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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전국일반

전통과 천주교가 110여년 오손도손 빚어낸 공동체

등록 2013-06-09 22:30수정 2013-06-10 08:33

전남 나주시 노안면 계량마을 노안성당에서 지난달 26일 신자들이 미사를 올리고 있다.
전남 나주시 노안면 계량마을 노안성당에서 지난달 26일 신자들이 미사를 올리고 있다.
[호남 쏙] 나주시 노안면 계량마을 ‘함께 사는 문화’
유교적 전통의 대동계와 서구의 천주교 문화가 100년 넘게 녹아들어 농촌 공동체가 살아 있는 마을이 있다. 동서양 문화가 습합된 전남 나주시 노안면 계량마을을 찾아갔다.

전남 첫 ‘사제 없는 신앙공동체’
72가구 중 98%가 천주교 신자

‘대동계’ 전통으로 마을 공동운영
대소사 함께 논의·설날 합동세배

농민운동 활발하고 유기농 열성
“외지인 이사 원해도 빈집 없어”

“돌아가시려는 영감, 내가 세례를 줬다니께….”

전남 나주시 노안면 양천리 계량마을 천주교 노안성당 마당에서 지난달 26일 오전 만난 김성순(92·세례명 사비나) 할머니는 마을로 가는 셔틀버스를 타려던 참이었다. 머리를 빗어 올려 비녀를 꽂고 흰 고무신을 신은 할머니의 모습이 단아했다. 함평군 학교면이 친정인 김 할머니는 “20대 각시 때부터 믿었다”고 했다. 4남2녀 자녀들도 모두 자연스레 천주교를 믿고 있다. 20여년 전 할아버지가 세상을 뜨기 직전 샘물을 떠와 세례를 주고 바오로라는 세례명을 줬다고 했다.

계량마을은 113년 전 천주교 광주대교구에서 천주교 공소(사제가 없는 작은 신앙공동체)가 처음 들어선 곳이다. 계량공소가 생긴 것은 산 너머 마을인 함평군 나산면에서 한약방을 하던 천주교 신자 정락의 영향 때문이었다. 천주교 박해를 피해 왔던 부친의 가업을 이은 그는 1897년 무렵부터 한약을 지으러 온 계량마을 주민들에게 <천주경>과 <성모경>의 구절을 적어주며, “외우고 약을 드시라”고 권유했다. 이를 계기로 신앙에 눈을 뜨게 된 이진서 등 3명은 1900년 무안군 몽탄면에서 휴양중이던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고 계량에 공소를 차렸다. 이영선(51) 노안성당 주임신부는 “전남지역 최초의 자발적 천주교 공동체였다. 나주성당과 광주 북동성당이 계량공소에서 분할해 나갔다”고 말했다. 노안성당은 목포 산정동 본당과 함께 광주대교구가 발전하는 데 초석을 닦은 곳으로 꼽힌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어르신들이 많았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어르신들이 많았다.
노안성당은 천주교 박해를 딛고 선 그 역사만큼 넉넉하고 차분한 느낌을 줬다. 돌을 쌓아 3면에 아치를 둔 성당 출입구와 붉은색 벽돌이 어울려 단아하고 아름답다. 1908년 프랑스인 카다르 신부가 40평 규모의 ‘초가 성당’을 마련하고, 손수 벽돌을 찍어 2층 양옥 사제관을 신축했다. 지금 성당은 1927년 사제관을 십자형 서구식 성당으로 증축한 외양이 그대로 이어져 내려왔다. 노안성당은 대표적 근대 성당건축물로서, 2002년 9월 근대문화재 44호로 등록됐다. 계량마을 등 15개 마을에 1000여명가량이 노안성당 교적을 갖고 있지만, 일요일 미사엔 80~90여명이 나온다. 계량마을은 72가구 141여명 가운데 98%가 천주교 신자일 정도로 주민들의 삶이 천주교와 밀접하다.

“성당이 있어서인지 마을이 온순해요. 외지인들에 대해 텃세도 없고요.”

유아세례를 받은 신자 김종관(51·세례명 안토니오)씨는 이날 마을 앞 논에서 트랙터로 ‘로타리를 치고’(모를 심기 전에 물 댄 논을 갈아엎는 써래질을 하고) 있었다. 첫 논일이라 일손이 바빠 이날 미사에 참여하지 못했다며 계면쩍어하던 김씨는 “신앙심이 여느 마을보다 두터운 것 말고도 마을 분위기가 조금 다르다”고 했다.

계량마을의 독특한 또 하나의 전통은 1894년부터 119년째 마을 대동계가 이어져오고 있다는 점이다. 누렇게 바랜 <계량마을 대동보>엔 “일본 헌병 낮에는 의병 잡으러 순시”(1905년), “이제 조선말도 자유스럽게 하게 되었다”(1945년 해방), “천지가 개벽하듯이 전기가 들어왔다”(1965년) 등 마을 역사도 꼼꼼하게 기록돼 있었다. 김용남(70·세례명 스테파노)씨는 “지금도 설날이면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어르신들에게 공동 세배를 올린다. 대소사도 마을회의에서 결정한다”고 말했다.

대동계라는 고유의 전통과 천주교 신앙이 습합된 계량마을은 일찍부터 공동체 운동이 활발했다. 지난달 26일 성당에서 미사가 끝나자 “유기농 천연약제가 마련돼 있으니 고추에 뿌려서 풍년 농사하십시오”라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안내 방송을 한 신자는 92살 김성순 할머니의 장남 김승한(64)씨였다. 그는 7년 전 서울에서 퇴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2만8264㎡(2500평)의 밭에 제초제를 쓰지 않고 고추 농사를 짓고 있다. 김 할머니는 장남 부부에게 “풀에 농약 좀 하라”고 성화다. 할머니는 “아들이 내 말을 안 듣고 신부님 말씀만 듣고 유기농을 해”라고 말했다. 며느리 이옥자(62)씨는 “유기농 농사가 힘들지만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한국가톨릭농민회가 일찍부터 조직됐던 노안면은 농민운동이 활발했던 나주시에서도 농민 시위대가 가장 셌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농촌 살리기 투쟁의 와중에서도 계량마을 농민들은 가톨릭농민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2006년께부터 유기농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유기농 농사가 본격화한 것은 2008년 8월 이영선(작은 사진) 신부가 주임신부로 부임해 온 뒤부터였다. 이 신부는 충북 괴산군에서 자연농법을 익힌 뒤 성당 안 공동작업장에서 천연약제를 만들어 공급하고 있다. 페트병 1개 분량을 500원에 싸게 판다. 이 신부는 “매운 고추와 독초, 은행잎 등 섞어 배양한 뒤 회충 기피제 등으로 천연농약을 만든다”고 말했다. 성당 신자 40여명이 유기농에 열성적이다.

이 신부도 농사를 짓는다. 지난달 17일 아침 노안성당 사제관에서 만난 이 신부는 ‘농사를 짓게 된 계기’를 묻자, “예수님도 직업이 농부이셨다. 노동이 중요하다. 손에 괭이가 없으면 사람의 머리를 괴롭힌다”고 대답했다. 그는 신학생들과 함께 10마지기 논을 빌려 손수 농사를 짓고 있다. 사제관 어귀엔 장화와 괭이·삽 같은 농기구들이 놓여 있었다. 그는 “농사지을 때는 농노(농업노동자)가 된다”며 웃었다. 대학 졸업 뒤 신학교에 입학했던 이 신부는 대학 2학년 때인 1988년 가톨릭농민회 입회 교육을 받았을 정도로 농사에 흥미를 느꼈다. 그는 농사는 ‘농노’들의 노동이 모아져야 결실을 맺는다고 말했다.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이라면서.

1993년 신부 서품을 받은 그가 1996년 영광성당에서 봉직할 때 3년 반 동안 영광 원전 3·4호기 건설 반대 투쟁의 선봉에 섰던 것도 공동체를 살려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고 했다. 운전면허증을 따지 않고 승용차 없이 지내는 그는 60여가지 약초를 발효시켜 효소를 만든다. 2007년 광주 서구 월산동성당에서 봉직할 땐 ‘시민이 만드는 밝은 세상’이라는 시민단체 발족을 주도하고 공동대표를 맡아 행정 권력의 견제에도 나섰다. 한국가톨릭농민회 담당 신부인 그는 올해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크리스마스 축제가 이 마을 신앙의 뿌리와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이 신부는 2007년 12월부터 마을에서 시작한 ‘이슬촌 크리스마스축제’에 외국여행 경험을 살려 조언해 왔다. ‘이슬촌’은 2004년 농림부에 녹색농촌체험마을 지정을 신청하면서 주민들이 지은 마을 별칭이다. ‘새벽에 맺히는 이슬을 맞고 열심히 일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성탄절 앞뒤로 도시인들을 초청해 여는 이 마을의 크리스마스 축제는 대박을 터뜨렸다. 계량마을 김종관(51) 이장은 “마을의 공동체적 전통이 축제 성공의 원동력이 됐다”고 말했다.

축제 무렵이면 마을 들머리에서 성당까지 1㎞의 이팝나무 길을 오색 꼬마전구로 장식하고, 성당 앞에 은하수 터널을 만들어 불을 밝히는 것은 청장년층의 몫이다. 마을 어르신들은 산타 할아버지로 변신한다. 여성들은 고사리·토란대, 콩·수수 같은 잡곡류, 배즙 등 농산물을 팔아서 일정액을 마을기금으로 모은다. “농촌의 공동체 전통이 살아 있어요. 그래서 젊은이들이 고향으로 돌아오는지도 모르겠어요. 외지인들이 이사를 오려고 해도 빈집이 없을 정도예요.” 4년 전 귀향했다는 주민 김재평(44)씨가 귀띔했다.

나주/글·사진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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