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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탑 쌓듯 공들인 ‘연 사랑 12년’…천만송이 연꽃을 피우다

등록 2013-06-23 21:33수정 2013-06-24 20:34

충남 부여군 고도문화사업소 이계영 팀장이 지난 18일 부여읍 궁남지에서 연을 보살피다가 장맛비가 거세지자 연잎을 우산 삼아 비를 피하고 있다.
충남 부여군 고도문화사업소 이계영 팀장이 지난 18일 부여읍 궁남지에서 연을 보살피다가 장맛비가 거세지자 연잎을 우산 삼아 비를 피하고 있다.
[충청·강원 쏙] 부여 ‘궁남지 산증인’ 이계영 팀장
해마다 한여름이면 연꽃 천만송이가 들불처럼 피어나는 곳이 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서동과 선화공주의 설화만 전할 뿐 그저 방치됐던 땅에 10여년 세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2001년 6월27일입니다.”

올해 들어 첫 장맛비가 퍼붓던 18일, 충남 부여군 고도문화사업소 이계영(57) 문화재관리팀장을 만났다. 반바지에 슬리퍼, 비옷을 걸친 그는 오토바이를 타고 부여군청에 나타났다. 여름철 그의 한결같은 차림새란다. 이 팀장이 대번에 기억해낸 날짜는 이날처럼 억수같이 내리는 비를 맞으며 홍수련 300촉을 한땀한땀 심은 날이었다. 1990년대 문화재 발굴조사 뒤 공사판처럼 버려져 있던 궁남지(사적 135호)가 ‘연꽃 세상’으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공공근로사업 마지막날이었어요. 그때 심은 홍수련이 지금도 여기 있죠.”

다른 무엇도 아닌 연을 고른 까닭은 무엇일까. 궁남지는 백제 무왕(서동)과 신라 선화공주의 사랑 이야기가 전하는 곳이다. 불교와 사랑, 그리고 주변이 온통 논이니 수생식물이 좋겠다는 데 마음이 닿았다. 이 팀장이 연과 인연한 내력이다. “첨엔 잘 몰라서 조심스러우니까 연이 나는 대로 그냥 두기만 했어요.” 해를 넘긴 2002년에야 그는 백련 종근(씨뿌리)을 사다 1만5000㎡에 심었다. “그해 단오축제를 궁남지에서 처음 열었는데 연이 살살 올라오더라고요. 자신감이 붙었죠.”

노동운동 했던 집념과 땀방울에
잘린 손가락과 피부병·습진은 ‘훈장’
공사판처럼 버려졌던 연못은
선화공주 사랑 담긴 연꽃세상으로
“30개월뒤 퇴직…더 일하고 싶은데…”

12년을 하루같이 연과 함께한 세월은 그야말로 무너질까 조바심치며 돌탑 쌓듯 공을 들인 시간이었다. “연꽃이 피면 씨가 되지 않도록 잘라줘야 해요. 그래야 꽃이 더 무성하게 피거든요.” 한여름 궁남지에는 38만5918㎡에 홍련·백련·황금련·수련은 물론 빅토리아연·대하연·가시연까지 50여종 천만송이가 꽃을 피운다. 연마다 3~5차례 꽃을 피우니 우리나라 인구수만큼 연꽃송이가 궁남지를 가득 채웠다 사라지는 셈이다.

“벼가 농부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 있죠? 여기 연꽃들은 제가 하루에 다섯 차례는 바라보고 만져줘야 꽃이 핍니다.” 그는 요즘도 새벽 5시30분이면 궁남지에 나타난다. ‘애마’라고 부르는 배기량 110㏄ 오토바이에다 선비의 문방사우에 비견될 ‘삽, 집게, 공구, 쓰레기봉투’ 네가지를 싣고 궁남지 구석구석 10여㎞를 줄기차게 누빈다. 1년 6개월 된 오토바이는 누적 운행거리가 2만㎞를 훌쩍 넘겼다.

애초 연에 문외한이던 그는 연꽃 재배법을 익히려고 전문서적을 공부하다 전국 어디든 연이 있다는 말만 들리면 쫓아갔다. 주인장과 거나하게 술잔을 주고받은 뒤 귀한 연뿌리를 얻어온 적도 있다. 이제는 경북 경주(안압지), 대전(유림공원), 아산(신정호), 경기 시흥(관곡지) 등 수십곳에서 그를 찾는다. 2006년에는 서울 청계천과 어린이대공원에 궁남지 연꽃을 시집보내기도 했다.

그는 부여중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다. 1980년 군 제대 뒤 포항제철(포스코)에 공채로 입사했다. 불합리·부조리를 못 참는 성격 탓에 4년 만에 그만두고 아파트 관리사무소장 일을 했다. 여기서도 사달이 났다. 아파트 수선 공사 뒤 남은 잔금을 공금통장에 입금하자, 주민 대표들이 ‘그건 관례적으로 우리가 써왔다’며 돌려달라고 한 것이다. 거절하고는 소장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1988년 포항제철 하청업체에 취업해선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노동조합을 만들고 당시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창립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이때 그는 단병호 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을 만났다. 하지만 그사이 가정은 풍비박산 직전이었다고 한다. “부인이 부여에 같이 안 가면 이혼하겠다고 하더라고요. 유치원 다니던 아들도 있었으니까…. 나도 경찰에 쫓기는 처지였는데 공교롭게도 내가 부여로 떠난 이튿날 단병호씨가 포항고속버스터미널에서 경찰에 체포됐어요.”

고향에 돌아온 그는 때마침 부여군에서 기능직 공무원(방호원)을 뽑는다길래 지원해 합격했다. 1991년 1월1일부터 사적지 관리 업무를 맡았다. 그런데 세상과 또 맞서야 했다. 부소산성 인근에 노점과 도박시설 등이 수십곳 난립해 있었다. “국공유지를 제집처럼 쓰고 있는 불법 시설물들이었어요. 계고장을 보낸 뒤 철거했지요. 불만 품은 두 형제가 흉기와 몽둥이를 들고 쫓아와 협박까지 했습니다.” 성과를 인정받은 그는 1996년 10월 문화재전문요원(별정직)으로 전환된 뒤 부소산성과 나성, 정림사지, 궁남지에다 능산리 고분군까지 잔디 관리를 도맡았다. 이때 붙은 별명이 ‘예초기의 달인’이다. 아파트 관리사무소장 때 예초기를 써본 경험을 살렸다. “사람들이 다 낫을 들고 그 넓은 봉분과 풀밭을 다니더라고요.” 둥그런 봉분이 미끄러워 작업이 더디자 그가 뽕(스터드) 달린 축구화를 신고서 하루에 봉분 7곳의 작업을 모두 끝낸 것은 전설 같은 일화로 남아 있다.

위험한 순간도 있었다. 1998년 4월 병충해 방제작업 때 사고로 왼손 검지 한마디를 잃었다. “추운 겨울이면 요기만 피가 나고 터요. 골무나 테이프를 감고 일을 해도 그래요.” 일일이 연이 있는 50㎝ 깊이 물속에 들어가 작업을 하니 거머리가 달라붙는 건 예사다. 피부병과 습진은 차라리 ‘훈장’처럼 여긴다. 2011년에는 긴 장마로 연꽃이 늦게 피는 바람에 축제가 원활치 못했다. 황소 같은 덩치의 그는 직원들 앞에서 펑펑 울었다.

이 팀장은 2년 6개월 뒤 정년을 맞는다. 과연 누가 뒤를 이을까? “퇴직하더라도 한 10년 이상은 더 일을 하고 싶죠. 하지만 제가 먼저 그렇게 해달라고 말을 꺼낼 수는 없잖아요.” 그동안 온몸으로 익힌 연꽃 재배·관리 기술을 ‘작업 표준서’로 정리하는 일도 서두르고 있다. 연꽃과 야생화가 어우러진 궁남지의 사계절을 온전히 일구는 게 그의 남은 목표다. “사실 연꽃에 미친 듯이 매달린 건 노동운동 했던 과거를 잊으려는 몸부림이었어요. 그래도 지난해 2월까지 2년 2개월 동안 부여군 공무원노동조합 지부장을 맡았죠. 후배들을 도와주지 않을 수 없었거든요. 연꽃이나 문화재나 무엇보다 관리가 중요하기 때문에 더더욱 매달린 것뿐입니다.”

‘연꽃애비’ ‘궁남지 밀짚모자 아저씨’ ‘연박사’ ‘공포의 반바지’ ‘연꽃보다 아름다운 남자’…. 천만송이 연잎들에 떨어져 또르르 굴렀을 그의 수많은 땀방울을 기억하는 이들이 건넨 별명들이다.

부여/글·사진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사진 부여군 제공
사진 부여군 제공

서동설화에 빠지고 연꽃내음에 취하고

내달 18일부터 나흘간 축제
38만㎡에 50여종 천만송이 재배
부여 별미 ‘연잎음식’ 맛볼 기회

충남 부여군 ‘부여 궁남지’는 <삼국사기> 백제 무왕조 기록에 근거를 둔 이름이다. “무왕 35년(634년) 궁의 남쪽에 연못을 파서 물을 20여리 끌어들였다.… 39년(638년) 봄 왕과 왕비가 큰 연못에 배를 띄웠다.”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정원으로, 경북 경주 안압지보다 40년 앞선다. 궁남지 한가운데 연못에는 백제 무왕의 탄생설화가 깃든 ‘포룡정’이 있다.

부여군 고도문화사업소 이계영 팀장이 2001년 연꽃을 처음 심은 뒤 2003년 8월2일 1회 연꽃축제가 궁남지에서 열리면서 국내 최대 연꽃단지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희귀연들도 여럿 있다. 남아메리카 아마존강 유역에서 자생하는 빅토리아연은 연잎이 최대 2m 가까이 자라는 까닭에 어린아이가 올라타도 가라앉지 않을 정도다. 1951년 일본 지바시에서 2000년 전의 연씨를 발견한 뒤 싹을 틔우는 데 성공한 대하연도 있다. 2002년 이 팀장이 전남 무안 화산방죽에서 채집한 씨앗을 발아시킨 토종 가시연도 볼거리다.

연꽃축제가 성공을 거두자 부여군은 2007년 이 팀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군의 상징꽃을 개나리에서 연꽃으로 바꿨다. 연잎을 이용한 연잎밥, 연잎국수, 연잎냉면 등을 부여밥상연구회 회원 식당 15곳에서 맛볼 수 있다. 부여군 공보계 이재민 주무관은 “경주에 황남빵이 있다면 부여에는 연꽃빵이 있다”고 말했다.

11회째를 맞은 연꽃축제는 다음달 18~21일 궁남지와 화지산, 군수리 사지를 아우른 부여서동공원에서 열린다. 올핸 산책길에 야간 경관조명을 설치해 분위기를 한껏 냈다. (041)830-2921~2.

전진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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