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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사회일반

165cm 88사이즈, “그래 나 모델이다”

등록 :2013-05-10 20:31수정 :2013-05-11 16:45

김지양씨가 2012년 11월 트리니다드토바고에서 열린 ‘캐리비안 플러스사이즈 패션위크’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지양씨 제공
김지양씨가 2012년 11월 트리니다드토바고에서 열린 ‘캐리비안 플러스사이즈 패션위크’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지양씨 제공
[토요판/르포]플러스사이즈 모델로 산다는 것
▶ 케이블 방송 <스토리온>의 ‘렛미인 2’는 성형수술로 지원자들의 외모를 바꿔줍니다. 이 프로그램에 살 때문에 밖에도 못 나간다는 ‘은둔 비만녀’가 나와 그 변신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반대로 <한국방송>의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에는 아무리 먹어도 살이 안 찌는 여성이 등장해 고민을 토로하기도 했지요. 뚱뚱하든 마르든 사회적 편견에 상처받긴 마찬가지입니다. “신체 치수와 관계없이 모든 여성은 예쁘다”고 말하는 지양씨 생각은 좀 다릅니다.

집 옥상을 스튜디오 삼아
속옷 모델로 나선 김지양씨
2010년 미국에서 데뷔하고
외국 무대에는 몇 번 섰지만
정작 한국에선 워킹할 곳 없는
그는 플러스사이즈 모델이다

살찐 뒤 맞는 청바지 없어
명동 거리에서 운 적도 있지만
모델을 꿈꾼 뒤부터는
자기 몸을 창피해하지 않는다
“뚱뚱하다고 포기하면 안돼요
모든 여성들은 아름답거든요”

녹이 잔뜩 낀 낡은 문을 여니 옥상이다. 부러진 빨래건조대, 세발자전거가 옥상 구석구석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한때는 채소를 키웠을 법한 스티로폼 텃밭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그나마 멀쩡한 항아리들이 최근까지도 이곳에 사람의 왕래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듯했다. 칙칙하기만 했던 서울 강북구 미아동의 한 빌라 옥상은, 입구에 마련된 ‘임시 탈의실’에서 그가 새옷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비로소 매혹적인 스튜디오로 변신했다.

‘당신이 주인공입니다’ 광고 문구에 감동

“잘 갖춰진 실내 스튜디오에 비하면 여긴 완전 리얼 야생이에요.” 모델 사진촬영을 맡은 사진작가 지망생 문소영(23)씨가 먼저 입을 열었다. 메이크업을 돕는 윤자영(35)씨는 옆에서 화장을 살폈다. ‘끈적한 노래’를 주문하던 김지양(27)씨는 로빈 시크(Robin Thicke)의 ‘섹스 세러피’(Sex Therapy)를 들으며 세련된 포즈(자세)를 취했다. 김지양씨는 지난 8일 곧 다시 열게 될 인터넷 ‘플러스사이즈’ 전문 속옷 쇼핑몰의 모델로 나섰다. 경쾌하게 자세를 바꾸며, 그가 말했다.

“저도 가격 부담 없는 예쁜 속옷 입고 싶은데, 한국에는 없잖아요. 외국에는 사이즈가 크면서도 예쁜 속옷이 많거든요. 어차피 저도 입을 속옷이 필요하니까, 같은 고민을 지닌 사람을 위한 별도의 쇼핑몰이 하나쯤은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김지양씨는 한국에서 거의 찾기 힘든 ‘플러스사이즈 모델’이다. 165㎝에 88사이즈. 그의 신체 치수 ‘88’은 한국에선 빅사이즈로 더 많이 알려진 플러스사이즈다. 일반적으로 한국에서는 정장 사이즈 77 이상을 플러스사이즈로 여긴다. 여성 기성복 정장은 스몰사이즈에 해당하는 55부터 미디엄사이즈인 66까지가 대부분이다. 88 이상은 거의 내놓지 않는다.

그는 2010년 미국 플러스사이즈 모델 패션쇼인 ‘풀 피겨드 패션 위크’(FFF Week·Full Figured Fashion) 무대에 오르며 모델로 데뷔했다. 2011년엔 아메리칸 어패럴 플러스사이즈 모델 온라인 투표에서 991명 중 8위를 차지했고, 2012년 미국 ‘캐리비안 플러스사이즈 패션위크’에도 초청받아 참여했다. “모델이긴 한데, 한국에선 시장이 없으니 지금은 일이 없어요.” 김지양씨가 말했다.

처음엔 속옷 사이로 보이는 그의 속살에 눈이 갔다. 뱃살은 어떨지, 허벅지살은, 팔뚝살은…. 하지만 바로 코앞에서도 카메라를 당당하게 응시하며 자신있고 과감하게 자세를 잡는 당당함에 점점 시선이 끌렸다. “목 살려 주고”, “손 놓고”, “어깨 힘 빼고.” 문소영씨의 주문에 따라 모델 김지양씨의 손은 재킷을 잡았다 허리 위로 올라갔다. 지양씨 뒤로 보이는 동네 뒷산에선 포클레인 공사가 한창이었다.

“언니, 이번엔 호피무늬로.” 다른 속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지양씨는 이번엔 알 켈리(R. Kelly)의 ‘홀 로타 키시스’(Whole Lotta Kisses)에 맞춰 춤을 추며 사진을 찍었다. 느낌 있는 표정도 잊지 않았다. 이날 서울의 낮 최고기온은 25도. “덥다”는 소영씨에게 지양씨는 “고기 굽는다고 생각해”라며 다독거렸다. 잡지를 통해 지양씨를 알게 된 소영씨는 두달 전에 페이스북 친구를 신청했고, 같은 동네에 사는 걸 알게 된 뒤 함께 작업을 시작했다. “저도 살이 좀 있는데, 언니 보니까 멋있더라고요. 나도 자신감도 생기고.” 소영씨가 말했다.

“이 가운이 사연 있는 가운이에요. 풀 피겨드 패션 위크에 참여한다고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갔을 때, 가운을 준비하라고 해서 할리우드에서 무작정 산 옷이거든요.” 녹색 실크 가운을 입고 나온 지양씨가 말했다.

사실 그의 오래된 꿈은 ‘글쟁이’였다. 고교 시절 적성검사 결과지에 쓰여 있던 ‘푸드스타일리스트’라는 이름에 끌려 대학 진학 때에는 외식조리학과를 선택했지만, 여전히 글이 생계의 수단이 되길 바랐다. 실제 대학 졸업을 앞둔 2009년 5월 창간을 준비하는 음식잡지사에 취직도 했다. 그러나 편집장이 그만두면서 함께 일하던 사람들도 회사를 떠나자 그도 두달 만에 그곳을 떠났다.

“저는 글 쓰는 직업을 갖고 싶었는데, 그걸로 생계를 유지하는 게 쉽지 않아 보였어요. 그래서 10만원, 20만원 더 준다는 곳을 찾아 취업을 하다 보니 꿈하고 점점 멀어진 거예요.”

프랜차이즈 외식업체 몇 곳을 전전하며 ‘서빙일’ 등을 하다 2010년 1월 일을 그만두고 생각했다. ‘내가 뭘 하고 싶은 걸까.’ 그때 눈에 들어온 게 케이블채널 <온스타일>의 모델 오디션 프로그램인 <도전 수퍼모델 코리아>였다. “포털사이트를 통해 ‘당신이 주인공입니다’라는 광고 문구를 보는데, 정말 내가 주인공이 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어서 지원을 했어요.” 1차 서류심사를 통과한 지양씨는 2차 비키니 심사에서 보기 좋게 떨어졌지만, 그는 그때 느꼈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데 그게 그렇게 따뜻하고 기분이 좋은 거예요. 그 전까지 어떤 일을 하더라도 행복한지 몰랐는데, 그때 처음 희열을 느꼈어요. 나를 즐겁게 하는 일을 하자고 결심했어요.” 그때부터 모델은 그의 새로운 꿈이 됐다.

살은 큰 문제가 아니라고 여겨졌다. 케이블방송에서 종종 외국의 플러스사이즈 모델들을 볼 수 있었다. 유럽과 미국에는 자격만 된다면 설 수 있는 무대가 있었다. 그때 풀 피겨드 패션 위크를 알게 됐고, 서류와 비디오 심사를 통과한 뒤 면접에 참여하기 위해 2010년 9월 벌어 모은 전재산인 집 보증금 1500만원을 들고 무작정 미국으로 갔다.

“사실 예전에는 미국이 아니면 답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어쨌든 제가 발 디디고 있는 곳이 한국이니까, 여기서 뭘 해야겠구나 하고 생각이 바뀌었어요. 또 외국에 가더라도 비용을 개인적으로 부담해야 하니까 초청받아도 못 가는 일이 많거든요.” 지양씨는 얼마 전까지 레스토랑 등에서 주5일 40시간씩 최저임금을 받으며 일하던 아르바이트생이었다.

‘날씬하다’와 ‘예쁘다’는 동의어가 아니다

고등학교 2학년까지 지양씨는 마른 편이었다. 고3 올라가던 해 몸이 아프면서 3개월 사이에 키는 그대로인 채 몸무게만 10㎏이 쪘다. 60㎏이 넘었을 땐 충격도 컸다. 고등학생 때까지는 옷을 엄마가 사줬기 때문에 살이 찐 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문제는 대학 때 생겼다.

“대학에 들어간 2005년 청바지를 사려고 서울 명동에 갔어요. 근데 제 허리에 맞는 바지가 없는 거예요. 명동에 있는 가게란 가게는 다 돌아다녔는데도요. 길에서 펑펑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나요.”

그때 나름 운동도 해보겠다고 헬스장 회원권을 끊었다. 이번엔 운동할 때 입을 옷을 구하지 못했다. 너무 창피했다. 운동을 하고 싶은데, 옷이 없어서 못한다는 사실이. 필라테스(요가와 스트레칭이 접목된 운동) 수업도 들었지만 주변엔 온통 마른 여자들뿐이었다. 날씬한 여자들이 “나 너무 뚱뚱해”라며 속상해할 땐 “머리카락을 뽑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미웠다”고 말했다. 주눅이 들어 오히려 운동을 점점 멀리하게 됐다.

가장 힘들었던 건 주변의 시선이었다. “가까운 사람들이 저를 더 괴롭게 했어요. 당시 남자친구는 “뚱뚱해, 살 빼”라고 말하면서 물 한 잔만 마셔도 ‘또 먹냐’고 핀잔을 줬죠. 우리는 살찐 사람에게 편견이 많잖아요. 게으르고, 많이 먹고, 자기관리 안 하고….”

그 편견 가득한 시선을 그는 지금도 느낀다. 올해 초 한 매체와의 인터뷰 뒤 제목이 ‘뚱뚱한 여자 대표하는 모델 될래요’라고 달려 항의한 적도 있었다. “‘말라깽이 여자 대표하는 모델 될래요’라고는 아무도 말하지 않잖아요. 그 뒤 제목이 바뀌었는데, 그랬더니 포털에서 기사가 사라졌어요. 지금도 계속 연락 오는 방송 프로그램이 있어요. ‘뚱뚱한데 살 빼고 싶지 않은 여자’라고…. 가십이나 오락거리로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요.”

2010년 모델이 되겠다 결심한 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몸이 아니라 일과 열정에 집중했다. 과거에는 좀더 날씬하게 보이는 사진을 찍었다면, 이제는 좋은 사진을 찍고 싶었다. 내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담은 작품 사진처럼 훌륭한 사진을. 그렇게 살이 스트레스가 되지 않으면서 자신감을 찾아갔다. 자신부터 자신을 창피해하지 않으니, 주변에서도 그를 창피하게 여기지 않았다. 실제 모델 일을 시작한 뒤로는 “뚱뚱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날씬하고 뚱뚱한 건 머리카락이 길다, 짧다 같은 신체의 특징이에요. 신체의 특징이 예쁘다, 아름답다 같은 형용사는 아니거든요. 근데 사람들은 날씬하냐, 뚱뚱하냐만 봐요. 사람들이 그렇게 본다고 자기도 계속 그것만 보면 불행해질 수밖에 없어요. 그걸 벗어났기 때문에 저는 행복한 거고요.”

오전 11시에 시작된 촬영은 3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환절기마다 지양씨에게 찾아오는 불청객 알레르기가 복병이었다. “촬영한 시간보다 코 푸는 거 기다린 시간이 더 긴 것 같아요.” 카메라를 정리하며 소영씨가 말했다. 따로 사는 부모님과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다는 지양씨가 선택한 옷은 빨간색 원피스. 내친김에 모델의 옷도 구경했다. 화려한 무늬나 원색의 원피스가 눈에 들어왔다.

“옷은 어디서 사세요?” 이 질문을 시작으로 인터뷰는 고민 상담으로 전환됐다. 키 170㎝, 77사이즈에 ‘뱃살 고민’을 안고 있던 나는 예쁜데다 날씬해 보이기까지 하는 옷들에 눈이 갔다. “옷 좀 한번 들어보세요.” 긴 남방을 들어 내 복부 상태를 확인한 지양씨의 첫마디. “우리나라 여자들은 복부에 살이 좀 있는데, 바지는 다 골반에 맞춰 나와요. 바지를 허리에 맞춰 입고 짧은 티셔츠로 긴 다리를 부각시키면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옷 맞는다고 함부로 사지 마세요. 뱃살 가린다고 큰 옷 입지도 말고요. 그럼 더 뚱뚱해 보여요.” 뜨끔했다.

마른 여자들이 왜 예쁜 줄 아세요?

“마른 여자들이 왜 예쁜 줄 아세요?” 지양씨가 생글생글 웃으며 질문을 던졌다. 장황하게 사회적 미의 기준이 그렇게 고정돼 있어서 그런 게 아니냐고 설명을 했는데, 돌아오는 답은 “맞는 옷을 입었기 때문”이란다. “기본 아이템인 레깅스나 검정바지, 청바지에 흰 티…. 저한테 맞는 옷 찾기가 힘들었어요. 하다못해 상갓집에 가려고 해도 검정 원피스나 정장도 하나 못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도 나랑 어울리는 옷이 아니라 내게 맞는 옷만 샀어요. 맞는 옷 사면 뭐해요, 함께 입을 바지도 신발도 가방도 없는데. 미친 짓이었죠.”

2010년 미국에 갔을 때 그는 옷가게 ‘포에버21’에 출근 도장을 찍었다. 길게는 6시간 동안 그곳에서 옷을 입었다 벗었다 한 적도 있다고 했다. 내게 맞는 다양한 옷을 처음으로 입어보면서 ‘나는 브이넥이 어울리는구나, 라운드 티는 별로구나’라는 걸 알았다. 자연스럽게 어떤 옷을 입어야 예쁜지 알게 됐다. 그렇게 찾은 최고의 옷은 원피스. 블라우스는 가슴이 안 맞고, 치마는 허리 사이즈가 없는 반면 원피스는 가슴만 맞으면 벨트 등으로 아랫부분을 조절할 수 있었다. 옷은 외국에 나갈 때 주로 사고, 그렇게 심사숙고해 고른 옷은 오래 입는다고 한다.

“우리 같은 사람은 기업 입장에선 돈이 안 돼요. 소수니까요. 그래서 마른 보통의 여성들만 입을 수 있는 옷만 대량생산하죠. 근데 미국은 비만이 많으니까 돈이 되는 거예요. 소비자가 되고, 갑이 되고. 그래서 사람 사이즈 구별 않고 비슷한 크기의 옷만 만드는 우리나라와 달리 다양한 옷이 만들어지는 거죠.” 살을 빼는 거나 안 빼는 것 모두 선택의 문제다. 빼고 싶으면 노력해서 빼면 되고, 먹는 게 좋으면 그냥 살아도 좋고. 핵심은 자신의 몸을 제대로 아는 거라고 지양씨는 강조했다.

지양씨는 ‘뚱뚱한 사람들’이 백화점 쇼핑을 많이 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마음에 드는 옷이 있는데 사이즈가 없으면, “왜 너네 회사는 안 만드는 거냐”고 따져야 한다고 말했다. 직원한테든, 본사에 전화를 하든, 누리집에 항의를 하든 당당히 민원을 제기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 불만들이 쌓여서 바뀌는 거예요. 아무도 말을 안 하니까 사람들이 이해를 못 하고 알지도 못하는 거예요. 뚱뚱하다고 아름다움을 포기하면 안 돼요. 모든 여성들은 사이즈에 관계없이 이미 아름답거든요. 제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이기도 하고요.”

그가 준비중인 인터넷 쇼핑몰은 꿈과 생계를 일치시키는 시도이자, 자신이 활동할 영역을 한국에서 만드는 과정이다. 플러스사이즈 모델 지망생들을 돕기 위한 세미나도 할 예정이다. “악플에도 시달렸지만 ‘힘이 됐다’는 지지도 많이 받았어요. 나 하나 바뀐다고 사람들의 인식이 달라지진 않아요.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니까 불만은 없어요. 하루이틀에 빛을 발할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아니까 차곡차곡 시간을 쌓아나간다고 생각해요.”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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