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암 선생의 유족들이 4일 문고를 둘러보고 있다. 왼쪽 끝이 증손자 장재수씨, 바로 옆에 모자 쓴 이가 장씨의 누나 남수씨. 영남대 제공
50년전 기증 고서 등 모아
영남대 ‘위암문고’ 문 열어
영남대 ‘위암문고’ 문 열어
항일 언론인인 위암 장지연(1864∼1921) 선생이 평소 보관해 오던 책을 한곳에 모아 놓은 ‘위암 장지연 문고’가 4일 영남대 중앙도서관 9층에 문을 열었다.
이곳에는 1958년 위암 선생의 유족이 당시 영남대의 전신인 청구대학에 기증한 고서 등 250종 704권이 보관돼 있다. 이 가운데는 위암 선생이 주필과 사장으로 재직했던 <황성신문>(1898년 창간, 1910년 폐간)과 국내 최초 지방지인 <경남일보>(1909년 창간), 격일간지 <시사총보>(1899년 1월 창간, 8월 폐간) 등 신문 원본이 상당수 포함돼 있다. <경남일보>와 <시사총보>에서도 위암 선생은 각각 주필과 편집인을 맡아 봤고, <경남일보> 부설 야학교에서는 직접 한문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밖에도 목활자본 ‘해동명장전’,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간행된 서양법학서인 ‘공법회통’, 조선후기 문인 차좌일의 시집인 ‘사명자시집’, 보각선사의 불교서한집 ‘대혜보각선사서’ 등 귀중한 고문서도 포함돼 있다. 위암 선생의 증손자 장재수씨는 “할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책들이 전쟁을 겪으면서 훼손되고 사라질 위기에 놓여 무척 걱정했는데, 영남대에서 잘 보관해줘서 너무 고맙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문고에는 1905년 11월20일자 <황성신문> 사설 ‘시일야방성대곡’은 보관돼 있지 않다. 장씨는 “일제가 당시 <황성신문> 원본을 거의 다 압수해갔지만 작은 아버지가 간신히 원본을 구해 보관하고 있다”며 “하루빨리 원본이 이곳에 보관될 수 있도록 힘쓰겠다”고 덧붙였다.
경북 상주 출신인 장지연 선생은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뒤 투옥됐으며, 이어 대한자강회를 발기하고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는 등 항일운동에 앞장서오다 1921년 11월1일 마산 자택에서 57살을 일기로 눈을 감았다. 구대선 기자 sunnyk@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