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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운동·기부문화 효시…큰 뜻 이어가자

등록 2007-02-19 17:57수정 2007-02-19 18:00

외환위기가 불어닥친 1998년 1월초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극일운동시민연합’ 주최 ‘나라빚갚기운동 함께하기’ 캠페인에서 시민들이 서명에 동참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외환위기가 불어닥친 1998년 1월초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극일운동시민연합’ 주최 ‘나라빚갚기운동 함께하기’ 캠페인에서 시민들이 서명에 동참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국채보상운동 100돌’ 대구서 정신 되살리기 활발

내일 기념공원서 학술토론회
상징표석 건립·우표 발행도

국채보상운동 100돌을 맞아 대구에서는 다채로운 기념행사를 통해 선조들의 고귀한 뜻을 되살리자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 공동의장인 김범일 대구시장은 “국채보상운동은 스스로 나라를 지켜내려는 ‘자구운동’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며 “대구시민들이 한마음으로 뭉쳐서 대구의 위상과 명예를 되찾자”고 말했다.

21일 대구 도심에 자리잡은 국채보상기념공원에서 ‘국채보상운동의 현대적 의의’를 주제로 열리는 학술토론회에 참석하는 ‘아름다운재단’ 박원순 상임이사는 “국채보상운동은 우리나라 기부문화의 효시이며 오늘 우리에게 값진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고 말했고, ‘환경재단’ 최열 대표는 “한국 엔지오 운동의 역사적 뿌리이며 경제정의를 추구하는 운동으로 재현되고 있다”고 했다. 추진위 이상원(64·전 대구엠비시 상무) 간사도 “국채보상운동은 당시 〈대한매일신보〉 보도를 통해 전국적으로 번져나가 국민 참여를 이끌어냈다”며 “우리나라 최초의 언론운동으로 볼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한편, 우정사업본부는 100주년 기념우표 160만장을 발행해 세계 190여 나라에 배포할 예정이다. 또 국채보상운동이 처음 시작된 광문사, 진골목, 북후정 등 역사적인 장소에는 상징표석이 세워진다.

또 국채보상운동을 소재로 한 창작 오페라 〈불의 혼〉이 구미(28일)와 서울(3월16, 17일)에서 차례로 공연된다.

대구소비자연맹은 23일 ‘금연운동 100주년 및 전국금연대회’를 열고 각종 상담과 자료 전시를 통해 금연운동을 홍보한다. 대구소비자연맹은 “100년 전 국채보상운동이 담배를 끊어 돈을 모은 금연운동에서 촉발됐다는 사실을 널리 알려 그 정신을 사회운동으로 되살려내자”고 말했다.

이밖에도 기념음악회(25일) 시문학 공연(24일) 전국초중고 글짓기대회(28일) 국채보상운동 유적지 답사(21~28일) 청소년 탁본·가훈쓰기(24~25일) 등의 행사도 볼만하다.

국채보상운동은 1997년 대구시 주도로 처음 기념식이 열린 이후 이듬해 1만2천여평 규모의 ‘국채보상운동 기념공원’ 조성, 2002년 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설립 등으로 확산되고 있다.


기념사업회는 2004년 부산지부에 이어 서울 및 호남지부 설립을 추진중이다.

대구/구대선 기자 sunnyk@hani.co.kr


국채보상운동이란
‘일제 예속 벗자’ 대구 유지 즉석모금서 시작

국채보상운동은 일제가 ‘강화도조약’(1876년) 이후 조선을 경제적으로 예속시키기 위해 당시 대한제국 1년 예산과 맞먹는 1300만원이라는 거액의 차관을 들여온 역사적인 배경에서 시작된다.

1907년 1월29일, 인쇄소인 대구광문사 부사장 서상돈이 지역 유지들 모임인 ‘문회’에서 “나랏빚을 갚아 국권회복을 도모하자”며 즉석에서 800원을 내놨다.

이에 광문사 김광제 사장도 석달치 담뱃값 60전과 의연금 10원(당시 80㎏들이 쌀 한가마 6원)을 선뜻 내놨으며 모임에 참석했던 다른 회원들도 동참해 이날 하루 만에 2천원이 모였다.

그해 2월21일, 대구시내 ‘북후정’(현 시민회관)에서 수천명이 모인 ‘군민대회’가 열렸고, 곧이어 서울에서 발행되는 〈대한매일신보〉에 “3개월 동안 담배를 끊어 나랏빚을 갚자”는 자립경제 취지문이 게재되면서 전국적으로 번져나갔다.

고종황제가 담배를 끊고 동참했으며 걸인·백정·기생 등 신분과 계층을 초월해 온 국민이 참여했다. 문밖출입이 쉽지않던 부녀자들도 ‘국채보상부인회’를 조직해 반지와 팔찌 등 패물을 팔아 돈을 모았다. 모금 시작 3개월 만에 16만원이 모였다.

그러나 운동은 〈대한매일신보〉 발행인 양기탁이 구속되는 등 일제의 가혹한 탄압이 이어지면서 1910년 전후로 막을 내린다.

대구/구대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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