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주문화원, 시장 역사 정리
울산의 재래시장 역사를 조선시대부터 정리한 글이 발표됐다.
이재극(63) 울주문화원 이사는 최근 울주문화원이 펴낸 〈울주연구> 제4호에 기고한 ‘남창 오일장 고찰’에서 “ 영조 36년에 발간된 〈여지도서〉를 근거로 영조 36년(1760년) 이전에 시장이 나타나기 시작해 울산에는 지금의 시장인 장시가 7곳이 있었다”는 주장을 내놨다. 이씨는 관문(관청) 밖 상부면의 부장과 관문에서 10리 거리인 하부내면과 내상면에 성황당장과 병영장, 20리 거리인 대외면에 대현장, 30리 거리인 청량면에 목도장, 40리 거리인 온양면에 남창장, 50리 거리인 웅촌면에 서창장이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100년 뒤인 고종 31년(1894년) 펴낸 〈울산읍지〉를 보면, 부장 내황장 병영장 대현장 남창장 목도장 서창장 독등장(민등장) 서생장 등 9곳의 장시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으며, 부장은 동헌 앞 광장에 있던 것을 1925년 10월 옮겨 와 지금의 성남시장이 됐다고 덧붙였다.
1916년 펴낸 〈울산안내〉에선 언양·인보·여천·방어진장이 추가되고 서창장이 사라져 모두 12개의 장시가 운영됐는데, 인보·여천·방어진장을 뺀 9개 장시가 5일마다 열렸다. 축산물은 읍내·남창·언양장, 수산물은 내황·병영·목도장, 농산물은 병영·목도·본부(읍내)장, 직물은 병영·내황장에서 주로 거래가 이뤄졌다. 거래 금액을 기준했을 때 가장 많았던 곳은 언양장이었고 병영장이 뒤를 이었다. 남창장은 바닷가에 접한 인근 목도·민등·서생장보다 거래가 적었으나 1935년 12월16일 동해남부선이 개통되고 난 뒤부터 시장이 커져 온양·온산·서생·청량·장안·웅상 등 남부 6개 읍·면의 중심시장으로 발돋움했다.
이 이사는 “장시는 물품 거래 외에 정보교환과 만남의 장소 구실과 함께 사회적 불만을 토로하거나 개인적인 억울함을 호소하고 사당패와 풍물놀이 등 볼거리가 제공되는 스트레스 해소의 공간이었다”며 “추억이 깃든 장터가 사라져가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김광수 기자 k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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