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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전국일반

“80년의 상처, 이제야 아무는 듯”

등록 2012-05-18 09:44

김태수씨
김태수씨
치유모임서 새삶 찾은5·18 부상자 김태수씨
부상자 돕다 다리에 총맞고
군인들 군홧발 세례에 ‘실신’
100여개 파편은 제거도 못해

‘모진 후유증’ 가족에 분풀이
모임서 같은 처지 만나 속풀어
“이젠 분노·우울 이겨낼 수 있어”

‘수호천사’인 아내를 처음 만난 1984년이 떠올랐다. 입가에 웃음이 피어났다. 예쁜 꽃 한 송이를 그렸다. 보채는 어린 딸을 심하게 때렸던 1990년이 스쳤다. 가슴 한켠이 아려왔다. 이번엔 무거운 돌멩이 하나를 그렸다.

5·18부상자 김태수(56·상이5급)씨는 17일 5·18 치유모임에 참가해 자신의 인생행로를 표현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지난해 10~12월에 열린 치유모임에선 큼직한 한지 위에다 즐거웠던 때는 꽃송이를, 괴로웠던 때는 돌멩이를 그렸다. 그는 돌멩이가 훨씬 많은 이 그림을 아직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마음을 가라앉혀 다독이는 부적(?)처럼 여기기 때문이다.

김씨는 1980년 5월 광주시 동구 산수동 나전칠기 공장에서 일하던 26살의 노동자였다. 그해 5월18일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을 목격한 그는 일손을 놓고 병원으로 부상자들을 후송했다. 20일 밤 광주교도소 부근 후송 버스 안에서 잠이 들었던 그는 콩을 볶는 듯한 총소리에 놀라 잠이 깼다. 이미 오른쪽 대퇴부에 총알이 박혀 있었다. 이튿날 아침 그는 광주교도소로 끌려갔다. 수첩에 빼곡하게 적힌 동료들의 명단을 본 군인들은 그를 간첩으로 몰아붙였다. 총상을 입어 선혈이 낭자한데도 실신할 때까지 주먹질·군홧발 세례가 이어졌다. 의식이 가물가물한 채 널브러져 있던 그는 헬기에 실려 국군통합병원으로 옮겨졌다. 오른쪽 대퇴부엔 박힌 파편 100여개를 제거하다가 신경을 건드릴 경우 상태가 나빠질 수 있어 수술도 포기했다.

40여일 만에 병원 문을 나선 그는 감당할 수 없는 현실과 맞부닥쳐야 했다. 다리가 아파 쪼그려 앉지를 못하니 일을 계속할 수 없었다. 모진 구타의 후유증으로 낮에는 머리가 띵하고 밤에는 불면과 악몽에 시달렸다.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탓에 그의 몸무게는 애초 80㎏에서 50㎏으로 내려갔다. 매일같이 소주를 마시고 독한 약을 한움큼씩 털어넣었다.

그는 84년 우연히 아내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아내는 하늘이 내려준 구세주였다. 그는 “아픈 사람이 꾀죄죄하게 보여선 안 된다고 양복을 입지 않으면 나가지도 못하게 해요”라며 “아내를 만나지 못했다면 아마 진즉 자살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아내한테 늘 잘하지는 못했다. 86년 낳은 딸아이가 독한 약을 오래 먹은 때문인지 발육이 더뎠다. 정신지체라는 청천벽력이 떨어졌다. 그는 다시 바닥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90년 보상을 받았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여전히 직업을 구하지 못했고, 가해자한테 돌아가야 할 분풀이는 죄없는 가족들을 향했다. ‘폭도’라는 수군거림이 ‘또라이’, ‘망나니’, ‘술보’라는 손가락질로 바뀌었다. 식당 일을 하던 아내는 집 근처에 통닭집을 내고 묵묵하게 버텼다.

“‘트라우마’라는 얘기는 듣지도 못했죠. 안정제·진통제·이완제 따위 독한 약들을 먹다보니 몸이 축 늘어지고 늘 피곤에 쩔어있나 보다 했어요.”

이런 그가 5·18 치유모임에 참여하면서 생기를 되찾았다. 같은 처지에 있는 7명을 만나보니 증상이 자신과 비슷했다. 점차 자존감과 안정감을 되찾았다. 주변에선 “○○ 아빠가 사람 됐네”라고 놀라워했다. “전에는 분노와 우울을 처리할 수가 없었어요. 요즘에는 짜증이 나면 치유모임에서 배운 대로 복식호흡을 해봐요. 한결 마음이 누그러지죠.”

그는 다음달 광주에 문을 여는 ‘5·18 트라우마 센터’ 운영에 기대를 걸고 있다. 5·18 피해자와 가족들의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 유병률은 41.6%로 전쟁 생존병사(15%), 교통사고 피해자(12%)보다 훨씬 높다는 5·18기념재단 보고를 보았기 때문이다.

광주/글·사진 안관옥 기자 ok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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