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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진실 알리다 숨진 동생, 그후 누나의 삶은…

등록 2011-05-20 17:05수정 2011-05-22 14:32

김의기씨의 누나 김주숙씨(오른쪽)가 부산 동구 초량동 좋은나무교회 남편 박철 목사와 의기씨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부산/김광수 기자 kskim@hani.co.kr
김의기씨의 누나 김주숙씨(오른쪽)가 부산 동구 초량동 좋은나무교회 남편 박철 목사와 의기씨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부산/김광수 기자 kskim@hani.co.kr
 1980년 5월30일 오후 5시께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 6층 창문에서 수십장의 홍보물이 뿌려졌다. 그러고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주위에 있던 전경들은 재빨리 홍보물을 주워들고 어디론가 가져갔다. 기독교회관 앞에 서 있던 두 대의 장갑차 사이에는 한 청년이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 서강대생 김의기(당시 21살·무역4년)씨였다. 김씨의 주검이 안치된 서울대병원 영안실은 울음바다로 변했다. 김씨의 어머니는 아들의 주검을 부여잡고 “나쁜 놈들아, 내 아들 살려내라”며 통곡했다.

 경북 영주 출신으로 학생운동과 농민운동에 열심이던 김씨는 1980년 5월 광주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은 전두환 신군부가 광주 시민들을 학살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1980년 5·18 민중항쟁에 참여했던 윤기현(62·동화작가)씨는 “연합개혁교회(URC) 농촌부 일을 하던 김씨가 5월19일 ‘함평고구마 투쟁 2돌 행사’에 참가하려고 광주에 와 북동성당에서 만났다”며 “김씨에게 ‘광주가 고립될 수 있다. 이 고립을 풀어야 되지 않겠나? 서울이나 다른 쪽에서 확산시켜야 하니 너는 올라가서 그 역할을 해라’고 이야기하자 충격을 받고 서울로 갔다”고 말했다.

 김씨는 서울로 다시 돌아갔으나 서울지역 학생운동 지도부가 계엄군의 검속을 피해 잠적한 상태였다. 항거하던 5·18 시민들이 5월27일 진압되자, 그는 광주 시민의 죽음을 알리려고 시민들에게 ‘광주학살에 맞서 궐기할 것’을 촉구하는 홍보물을 뿌리면서 기독교회관에서 투신한 것이다.

 그로부터 31년이 흐른 2011년 5월. 폭도와 빨갱이로 몰렸던 김의기씨는 ‘5·18 민중항쟁이 진압된 뒤 광주 바깥에 광주학살의 진실을 알리려다 숨진 최초의 희생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00년엔 5·18 희생자로 인정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 민주묘지로 이장됐다. 고교 역사 교과서에도 실렸다. 그와 함께 활동했던 선후배들은 해마다 5월이면 추모예배를 열고, 30돌을 맞은 지난해는 추모문집을 냈다. 서강대 후배들은 13일 27번째 추모집회를 열었다.

 김씨의 죽음은 가족들의 삶을 변화시켰다. 어머니는 민주투사로 변했다. 6년 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민주화운동 유가족협의회가 주최하는 집회에 참가하며 아들의 뜻을 이으려 했다.

 “장례식에서 당시 동생이 다니던 서울 형제교회의 김홍기 목사(현 감리교신학대학교 총장)님이 동생의 약력을 소개하면서 ‘젊은 예수’라고 했어요. 왜 동생을 그렇게 불렀는지 궁금했어요.”

 세 살 터울의 막내누나 주숙(55)씨는 가정 형편 때문에 고교를 나와 직장에 다녔지만, 동생이 살았을 때의 발자취를 따라갔다. 어머니와 함께 동생이 다니던 형제교회에서 예수의 삶을 공부했으나, 만족스럽지 않아 신학대학에 진학했다. 그러다가 남편인 박철(56) 목사를 만났다. ‘대학을 졸업하면 농민운동을 하겠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하던 동생의 모습을, 농촌목회를 꿈꾸던 박 목사한테서 발견한 것이다. 실제 박 목사 부부는 시골에서 20년 동안 지낸 뒤 7년 전부터 부산 동구 초량동 좋은나무교회에서 젊은 예수의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2003년 평검사들이 텔레비전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맞장을 뜨는 것을 보면서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흐뭇했어요.”


 동생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다고 믿었던 주숙씨는 “동생 의기를 비롯한 많은 청년·학생이 스스로 몸을 던져 일군 민주화의 성과물들이, 현 정부가 들어선 뒤로 하나 둘 사라지고 있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한동안 무력감에서 헤어나지 못했다”며 “그럴 때마다 의기한테 미안한 마음이었다”고 말했다.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가운데서도 의기의 후배들이 27년째 행사를 이어오고 있는 것을 보면서, 그래도 희망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주숙씨가 다시 마음을 추스린 것은 13일 서강대에서 열린 추모집회에 다녀오고서다. 의기씨의 얼굴도 모르는 대학생들이 시대정신을 이어받겠다고 다짐하는 것을 보고 들은 때문이다.

 “광주 시민 여러분. 국민이 80년 5월의 광주를 잊고 사는 것이 서운하겠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분들의 뜻을 기억하는 국민도 많습니다. 힘내세요.” 주숙씨는 이 말을 광주 시민들한테 꼭 전해달라고 했다.

부산/ 김광수 기자 k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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