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민주화운동 당시 신군부의 발포 명령을 거부한 고 안병하 치안감.안병하평전 갈무리
5·18민주화운동 당시 발포를 거부했다가 신군부에게 고문을 당한 뒤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 안병하(1928∼1988) 치안감에 대한 의원면직 처분을 취소하고 미지급 급여를 지급하라는 국민권익위원회 판단이 나왔다.
권익위 경찰옴부즈만은 22일 “안 치안감의 1980년 6월2일자 의원면직 처분을 취소하고 미지급 급여를 지급하라”고 경찰청장에게 권고했다. 경찰청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5·18보상심의위원회, 국가보훈처 보훈심사위원회의 관련 기록 등을 바탕으로 볼 때, 안 치안감은 자기 의사에 반해 고문 등 강압 때문에 사표를 냈다는 판단이다.
권익위는 또 안 치안감의 경우 당시 ‘계급정년’(경무관의 경우 10년)이 아닌 연령정년(당시 61살)을 적용해 사망일(1988년 10월10일)까지 100달 치 급여를 지급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는 ‘1980년 해직자보상법’과 관련 판례 등을 바탕으로 △비슷한 시기 강제 해직된 공무원들에 대해 정부가 연령정년을 적용한 점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민의 생명·안전을 보호하려 한 점 등을 고려한 것이라고 권익위는 설명했다.
현행 행정기본법(제18조 제1항)은 ‘행정청은 위법·부당한 처분의 전부나 일부를 소급해 취소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앞서 지난해 6월 안 치안감의 유족은 ‘안 치안감의 의원면직 처분을 취소해 명예를 회복시켜 주고 그에 따른 미지급 급여를 지급해 달라’는 고충 민원을 국민권익위에 제기했다.
강원도 양양에서 태어난 안 치안감은 육군사관학교 8기를 졸업하고 한국전쟁에 참전해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1962년에는 중령으로 전역 후 총경으로 특채돼 경찰의 길을 걸었다.
이어 경찰관이 된 그는 경무관이었던 1979년 2월 전남경찰국장으로 부임해 이듬해 5월 5·18을 맞았다. 1980년 5월25일 “시민에게 총을 쏠 수 없다”며 신군부의 강제 진압 명령을 거부해 다음 달 직위해제를 당한 뒤 합동수사본부로 끌려가 8일간 고문수사를 받았다. 이후 안 치안감은 1988년 10월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났고 2002년 5·18민주유공자, 2002년 경찰 순직자로 인정받았다. 안 치안감은 2017년 11월 ‘제1호 경찰 영웅’으로 선정했고 경무관에서 치안감으로 1계급 특진 됐으며 이듬해 문재인 대통령이 안 치안감의 행적을 언급하며 명예회복이 이뤄졌다.
김양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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