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거창군 거창일반산업단지에 2019년 3월 문을 연 한국승강기안전공단 승강기안전기술원. 거창승강기밸리의 상징과도 같은 102m 높이 시험타워 등을 갖추고 있다.
서울·수도권의 시대이자 지방소멸의 시대다. 수도권 인구는 이미 2019년 비수도권 전체 인구를 추월했다. 좋은 일자리와 교육, 문화의 기회를 찾아 수도권으로 향하는 청년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고 있다. 이런 흐름은 저출생 고령화 추세와 맞물려 지방을 생존의 벼랑 끝으로 몰고 있다. 블랙홀처럼 인구를 빨아들이는 수도권은 수도권대로 교통 혼잡과 주택 부족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어떻게 하면 사람 살 만한 지방을 만들고, 그 결과 국토 균형발전을 이룰 수 있을까. 사회혁신을 추구하는 민간싱크탱크 ‘희망제작소’와 함께 지역 청년들에게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고, 주민 소득과 삶의 질을 높이며, 생태전환 꿈을 꾸는 전국 각지 현장들을 둘러보고, 희망의 싹을 찾아보는 연속기획을 마련했다.
“거창군의 승강기산업 연매출액은 2천억원을 넘어 거창군 주산업인 사과농사(1500억여원)보다 훨씬 많습니다. 승강기산업 종사자는 900여명으로 사과농사 5천여명에 아직 미치지 못하지만, 빠르게 늘어나고 있어요.”
지난달 19일 경남 거창군청에서 만난 승강기산업담당 직원은 “거창군 주산업이 사과농사에서 승강기산업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비수도권 대부분 중소도시가 인구절벽·지방소멸을 걱정하고 있는 가운데 거창군은 지역민들이 힘을 모아 찾은 승강기산업을 중심으로 ‘세계 승강기산업의 허브 도시가 되겠다’는 공통의 목표를 찾았다.
경남 서부 내륙 거창군의 재도약은 위기를 기회로 만들려는 도민들의 노력에서 비롯됐다. 거창에 있는 한국폴리텍7대학 거창캠퍼스(옛 거창기능대학)는 2005년 폐교 위기에 몰렸다. 학교법인 한국폴리텍은 입학지원자가 30여명에 불과해 운영이 어려워지자 폐교를 결정했다. 그러나 거창군민들은 거창기능대학 살리기에 나섰다. 대책위를 구성하고, 경남도·국회·노동부를 항의방문했다.
결국 2006년 1월 한국폴리텍을 관할하는 노동부는 거창기능대학 폐교 방침을 거둬들였다. 대신 거창기능대학을 승강기대학으로 바꿔 거창군이 직접 운영하기로 했다. 한국폴리텍과 거창군·지역사회가 대책을 찾기 위해 머리를 맞댄 결과였다. 여기에 노동부는 거창군에 승강기전문 산업단지 조성도 제안했다.
승강기산업과 연관성이 없었던 거창군이었지만, 지자체와 도민이 함께 숙의해 전망이 밝은 승강기산업을 지역의 새로운 먹거리 산업으로 결정했다. 2008년 7월28일 노동부와 거창군은 거창기능대학 양도·양수 협약을 맺었다. 노동부는 거창기능대의 모든 권리와 재산을 거창군에 무상으로 넘기고, 거창군은 교직원 고용을 승계한다는 내용이 협약서에 담겼다.
거창승강기밸리의 핵심 기관인 한국승강기대학교.
그리고 1년 반 뒤인 2010년 3월 세계 최초 승강기 전문대학인 ‘한국승강기대학교’가 탄생했다. 거창군은 학교 재산을 한국승강기대에 무상 출연하고, 학교법인 한국승강기대학에 운영을 맡겼다. 2012년 74명의 첫 졸업생이 나왔다. 이후 갈수록 규모가 커져 2015년부터 해마다 300여명의 승강기 전문인력이 배출된다. 신입생 출신지는 수도권 30%, 부산·울산·경남 30%, 기타 지역 30% 정도다. 거창군 출신은 6%가량이다. 졸업생 취업률은 85% 수준으로 전국 전문대 가운데 최상위권이다. 이현석 한국승강기대 총장은 “승강기 교육의 세계 표준을 만들어 전세계로 진출하고자 한다”며 강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거창군은 승강기산업 관련 기관들을 모아 상승(시너지) 효과를 도모하는 ‘거창승강기밸리’를 조성하고 있다. 승강기·부품 제조업체, 한국승강기대, 승강기안전기술원, 거창군 등 산·학·연·관을 한데 묶어 승강기산업을 발전시킴으로써 지역경제를 일으키려는 취지다.
7월19일 현재 거창일반산업단지와 거창승강기전문농공단지에는 승강기 관련 37개 업체가 입주해 있다. 102m 높이 시험타워와 시험연구동 등을 갖추고, 승강기·부품의 인증·시험·평가와 신기술 개발을 하는 승강기안전기술원(옛 승강기연구개발센터)도 2019년 3월 거창일반산업단지에 문을 열었다.
거창으로 이주한 업체들은 대체로 만족감을 나타냈다.
2012년 경기도 안양에서 거창으로 이전한 ㈜코리아엘텍의 송준호 대표는 “회사 이전을 정말 잘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임차해 사용했던 안양 공장은 실평수가 150평이었지만 거창 공장은 3천평이다. 땅값이 9억원이었는데, 거창군이 90%를 지원해줘 실제 낸 돈은 9천만원에 불과하다. 안양 공장 1년 임대료보다 적었다. 공장 건립에 20억원가량 들었는데, 대출 이자도 지원받았다. 안양에서 50억원 정도였던 연매출은 지난해 135억원으로 불어났다. 안양에서 14명이었던 직원 역시 현재는 35명으로 늘었다. 이 가운데 5명은 한국승강기대 출신이다.
개교 10년이 넘은 승강기대 졸업자들의 창업도 이어졌다. 승강기대 2회 졸업생인 김태근 태진시피(CP) 대표는 2014년 졸업을 앞두고 승강기 제조업체에 입사했다가, 2019년 창업했다. 김 대표는 거창에서 창업한 이유에 대해 “산업단지 내 업체들과 교류하며 정보 교환 등 이점이 많다. 승강기 관련 다양한 경험을 쌓기도 좋다. 창업하는 사람에게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중소벤처기업부는 2019년 거창군을 승강기밸리 산업특구로 지정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 4월 거창군을 ‘스마트 승강기 실증 플랫폼 구축사업자’로 선정했다. 내년 11월엔 승강기전문농공단지에 기존 시험타워보다 23m 더 높은 125m 높이의 제2시험타워가 세워진다.
지역사회도 승강기산업으로의 재편에 발을 맞추고 있다. 거창공고는 지난해 10월 학교 이름을 거창승강기고로 바꾸고, 지난 3월 거창승강기고 첫 입학생을 받았다. 학생·학부모·교직원·동창회의 95%가 학교 이름 변경에 찬성했다. 거창승강기고는 전국단위 모집이 가능한 마이스터고 전환을 추진하고 있다. 거창이 10년여 만에 명실상부한 승강기산업 거점도시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한겨레>와 함께 거창승강기밸리를 방문한 임주환 희망제작소 소장은 “대학 특성화로 폐교 위기를 넘어선 점, 대기업의 투자만 기다리지 않고 지역에서 키울 만한 산업에 주목해 중소기업 유치에 나선 점 등은 지방소멸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2012년 경기도 안양에서 경남 거창으로 이전한 승강기업체 ㈜코리아엘텍의 공장 내부 모습.
승강기밸리가 성과를 내면서 거창에서는 조심스레 인구절벽·지방소멸 위기를 탈출할 수 있다는 기대감도 커진다. 2011년부터 지난해까지 거창군을 제외한 경남 9개 군의 인구는 해마다 5278명씩 줄었다. 거창군 역시 인구 감소를 피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감소세는 현저히 완만하다. 거창 인구는 2011년 6만3146명에서 2020년 6만1502명으로 지난 10년 동안 1644명이 준 것에 그쳤다. 나머지 경남 9개 군 평균의 3분의 1보다 적은 수치다. 올해 들어선 지난 6월 말 기준 6만1555명을 기록해, 6개월 동안 53명이 늘었다.
하지만 지속가능한 미래를 만들려면 넘어야 할 벽이 적지 않다. 특히 거창에 온 청년들의 발길을 붙여두지 못하는 교육·문화·주거시설 부족은 난제다. 승강기안전기술원의 30대 한 직원은 “거창에선 살기가 너무 어렵다. 집과 교육·의료·상업·문화시설 등 기본적인 정주 여건이 매우 열악하다. 퇴근하면 갈 곳도 할 것도 없다. 거창으로 오려는 직원이 없다. 나도 의무적인 근무기한을 끝내면 대도시로 근무지를 옮길 것”이라고 말했다.
김승호 한국승강기대 기획처장은 “승강기와 승강기 관련 대기업은 서울 등 대도시에 집중돼 있다. 당연히 한국승강기대 출신 취업자의 70% 정도가 수도권으로 가고, 나머지 대부분은 부산 등 비수도권 대도시로 간다. 거창의 승강기 관련 중소기업에 취업하는 사람은 5%도 되지 않는데, 이들도 길어야 3년 정도 경력을 쌓은 뒤 대기업이나 공기업으로 이직한다”고 말했다. 송준호 ㈜코리아엘텍 대표도 “젊은 직원을 구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안양에서 거창으로 회사를 옮길 때 직원 3명이 퇴사했고, 거창에 이전한 직후 또 직원 3명이 퇴사했는데, 6명 모두 미혼의 젊은 직원이었다. 젊은 직원들을 확보하기 위해 결혼하면 3년 동안 다달이 20만원씩 결혼축하금을 지급하고, 한국승강기대에 입학하면 학비 50%를 지원한다. 그런데도 짧은 근무기간, 높은 이직률 등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힘들게 청년들을 유치했으나 상당수가 속수무책으로 떠나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는 셈이다.
102m 높이의 승강기 시험타워. 내년 11월엔 23m 더 높은 125m 높이의 제2시험타워가 세워진다.
거창군도 지속가능한 정주 여건을 만들려고 지원책 마련에 힘쓰고 있다. 거창군은 올해부터 승강기밸리의 업체가 신입사원을 채용하면 2년 동안 인건비 90%를 지원한다.
관계자들은 좀더 과감한 중앙정부의 지역균형발전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거창군청 승강기산업 담당자는 “첫해인 올해 7개 업체에 1명씩 모두 7명의 인건비를 지원하려고 했는데, 정작 신입사원을 구하지 못해 지원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지역균형발전을 강조하는데, 현실에 균형발전 정책을 적용하기는 매우 어렵다. 농촌을 지키며 직접 농사를 짓는 농민에게 직불금을 꾸준히 지급하는 것처럼, 정부가 지방 중소기업 직원들에게 파격적인 지원을 할 필요가 있다. 또 정부 차원의 과감한 문화인프라 투자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글·사진 최상원 기자
csw@hani.co.kr
산·학·연·관 모두 타세요, 미래 먹거리 올·라·갑·니·다
희망제작소 강약장단 분석
전망 밝은 ‘틈새산업’ 중견·중기 유치 성과
청년들 발길 잡아야 지속가능성도 높아져
거창은 군 단위 농촌지역 가운데 제조업 클러스터 육성을 통해 지방소멸에 대응하고 있는 흔치 않은 사례다. 얼른 눈길을 주기 힘든 승강기산업에 주목하고, 중소·중견기업을 집중 유치해 지역의 기반산업으로 만들었다.
애초 거창과 승강기산업이 특별한 관련성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신입생 유치 어려움으로 폐교 위기에 몰린 한국폴리텍7대학 거창캠퍼스(옛 거창기능대학)를 살려내고자 지역사회 전체가 힘을 모으던 무렵, 승강기라는 ‘틈새산업’에 주목해 대학 이름을 바꾸고, 관련 기업들과 공공기관의 부설기관을 한자리에 모았다.
세계 승강기산업의 연간 신규설치 시장 규모(2018년 기준, 국제표준화기구)는 약 92만대인데, 한국(약 5만대)은 중국, 인도에 이은 3대 시장이다. 지하철과 육교 승강기 설치 수요가 늘고 있고 노후 건축물 승강기 리모델링 수요가 확대되고 있는데다 고층건물이 늘면서 고속승강기 시장이 커지는 등 산업 전망도 밝은 편이다.
거창은 적극적인 중소·중견기업 유치 노력이 성과를 거둔 사례이기도 하다. 거창군과 경남도는 승강기산업을 지원하는 조례를 만들고, 입지보조금 지원, 금융 지원, 직원정착 지원 등에 팔을 걷어붙였다. 큰 구조물 탓에 넓은 공장입지가 필요한 기업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승강기 부품 등 안전인증을 수행하는 승강기안전기술원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도 강점이다.
남은 숙제도 많다. 산(기업들)-학(한국승강기대학)-연(승강기안전기술원) 연계의 외형은 갖췄지만, 제대로 ‘시너지’를 발휘하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보기는 힘들다. 한국승강기대학 졸업생들이 수도권 소재 대기업 등에 주로 취업하면서 지역 고용이 제한적인데다 입주 기업 직원들의 잦은 이직과 숙련 인력 부족도 문제다. 주택, 병원, 문화시설 등 청년들의 정주 여건이 좀더 개선될 때, 거창 승강기산업의 지속가능성도 커질 것이다.
고광용 희망제작소 연구위원 gygo@makehope.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