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10월15일 준공돼 올해로 50돌을 맞은 소양강댐 모습. 소양강댐의 만수위 때 수면 면적은 축구장의 9804배에 이른다. 춘천시 제공
이달 15일로 소양강댐이 준공 50년을 맞는다. 소양강댐이 열어젖힌 ‘댐의 시대’ 50년을 돌아보며 국내 물관리 정책의 명암을 점검하고 대안적 미래를 2회에 걸쳐 점검해본다.
“차라리 북한 땅이 고향이면 언젠가 가볼 수 있다는 희망이라도 있지. 내 고향은 저 물밑에 있어 아예 가볼 수가 없어.”
김철호(81)씨가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김씨는 강원도 인제군 남면에서 12대째 살아온 토박이다. 조상 대대로 어림잡아 360년을 남면에서 살았다. 하지만 댐이 들어서면서 그의 고향 마을은 지도에서 지워졌다. 집성촌을 이뤄 함께 살던 친척과 이웃, 친구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정든 집과 뛰놀던 학교도 형체조차 찾을 수 없게 됐다.
물에 잠긴 고향을 떠나 새로운 곳에 정착해야 했지만 보상금은 턱없이 부족했다. 당시 김씨 가족이 받은 돈은 3.3㎡당 500원. 고향에서 내쫓기고 당장 먹고살 길이 막막했던 김씨는 어쩔 수 없이 건설 붐이 일던 쿠웨이트로 향했다. 열사의 땅에서 거친 모래바람과 싸우며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1년 뒤 귀국한 그는 물에 잠긴 고향 마을과 직선거리로 1㎞ 떨어진 소양호변에 작은 땅을 사 식당을 차렸다. 국책사업에 빼앗긴 고향이지만 추억마저 뺏길 수 없다는 절박함 때문이었다.
“쥐꼬리만한 보상금에 왜 불만이 없었겠어? 근데 누구도 입 밖으로 얘기를 못 꺼냈어. 서슬 퍼런 군인들 세상인데, 무슨 용빼는 재주가 있다고.” 호수의 잔물결을 바라보며 김씨가 쓸쓸하게 웃었다.
1967년 4월15일 착공해 1973년 10월15일 완공한 소양강댐의 준공식이 열리는 모습. 한국수자원공사 제공
■ 반백살 소양강댐…강남 탄생의 일등공신
소양강댐이 오는 15일로 준공 50년을 맞는다. 소양강댐은 경부고속도로, 서울지하철 1호선과 함께 박정희 시대 ‘3대 국책사업’으로 언급되곤 한다. 실제 박정희 정부는 1년 예산(1643억원)의 17.5%인 288억원을 투입할 정도로 소양강댐에 공을 들였다. 1967년 4월15일 착공해 1973년 10월15일 완공한 이 댐은 높이 123m, 길이 530m로 만수위 때 수면 면적은 축구장 면적(7140㎡)의 9804배에 가까운 70㎢, 총저수량은 29억㎥에 이른다. 이는 국내 1만7600개의 저수지가 담고 있는 물의 양(27억8000㎥)보다 많다.
소양강댐은 완공과 동시에 ‘동양 최대의 다목적댐’ ‘세계 4위 다목적댐’으로 홍보되면서 한국 산업화의 상징 구실을 했다. 댐 건설 붐도 가져와 안동댐(1977년), 대청댐(1981년), 충주댐(1986년), 횡성댐(2000년) 등이 연이어 건설됐다.
수도권 경제발전의 최대 공신이 소양강댐이라는 평가도 있다. 홍수 조절과 안정적인 산업·생활용수 공급으로 서울과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한강의 기적’을 달성하는 데 원동력이 됐다는 것이다. 실제 소양강댐이 건설되면서 한강 유역의 홍수 피해가 눈에 띄게 줄었고, 그 덕에 수도권 저지대의 급속한 개발도 가능해졌다. 북한강과 남한강에 각각 건설된 소양강댐과 충주댐의 홍수 조절 능력은 최대 13.9억㎥에 이르는데, 이는 서울시 전체를 5m 높이로 채울 수 있을 정도의 양이다.
김문숙 강원연구원 연구위원은 “소양강댐이 생기면서 한강 주변 침수 지역이 줄었고, 기업은 ‘상습 침수 지역’이라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땅을 싸게 사서 택지를 조성하고 아파트를 지어 지금의 압구정동을 탄생시켰다. 소양강댐이 서울에서 땅값이 가장 비싼 것으로 소문난 강남 탄생의 일등공신인 셈”이라고 말했다.
수도권이 물 부족 걱정에서 해방된 것도 소양강댐을 빼놓고는 말하기 어렵다. 기후 변화로 봄철이면 전국이 용수난을 겪지만, 수도권만은 예외다. 소양강댐과 충주댐 등 한강 수계 댐들의 풍부한 저수량 덕이다.
소양강댐은 청정에너지 생산에도 기여하고 있다. 발전 용량이 20만㎾에 달해 1973년 제1차 석유파동 당시엔 국내 수력 발전량의 3분의 1을 감당했다. 지금은 그 비율이 14% 정도다.
2015년 극심한 가뭄으로 강원도 소양강댐의 수위가 낮아지면서 옛 양구군 남면 수몰 지역에서 마을을 수호하던 성황당 나무가 42년 만에 물 밖으로 앙상한 모습을 드러냈다. 양구군 제공
■ 수도권은 급성장, 소양강댐 주변은?
댐 건설로 하류 지역인 수도권이 눈부신 발전을 경험한 것과 대조적으로, 상류 지역 주민들은 순탄치 않은 삶을 견뎌야 했다.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빚어진 수도권과 지방의 불균등 발전은 소양강댐에서 극명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소양강댐 건설로 춘천(당시 춘성군)과 양구, 인제 3개 군 50.21㎢(춘천 34.36㎢, 인제 12.04㎢, 양구 3.81㎢)가 물에 잠겼다. 주민 1만8546명(3153가구)은 대대로 살아온 고향을 떠나야 했다.
춘천에 살던 백태열(79)씨의 집은 가까스로 수몰 대상에서 제외됐지만, 그가 살던 마을은 ‘강제 수장’을 피하지 못했다. 학교뿐 아니라 면사무소, 장터 등 생활 기반이 모두 물에 잠겼다. 홀로 남겨진 백씨네 가족은 울며 겨자 먹기로 고향을 떠나야 했다. 이후 백씨는 양구와 철원, 서울 등을 전전하다 성인이 된 뒤에야 춘천에 터를 잡을 수 있었다.
백씨는 “농사를 지어도 내다 팔 장터도, 물건을 사줄 사람도 모두 사라졌고 그 흔한 구멍가게 하나 남지 않았다. 마을 중심인 면사무소가 없어지고 갑자기 생긴 호수에 도로마저 끊기면서 교통이 불편해지자 남아 있던 주민들도 차츰 마을을 등졌다. 직접적인 수몰 피해를 본 것이 아니라서 변변한 보상도 받지 못했다”고 했다. 백씨는 지금도 소양호 옆에 있는 옛집을 찾아가곤 한다. 폐허가 된 집터엔 잡목과 잡풀만 무성하다.
전만식 강원연구원 연구위원은 “수몰 지구는 농경지 면적이 51%로 가장 넓었다. 한마디로 농민들이 먹고살기 좋았던 곳이 물에 잠긴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주민에게는 대물 보상 위주의 일회성 보상이 전부였다. 게다가 보상비도 턱없이 적어 총공사비의 27%인 78억원에 불과했다. 가구 평균으로 셈하면 247만원이었다. 이 돈을 받고 떠난 이주민들 대부분은 대도시 주변부의 빈민층으로 편입될 수밖에 없었다.
소양강댐 주변 지역 도·시·군의회가 지난 6월 강원도의회에서 ‘소양강댐 피해 지역 공동대책위원회’를 꾸렸다. 강원도의회 제공
■ 40분이면 가던 길이 150분으로
고향을 지킨 소양호 인근 지역 주민들의 삶도 신산하긴 마찬가지였다. 정부는 댐 완공 직후인 1975년 3월 소양강댐 주변 지역 311.84㎢(축구장 면적의 4만3675배)를 자연환경보전지역으로 지정했다. 수도권에 공급할 물의 질을 관리하는 게 중요했던 만큼 강력한 규제가 적용됐다. 지금은 지정 면적이 229.9㎢로 줄었지만 여전히 이 지역에서는 군사시설 등 특정 시설이 아니면 건축 행위 자체가 원천적으로 금지된다.
‘육지 속의 섬’으로 전락한 곳도 있다. 북쪽으로는 북한, 서쪽으로는 화천댐, 동쪽으로는 험준한 산맥으로 막힌 양구군은 그나마 남아 있던 남쪽 길이 댐 건설로 완전히 끊겼다. 댐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비포장도로를 달려도 양구에서 춘천까지 40분이면 갈 수 있었지만 댐 완공 뒤에는 길이 모두 잠기면서 호수 옆으로 굽이굽이 난 ‘소양호 꼬부랑길’을 2시간30분 넘게 차를 타고 가야 했다. 신철우 양구군의원(소양강댐 피해 지역 공동대책위원회 부위원장)은 “물류 여건이 악화되면서 양구군민은 전국에서 가장 비싼 가격에 공산품을 구매하고, 가격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가장 저렴하게 농산물을 판매할 수밖에 없는 처지로 전락했다. 댐 착공 한해 전인 1966년에 4만1606명이었던 양구군 인구는 2만1315명(올해 6월 현재)으로 반토막이 났다”고 했다. 2012년 배후령터널 개통으로 교통 여건이 많이 개선됐지만 양구에는 지금도 고속도로는 물론이고 4차선 접속도로조차 없다.
남상규 소양강댐실향민기림회 이사장은 “지금이라도 국가가 책임을 지고 소양강댐뿐 아니라 수몰 지역에 살던 사람들의 삶을 기록하고 역사로 남기는 등 댐 상류 지역 주민들을 위한 대책을 마련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수혁 기자
ps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