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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전국일반

“벌은 내 운명”

등록 2013-07-14 21:17

3대째 토종벌을 키워온 김대립(가운데)씨가 지난 9일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뒷산에서 낭충봉아부패병에 걸리지 않은 꿀벌이 든 벌통을 토종벌 지킴이 회원들에게 기증한 뒤 이들과 함께 벌통을 옮기고 있다.
3대째 토종벌을 키워온 김대립(가운데)씨가 지난 9일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뒷산에서 낭충봉아부패병에 걸리지 않은 꿀벌이 든 벌통을 토종벌 지킴이 회원들에게 기증한 뒤 이들과 함께 벌통을 옮기고 있다.
[충청·강원 쏙] 3대 가업 노총각 ‘토종벌 지킴이’의 사투
전국에서 토종벌이 사라져가고 있다. 낭충봉아부패병 때문이다. 토종벌의 98~99%가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다고 한다. 아직 원인도, 해결책도 찾지 못하고 있다. 토종벌 3대 가업을 이은 노총각이 ‘괴질’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꿀벌이 사라지면 인류는 4년 안에 멸망한다.”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의 말이다. 그가 예언처럼 남긴 말에는 과학이 숨어 있다. 농작물을 포함해 지구상 식물 70%를 곤충이 수정하고,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을 꿀벌에 의존한다. 따라서 꿀벌이 사라지면 과일은 물론 식량 자원도 줄게 돼 지구는 인류가 살 수 없는 공간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예언을 떠올리는 이들이 있다. 토종벌을 키우는 전국의 한봉업자들이다. 2010년 이후 3년 동안 벌 90% 이상을 잃었다. ‘낭충봉아부패병’이라는 토종벌 전염병 때문이다.

9일 저녁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녹색농촌 체험마을 강의실에서는 새까만 얼굴을 한 농부 20여명이 얼굴이 앳된 교수의 열강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희끗희끗한, 듬성듬성한 머리의 늙수그레한 할아버지들도, 털북숭이 아저씨도 ‘앵앵’ 하며 팔다리를 괴롭히는 산모기를 아랑곳하지 않고 ‘열공중’이었다.

농림축산식품부가 현장실습 교수로 위촉한 김대립(39)씨는 이날 모인 이들 가운데 가장 젊었다. 그는 청원군 낭성면 추정리에서 3대째 토종벌을 키운다. 까까머리 아홉살 때부터 토종벌을 키워온 30년 베테랑이다. 한국전쟁마저 비켜간 첩첩산골 고즈넉한 마을에서 어릴 적 그의 유일한 친구는 꿀벌이었다. 할아버지, 아버지(78), 삼촌(50) 모두 종일 100~150통에 이르는 벌통에 매달려 지냈다.

건강한 꿀벌들이 몰려 있는 김대립씨의 벌통.
건강한 꿀벌들이 몰려 있는 김대립씨의 벌통.
벌과 함께한 30년
꿀벌을 달래고 어르고 살았다
이젠 괴질 잡는 데에 목숨 건다
벌을 살린 뒤 결혼할 생각이다

토종벌이 죽어간다
‘낭충봉아부패병’ 때문이다
치료법은 아직 찾지 못했다
벌이 사라지면 사람도 죽는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뒤 할아버지·아버지 등 가족 모두 벌 때문에 정신이 없었어요. 오죽하면 남들보다 한해 늦은 아홉살에 학교에 들어갔을까요. 저도 사실 학교 가는 것보다 벌 돌보는 게 더 즐겁긴 했지요. 하하.”

아침 등교할 땐 벌통에 달려가 “잠깐만 기다려, 학교 갔다 올게”라고 인사하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가방을 내팽개치기 무섭게 다시 “꿀벌아 잘 있었니” 하고 안부를 물었다. “벌통에 얼씬거리지 말고 숙제나 하라”는 할아버지의 지청구는 귓등으로 들었다. 아들이 벌에 집착하자 아버지는 “한번 키워 볼텨?”라는 말과 함께 ‘대립이 벌’이라고 쓴 벌통을 건넸다. 그의 30년 양봉 인생의 출발점이었다. “그날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죠. 너무나 좋아서 한달 동안은 그냥 실실 웃으면서 지냈죠.” 어른들은 “자꾸 열믄 꿀 안 달리는겨. 참고 기다려야 꿀 맺히는겨”라고 했지만, 그는 하루에 열두번도 더 벌통을 여닫고, 꿀벌을 만지고, 달래고, 어르고 놀았다.

초등학교 3학년 무렵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그는 할아버지 몫 벌통까지 떠안았다. 벌통을 옮기는 힘든 일은 삼촌·아버지가 했지만, 그는 여왕벌이 일벌의 일부와 함께 벌집에서 나와 다른 집을 만드는 분봉 과정의 벌을 지키고 꿀을 따는 일 등을 척척 해냈다. 2년 뒤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겪자 삼촌과 양봉일을 양분할 정도였다. “분명 몸은 힘든데 마음은 편안했어요. 자려고 누우면 귓속으로 윙윙 소리가 나고 머릿속은 벌통과 꿀이 차지했어요. 고등학생 무렵 벌이 내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집에서 가장 가까운 미원공고를 택한 그는 입학하자마자 교무실 문을 열었다. “학교에서 벌을 키우면 안 될까요? 학교에 꽃이 많으니까 잘 자랄 테고, 꿀 따서 나눠 먹으면 좋을 텐데….” 학생들이 쏘이지 않게 관리한다는 조건으로 허락받기 무섭게 옥상에 벌통을 설치했다. 친구들이 운동장에서 뛰놀 때 그는 벌과 놀았다. 미원공고 전자과를 졸업하고 충청대 전자공학과에 다닐 때도 학교 옥상에 벌통을 두고 벌을 돌봤다.

“어렸을 때는 벌과 노는 게 좋아 옆에 뒀는데, 대학 땐 벌을 연구하고 싶어서 곁에 뒀어요. 전공 공부는 뒷전이고 벌 공부에 열중했죠.”

이 무렵 그는 벌 관련 특허 7건을 따냈다. 토종벌 습성 때문에 도저히 안 된다던 인공분봉법, 빈 벌집이 없는 토종벌꿀 생산법, 토종벌통을 이용한 침입벌 퇴치법, 벌통 보온 자동개폐 장치 등을 개발했고, 토종벌꿀 구조 및 벌꿀 수확 방법이라는 논문을 썼다.

인공분봉법 등을 통해 할아버지·아버지 때보다 4배 많은 400~500통으로 벌통을 늘렸다. 질 좋은 꿀을 생산해 서울의 유명 백화점에 납품하면서 해마다 억대의 짭짤한 수입을 올렸다. 이런 성과로 그는 29살이던 2003년 최연소 신지식 농업인(136호)에 지정됐고, 2006년엔 충북 바이오농업 대상을 받았다. “벌에 관한 한 누구에게도 뒤지고 싶지 않아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했죠.”

하지만 2010년 여름 무렵 위기가 찾아왔다. 낭충봉아부패병이었다. 2009년 4월께 국내에서 발병이 보고된 뒤 2010년 이후 전국의 토종벌을 초토화시키고 있다. 면역력이 약해진 토종벌이 바이러스에 감염돼, 이틀 만에 물집이 커졌다가 피부가 굳어지면서 말라 죽어나갔다. 한마디로 ‘괴질’이었다. 원인도 몰랐고 치료법도 없었다. ‘토종벌 에이즈’라고도 했다. 파급력은 에이즈보다 훨씬 더했다.

농식품부가 12일 밝힌 자료를 보면, 2009년 전국의 토종벌 사육은 38만3418통(한통에 1만마리 안팎 서식)이었지만 2010년 17만1827통으로 반토막난 뒤 2011년에는 10만756통으로 줄었다. 김미연 한국한봉협회 사무국장은 “지난해 4만통 정도로 줄었고 지금은 1만통 안팎만 살아남았다고 추정한다”고 말했다. 농식품부와 국립수의과학검역원 등은 이 병의 원인과 치료법을 찾는 데 힘쓰고 있지만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다만 농촌진흥청은 지난해부터 토종벌의 면역력을 키워주는 면역증강제, 토종벌 생태를 수시로 살필 수 있는 개량벌통 등을 농가에 보급하고 있다.

“정말 미치겠더라고요. 평생 토종벌을 키운 선배 농업인, 난다 긴다 하는 토종벌 전문가를 찾아가 자문을 구하고, 벌 관련 서적·논문 등을 살펴보고, 벌에 좋다는 약제 등도 먹여봤지만 속수무책이었어요. 피가 마르는 심정이었죠.”

그해 절반을 잃고, 이듬해 또 절반을 잃고, 지난해 또 절반을 잃었다. 남은 것은 50통 남짓, 그나마 다른 농가에 견주면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아마 국내 토종벌의 95% 이상이 폐사했을 겁니다. 그나마 남은 것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죠.”

절망 속에서도 그를 벌과 떼어놓지 않은 것은 전국에서 토종벌을 키우는 동료들이었다. 2011년 전국의 ‘토종 벌쟁이’ 23명과 ‘토종벌 지킴이’(줄여서 ‘토지’)를 꾸렸다. 작은 정보도 공유하고 수시로 모여 토론했다. 민간인 출입통제선 안 마을과 제주 서귀포 등 청정 환경에서 키워보기도 했고, 농촌진흥청과 공동 과제 연구를 하기도 했다. 치료법은 아니지만 병 진행을 더디게 하는 방법까지는 깨쳤다. 농식품부 교육문화정보원은 지난해 그를 현장실습 교수로 위촉해 전국의 토종벌 농가를 가르치게 했다.

“아직 해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낭충봉아부패병이 수중다리좀벌·응애 등 해충과 균에 의해 생겼다는 것까지는 범위를 좁혔습니다. 지금은 토종벌이 위기지만 서양벌도 같은 위기가 생길 수 있다고 봅니다. 일단 토종벌이 살아야 우리가 살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해결책을 찾아내고 말 겁니다. 이 병을 잡은 뒤 그 기념으로 결혼할 생각입니다.”

노광일 농업기술실용화재단 선임연구원은 “낭충봉아부패병 치료법을 찾으려고 전국 농가와 연구소 등을 둘러보고 있는데, 아마도 이 병은 충북 쪽에서 잡힐 것 같다. 충북에 김대립씨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청원/오윤주 기자 st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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