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열강회의 기사 읽고
1921년 11월14일 만세운동
보훈처, 대통령표창 추서
1921년 11월14일 만세운동
보훈처, 대통령표창 추서
3·1운동 이후 국내 독립운동이 주춤하던 1921년 11월14일. 전남 목포시 양동 정명여학교 재학생 수십명이 정오에 울리는 오포소리를 신호로 학교 정문을 박차고 나갔다. 손에손에 태극기를 든 학생들은 2㎞쯤 떨어진 목포시내 중심가의 일본영사관과 동양척식회사로 진출했다. 독립의 염원을 가슴속에 숨긴 채 답답해하던 목포시민들도 어린 학생들의 장한 거사에 합세했다. 목포시민들은 2년 전 3·1운동을 떠올리며 단발머리 여학생들이 엮어낸 빛나는 승리를 입에서 입으로 전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일제는 가혹했다. 대열을 막아선 경찰은 15~19살 여학생 11명을 주모자로 체포했다. 이 중 곽희주·박복술은 징역 10월, 김나열·김옥실·박음전·이남순·주유금은 징역 8월의 옥고를 치러야 했다. 2명은 퇴학처분을 받고 학우들 곁을 떠나야 했다.
역사 속에 묻혀 있던 목포 정명여학교 학생들의 의로운 만세운동이 90년 만에 빛을 보게 됐다. 국가보훈처는 지난 13일 옛 목포 정명여학교(현 정명여중·고) 출신 독립운동가 7명에게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이미 고인이 된 이들은 가족의 신청 없이 보훈처에서 발굴해 독립운동가의 반열에 올랐다. 이로써 이 사건으로 체포된 11명 중 93년에 인정된 문복금, 95년에 뒤따른 김귀남 등 9명이 애국지사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천귀례·김연순 등 2명은 아직 공식적으로 조명을 받지 못한 상황이다.
김나열 선생의 딸 장경희(74)씨는 “생전에 ‘조선 사람이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유공자 지정을 한사코 마다하시던 어머니가 더 그립다”고 전했다. 이남순 선생의 조카 이상금(74)씨도 “여학생 시절 고모의 기개와 활약이 뒤늦게나마 알려진 게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정명여학교는 1903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에 의해 ‘목포여학교’로 설립됐다. 3·1운동 당시인 1919년 4월8일 목포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고, 학생독립운동이 번진 1929년 11월19일 목포에서 학생운동을 펼쳤다. 이 학교는 1937년 9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끝내 폐교됐고, 해방 이후인 1947년 9월 다시 문을 열어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정문주 정명여중 교장은 “강제 폐교 때 초기 자료 대부분이 사라졌지만 1921년 퇴학자가 확인되면 명예졸업장을 전달하겠다”고 말했다. 목포/안관옥 기자 ok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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