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년전 청주교도소 사진. 청주교도소 제공
청주교도소 개청 100돌
50년대 보도연맹 떼죽음에
DJ, 문익환 목사 등 거쳐가
50년대 보도연맹 떼죽음에
DJ, 문익환 목사 등 거쳐가
“어제도 그랬듯이 오늘도 교정의 태양은 떠오른다.”
청주교도소 개청 100돌을 맞아 직원 이재현(52)씨가 지은 기념시 첫머리다. 28일 100돌을 맞은 청주교도소는 1908년 11월 청주시 탑동에서 공주감옥 청주분감으로 문을 연 뒤 61년부터 청주교도소로 불렸으며, 78년 청주시 흥덕구 미평동 지금 자리로 옮겨 희망의 태양을 맞고 있다.
형무소로 불렸던 일본강점기~한국전쟁기에는 좌익사범들이 대거 수용됐으며, 1950년 7월 재소자 700~800여명이 국민보도연맹사건 등에 연루돼 학살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내란음모죄’로 81년 1월~82년 12월까지 수감생활을 했으며, 영원한 재야 큰 별 문익환 목사, ‘큰손’ 장영자·이철희 부부, 노회찬 진보신당 공동대표 등도 청주교도소를 거쳐갔다.
김 전 대통령은 82년 복역 당시 “추야장 긴긴밤에 감방 안에 홀로 누워, 나라일 생각하며~.(중략)”라는 내용의 ‘옥중단시’를 쓰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이 머물던 한 평 남짓한 방은 그대로 보존돼 있다.
‘감방’, ‘감옥’으로 불렸던 교도소는 100돌을 맞는 사이 체질 개선을 거듭했다.
교도소의 상징처럼 불리던 ‘콩밥’은 사라졌다. 사실 콩밥도 보리 70%, 쌀 10%에 콩 20%를 섞어 보리밥에 가까웠었다. 80년대 쌀 80%에 보리 20%로 바뀌었다가 90년대부터는 쌀 90%에 보리 10% 비율로 변했다. ‘뺑끼통’으로 불렸던 재래식 화장실은 수세식 화장실로 바뀌었으며, 중증환자·장애인 등이 머물고 있는 곳은 좌변기가 등장했다.
외부와 철저히 차단돼 있는 교도소도 소통을 하고 있다. 우량 수형자 몇몇에게만 허용되던 신문 구독은 1998년 9월부터 전면 허용돼 1천여명의 재소자 가운데 300여명이 일간 신문을 구독하고 있으며, 97년부터는 텔레비전 시청도 허용됐다. 2004년부터 재소자 간 서신 왕래가 허용되고 2006년 7월부터 서신 검열이 폐지되면서 편지 교환도 활발하다.
청주교도소 강호철 총무계장은 “알몸검사 등 반인권적 행태들을 없애고, 시설도 현대화하는 등 진정한 교정시설로 탈바꿈하는 노력을 해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오윤주 기자 sting@hani.co.kr
청주교도소 강호철 총무계장은 “알몸검사 등 반인권적 행태들을 없애고, 시설도 현대화하는 등 진정한 교정시설로 탈바꿈하는 노력을 해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오윤주 기자 st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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