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오전 제65주년 제주4·3사건 희생자 위령제가 열리고 있는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에서 평화활동가들이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을 중단하라고 외치고 있다. 제주/류우종 wjryu@hani.co.kr
65돌 4·3 위령제 열린 날
평화공원서 1만 도민 추모 물결
일본인 100여명도 참석해 눈길
대통령 없는 대통령급 경비에
제주경찰청 조기 안걸어 ‘눈총’
평화공원서 1만 도민 추모 물결
일본인 100여명도 참석해 눈길
대통령 없는 대통령급 경비에
제주경찰청 조기 안걸어 ‘눈총’
제주 4·3사건이 일어난 지 65돌을 맞은 3일 제주지역에서 한국 현대사 최대의 비극인 4·3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식이 엄숙하게 거행됐다.
이날 오전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에서 열린 제65돌 제주4·3사건 희생자위령제엔 유족과 도민 등 1만여명이 참석했다.
유족들은 위패봉안소와 각명비, 행방불명인 표지석 등이 있는 곳을 찾아 희생자들의 넋을 추모했다. 지팡이를 짚고 위령제 행사장을 찾은 문규애(86·여·제주시 노형동)씨는 결혼 3년차였을 때 남편(당시 24살)을 잃었다. 문씨는 “새벽에 밥 먹다가 끌려간 게 끝”이라며 “20일 뒤 ‘도령모루’라는 곳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그때는 ‘다 살았구나’ 하는 생각밖에 없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김찬희(80·여·제주시 오라3동)씨는 당시 19살 된 오빠를 잃었다. “그때 오빠가 제주중학생이었는데 군인·경찰들이 들이닥치자 ‘우터레 도르라’(위로 뛰어라) 해서 도망가다 총살됐다. 지금도 시국(4·3사건) 이야기만 나오면 말은 나오지 않고 울음부터 나온다”며 고개를 떨궜다.
혼자서 행방불명인 표지석에서 제를 지내고 제물을 먹던 강석호(71·제주시)씨는 “1948년 8월에 아버지(당시 37살)가 고향 한경면 청수리에 할아버지 제사를 먹으러 갔는데 그때 붙잡혀 행방불명됐다”고 말했다. 그때 강씨는 6살이었다.
일본에서도 100여명의 일본인들이 4·3위령제에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도쿄에서 온 와타나베 가즈오(71)는 “재일동포들 가운데 고향에 가지 못하는 제주인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일본인들 가운데 4·3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일본의 식민지배가 없었더라면 4·3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이 책임을 느껴야 한다”고도 말했다. 오키나와에서 4·3을 공부하는 모임인 ‘한라산회’를 이끌고 위령제를 찾은 나가타 오사무(65)는 “4·3사건에서 수많은 인명이 희생된 것과 오키나와전에서 주민들이 죽어간 데서 유사성을 느꼈다.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번 위령제는 이전과 달리 사뭇 다른 분위기에서 치러졌다. 경찰의 경비력이 크게 삼엄해졌다. 그동안 총리가 참석한 4·3위령제에서는 볼 수 없었던 마약탐지견이 등장하는가 하면 금속탐지기도 공원 들머리와 행방불명인 표지석 들머리에 설치됐다. 위령제가 열리는 주변의 거친오름에도 경찰이 경비 선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해마다 위령제에 참석했다는 김아무개(54)씨는 “마치 국가원수 경호에 해당할 만큼 경비가 삼엄한 것 같다”고 말했다.
위령제 행사를 바꿀 때가 됐다는 지적도 나왔다. 4·3 때 할아버지가 희생됐다는 김태수(51·서귀포시 천지동)씨는 “현충일도 아닌데 굳이 군인을 헌화 의전에 동원할 필요가 있느냐. 민간인으로 바꾸는 방안도 생각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제주도청과 도교육청, 도의회 등은 조기를 내걸었지만, 제주경찰청은 행사장에 이르는 길가에 조기를 게양하지 않아 눈총을 샀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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