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2천만원어치 기부
지난 22일 오전 10시 대구 수성구 구민운동장에 10㎏ 짜리 쌀 1000포대(2000만원 어치)를 실은 8t 트럭이 나타났다. 쌀을 싣고 온 노인은 미리 기다리고 있던 구청 직원들에게 “추석 밑에 형편이 어려운 이웃들에게 이 쌀을 나눠주라”고 말했다. 그는 “어려운 이웃들이 명절을 보내는데 조그마한 보탬이 됐으면 좋겠다”며 “어렵게 농사를 짓는 농부들도 도울수 있어 더없이 기쁘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구청 직원들은 이 쌀을 지역 경로당과 복지관 등에 나눠줬다. 이 노인은 2003년 추석을 앞두고 20㎏ 짜리 쌀 500포대를 트럭에 싣고 이웃들에게 전해달라며 처음 수성구청을 찾아왔다. 이후 해마다 추석 때만 되면 쌀을 싣고 와 이웃들에게 나눠주고 돌아갔다. 올해 7번째 수성구에 나타난 셈이다.
쌀을 싣고 올 때마다 구청 직원들이 이름과 주소 등을 물었지만 노인은 한사코 알려줄 수 없다는 말만 남기고 떠났다. 구청 직원들은 이름을 알 수 없는 그에게 명작동화에 나오는 ‘키다리 아저씨’라는 별명을 붙여 부르기 시작했다.
7년 동안 키다리 아저씨를 만나 본 수성구청 직원들의 말을 종합하면, 박씨 성을 한 노인은 올해 90살로 평안남도가 고향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얼마 뒤 대구로 옮겨 대구가 제2의 고향이 됐다.
대구에 터전을 잡고 양복도매상을 하면서 어느 정도의 돈을 모은 이 키다리 아저씨는 10여년 전 부인을 잃은 뒤 “남은 여생을 소외된 이웃들을 돕고 살자”고 다짐했다고 한다. 트럭에 쌀을 싣고 온 노인을 만난 배광식 수성구 부구청장은 “90살 노인으로 보기에는 건강이 좋은 것 같았다”고 말했다.
이날 트럭에 실린 쌀이 경로당과 복지관 등으로 나눠 옮겨지는 과정을 지켜본 키다리 아저씨는 “더 많이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는 모습을 감췄다. 구청 직원들은 “내년 추석에 어려운 이웃들이 할아버지를 또 만날 수 있도록 건강을 기원한다”며 그를 떠나보냈다.
구대선 기자 sunny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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