 나무관에 거칠게 밀어넣더이다. 무도하기 짝이 없는 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사장(祭司長)조차 피해 간 강도 만난 사람을 구한 사마리아 사람이라 이들을 여겨야 할까요? 이들이 비록 어머니를 바이러스로부터 구해 내지는 못했지만 밤을 새워 고생하며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실천했다고 칭찬을 해 주어야 할까요? 어머님이 돌아가시고도 이렇게나마 챙겨주니 다행이고 고맙다 해야 할까요?
아무리 직업적으로 하는 것이지만 이런 상황에서 많은 위험을 무릅쓰고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들이니 ‘코로나 전선의 전사요, 영웅들’이라고 큰절이라도 해야 할까요? 그러니 용서해야 하겠나이까? 아닙니다. 어머니! 아직은 아닙니다. 어머니! 저는 아직은 그럴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어찌해야 하옵니까?
다음 날 오전에 대구시청과 명복공원에서 전화가 오고 성남 분당메모리얼파크에서도 전화가 왔습니다. 어머니의 사후 일에 대한 통보와 준비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명복공원에서는 유골함의 선택과 각자(刻字) 내용을 상의했고, 분당메모리얼파크에서는 어머니의 유골함을 안장해도 된다는 당연한 허락을 어렵게 받았습니다. 일부 공원묘지에서는 코로나19로 사망한 분의 유골 안장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던 터라 담당자가 어머니의 사인을 묻는데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망진단서에 다 나와 있는 사실인데 거짓말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목구멍으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사인이 코로나19라고 말했을 때 담당자는 한참 동안 대답을 주저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오는 사람을 최소화하고 마스크를 철저히 착용하라는 조건을 달아 어렵게 허락해 주었습니다. 공원묘지에서조차 박대하는 이런 기막힌 일을 어머니가 왜 당해야 한단 말입니까?
늦은 점심을 한술 뜨고 어머니가 사시던 집에 들러 어머니 영정사진을 챙겼습니다. 누구 하나 가르쳐 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안장을 할 때만큼은 영정이 필요할 듯했습니다. 벽에 걸린 사진을 뺏겨 내리는데 감히 해서는 안 될 불경죄를 저지르는 듯 심장이 두근거렸습니다. 어머니 칠순 때 찍은 사진인데, 그것을 제가 챙겨야 하는 시간이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습니다.
오후 3시경, 동산병원 장례식장에 도착했습니다. 방호복을 입은 운구요원 두 명이 영안실에서 관을 이동용 침대에 싣고 나와 작은 장의차에 실었습니다. 그리고 운전기사는, 유족 중 한 사람은 방호복을 입고 장의차 운전석 옆자리에 같이 타고 가도 되고 개인 승용차로 가도 된다고 했습니다. 그때 저는 승용차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어머니가 타신 차에 같이 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바이러스가 무서웠습니다. 방호복을 입은 운전기사는 그 차를 운전하는데 저는 방호복을 입더라도 어머니와 한 공간에 있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같은 차에 타고 어머니가 누워 계신 관을 끌어안고 통곡해야 했거늘, 관 위에 손이라도 얹어 나의 따스한 온기를 어머니께 전하려고 노력했어야 했거늘, 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내 살 궁리만 했습니다.
자식조차 안아 주지 않고 손잡아 주지 않는 어머니를 누가 위로하고 동행해 줄 거라고 그렇게 한단 말입니까? 어머니! 자식조차 따르지 않고 지켜봐 주지 않던 요단강이 얼마나 무섭더이까? 얼마나 고통스럽더이까?
명복공원 화장장에 도착하여 방호복을 입으러 휴게실로 가는데 그 앞에 어머니 교회의 목사님이 와 있더이다. 9년 전 아버님께 세례를 주셨던 그분이었습니다. 정중히 인사는 드렸으나 정신이 없어 감사의 말씀도 제대로 드리지 못했습니다. 어머니! 그날 그 목사님을 보셨습니까? 아무도 없는 어머니 장사(葬事)에 딱 한 사람, 그 목사님이 유일한 문상객이었나이다. 휴게실에서 급히 방호복을 입었습니다. 운전기사가 거들어 주어야 입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구두를 벗고 발을 넣은 다음 통으로 만들어진 우의 같은 상의를 위로 올려 입고, 달린 모자를 썼습니다. 다시 구두를 신고 그 위에 비닐 자루를 덧씌운 다음 끈으로 발목을 묶었습니다. 마스크를 끼고 고글도 꼈습니다. 눈앞은 흐리고 마스크는 꽉 조여 숨이 막혔습니다. 어머니께 마지막 인사를 하러 가는 길이 이렇게 힘들었습니다. 입구로 나오다가 목사님께 작별 인사를 드리고 동생과 화장장 입구로 갔습니다. 9년 전 아버지가 가셨던 그 길이었습니다.
화장장의 진행요원이 이동형 침대 위에 놓인 어머니 관 앞에 서라고 하더니 저희더러 마지막 인사를 하라고 했습니다. 관을 만져 봐도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동생에게도 하지 말라고 곁눈질을 했습니다. 그냥 고개를 숙이고 한동안 묵념을 올린 후 어머니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화장로(火葬爐) 안으로 들어가시는 것을 화면을 통해 지켜보았습니다.
어머니! 아들이 이렇게도 매정하고 매몰찬 인간이었습니다. 관에 손이라도 얹어보라는데 그조차도 하지 않다니요. 분명 힘겹게 건너고 계실 마지막 강, 요단강을 건너는데 손끝조차 내어 주지 않다니요.
어머님이 화장로로 들어가시는 것을 보고 건물 밖으로 나오니 건물 옆에 비닐로 만든 대기소가 있었습니다. 진행요원이 거기서 1시간 반을 대기하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에 유골 수습 장면을 지켜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어머니! 그러나 저는 그곳에서 대기하지도 않았습니다. 앞 사람들이 방호복을 벗고 가는 것을 보고 저도 방호복을 벗고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1시간 반 동안 뜨거운 불 속에서 온몸을 태우셔야 하는데 저는 숨이 좀 막히고 땀이 좀 난다고 그걸 참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어머니! 불은 얼마나 뜨거웠습니까? 그 고통은 얼마나 크셨습니까? 누구와 함께 그 고통을 견뎌 내셨나요? 교회 목사님과 같이하셨나요? 그 목사님이 몸으로 불길을 막아 잠시라도 열기를 식혀 주더이까? 57년을 같이 산 자식도 해 주지 않는 것을 어머님이 10년을 좀 넘게 다니신 그 교회의 목사님이 해주더이까? 그 목사님을 따르는 천 명, 만 명의 성도들이 그 길을 함께 해주더이까? 그들이 등대되고 나침반 되고, 북극성이 되어 어머니를 요단강 너머로 인도하였겠지요? 어머니,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그렇게 믿겠습니다.
1시간 반의 시간이 속절없이 흘렀습니다. 그 사이에 어머니는 한 줌의 재가 되었습니다. 운전기사로부터 동생이 건네받은 하얀 도자기 유골함을 품에 안아 보았습니다. 어머니의 따스한 온기가 저의 팔과 가슴에 전해졌습니다. 문병 갔을 때의 어머니의 선연한 모습이 아직도 두 눈에 생생한데 유골함이라니요. 어찌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다시 한번 숨이 막히고 가슴이 저렸습니다.
다음 날인 26일 아침 9시에 동산병원 장례식장에 들러 전날 안치해 두었던 어머니 유골함을 찾아 오후 2시경에 분당메모리얼파크에 도착했습니다. 차에서 내려 영정을 앞세운 채 유골함을 안고 아버지 곁으로 갔습니다. 전날은 따스하던 어머니의 온기가 그날엔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납골묘의 아버지 옆에 나란히 모셨습니다. 이를 지켜본 것은 오로지 우리 5남매와 어머니의 손자·손녀들뿐이었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장지에조차 아무도 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마지막 길은 더 외롭고 쓸쓸했습니다. 어머니! 그 외롭고 쓸쓸한 길을 홀로 어떻게 다 가셨나요? 그 험한 요단강을 어떻게 다 건너셨나요? 어머니의 목사님과 천만 성도가 거기까지 따라왔더이까? 먼저 가 계신 아버지가 마중이라도 나오셨더이까?
그리고 어머니! 초우제 제물은 어떠했습니까? 시간이 없고 경황도 없다는 핑계로 제가 직접 마련하지 않고 제 작은처형에게 준비하게 하는 불효를 저질렀습니다. 그래도 그 제물이 요단강을 건너다 허기진 어머니에게 다섯 개의 떡이 되고 두 마리 물고기가 되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어머니! 원통합니다. 애통합니다. 그리고 억울합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이 원과 한을 다 푼단 말입니까? 하늘보다 크고 태산보다 무거운 원과 한을 홀로 짊어지신 채 그 멀고도 험한 요단강을 어떻게 다 건너셨나요? 자식조차 외면하며 손잡아 주지 않던 험한 강을 무엇에 의지하여, 무엇을 등대 삼아, 누구를 동무하여 건너셨나요? 어머니! 이 불효를 다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오늘 어머니를 뵈러 분당메모리얼파크에 갔었습니다. 명절 때마다 아버지를 뵈러 어머니와 함께 올라갔던 꼬불꼬불한 언덕길을 오늘은 혼자 올라갔습니다. 산소 주변에 있는 수백 그루의 벚나무에 벚꽃이 활짝 피어 있었습니다. 그 벚나무에서 떨어진 수천, 수만 개의 꽃잎이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더이다. 허약하기 짝이 없는 저의 작은 효심이 산산조각 유리파편이 되어 가벼운 봄바람에도 소리 없이 날려 가뭇없이 사라지는 듯하더이다. 그 하아얀 꽃잎 하나하나에서 곱고도 어여쁜 어머님의 모습을 보았나이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코로나 유가족 홍만표씨가 어머님을 떠올리면서 쓴 책 <어머님 날 기르시니>의 일부 내용
76분이 헌화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