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870여명 집단학살 추정
과거사위, 2곳서 진상 조사
과거사위, 2곳서 진상 조사
“억울하게 숨진 형님의 유골이라도 찾을 수 있도록 해 주세요.”
큰형과 둘째형의 제사를 해마다 음력 3월 함께 지내고 있는 박아무개(73·울산 북구 당사동)씨는 20일 “1950년 경찰에 끌려간 뒤 행방이 묘연한 둘째형님의 유골을 죽기 전에 찾아내 온전한 제사를 한 번만이라도 올리고 싶다”고 울먹였다.
박씨의 둘째형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50년 음력 6월1일 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같은 마을에 사는 청년 4명과 함께 경찰에 연행됐다. 이어 이들은 다른 마을에서 붙잡혀온 이들과 함께 울산시 중구 ㅂ사찰에서 학살된 뒤 집단 매장됐으며 이후 이들의 주검들은 다시 파헤쳐져 어디론가 사라졌다.
일본군에 끌려가 대동아전쟁 때 숨진 큰아들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던 박씨의 부모는 둘째 아들 마저 총살을 당하자 시름시름 앓다가 몇 년 뒤 세상을 떠났다. 박씨는 “둘째형이 잡혀간 뒤 가족들이 빨갱이로 몰려 시장에도 가지 못했다”고 말했다.
〈국제신보〉 60년 6월13일치 보도 등을 보면, 울산에서 보도연맹 사건으로 학살을 당한 이들은 870여명으로 추정된다. 집단 학살장소는 울주군 온양읍 운화리 대운산·대설리 산골짝, 울주군 웅촌면 오복리 오복재·대복리 산골짝, 울주군 상북면 지내리, 울주군 청량면 율반·정곡, 동구 방어진 꽃바위, 북구 호계동 등이다. 학살은 50년 7월초부터 경찰, 국군 백골부대, 청년방위대, 미군방첩대(CIC) 등에 의해 수차례에 걸쳐 저질러졌다.
60년 부산지검은 당시 울산경찰서장 등이 직접 처형을 했다는 진술을 확보하고 그해 유족들이 숨진 이들의 유골을 수습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지난달말까지 유족 대표 16명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유골도 수습하지 못했다며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과거사정리위는 울주군 온양읍 운화리 대운산·대설리산골짝, 울주군 웅촌면 오복리 오복재·대복리 산골짝 등 2곳의 민간인 집단 학살 사건을 1차 조사하기로 했다.
보도연맹은 정부가 49년 좌익운동을 하다 전향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직한 반공단체로 가입자가 30여만명에 이르렀으며,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경찰 등을 동원해 전국에서 이들을 집단 학살했으며 학살당한 이들의 규모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김광수 기자 kskim@hani.co.kr
김광수 기자 k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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