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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가 떠난 길에…이웃 이어주는 ‘녹색길’ 열렸다

등록 2013-11-17 20:37수정 2013-11-17 20:37

경전선 도심 구간이 폐선된 뒤 2003년부터 10년간에 걸쳐 조성된 광주 푸른길 공원에서 시민들이 한가롭게 걷고 있다. 광주광역시 제공
경전선 도심 구간이 폐선된 뒤 2003년부터 10년간에 걸쳐 조성된 광주 푸른길 공원에서 시민들이 한가롭게 걷고 있다. 광주광역시 제공
[현장 쏙] 도시혁신, 우리동네를 찾아서 ⑤ 광주의 푸른길 만들기
철길 레일을 걷어내고사람 다니는 푸른길을 이었다. 나무를 심고 작은 광장을 만들었다. 광주광역시 환경단체, 주민들, 지방자치단체가 10년에 걸쳐 폐선 터를 공원으로 조성했다. 도심 쉼터를 넘어 문화공간과 마을공동체의 거점으로 진화중이다.

“푸른길에서 산책도 하고, 운동도 해요. 사시사철 꽃도 보고 나무도 보고, 이웃과 얘기도 하고…, 그래서 좋습니다.”

13일 오후 광주광역시 남구 주월동 ‘푸른길 공원’에서 운동기구를 타던 서귀자(54)씨는 예전 철길 주변 을씨년스런 풍경을 들려줬다. “자다가 열차 소리에 깨고 그랬지요. 저쪽으로 철길 옆에 고랑이 있었는데, 위험하기도 하고 말도 못하게 지저분했지요.” 경전선의 광주 도심 광주역~효천역 구간의 열차 운행이 2000년 8월 중단된 뒤, 철길 레일을 걷어낸 터에다 조성한 것이 푸른길 공원이다. 지난 3월, 공사 10년 만에 좁고 기다란 폐선 터 8.2㎞(12만227.6㎡)에 공원이 완공됐다.

■ 민관 거버넌스(협치)로 철길 재생 옛 철길을 공원으로 바꾼 것은 시민단체와 주민,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협력한 열매라는 게 광주 지역사회의 전반적인 평가다.

광주 도심을 지나는 경전선 구간은 건널목 교통 혼잡, 인명사고 등을 부르는 요인이었다. 시민들은 1988년 6월 도심철도 이설 추진위원회를 꾸렸고, 노태우 전 대통령의 공약 사업으로 채택됐다. 1995년 철도 이설이 결정됐다. 주민들은 도로로 활용하자고 했고, 환경단체는 공원 조성을 주장했다. 지방정부는 개발 쪽에 무게를 뒀다.

“미국 환경연구기관 월드워치연구소의 잡지에서 미국·유럽의 철도 폐선 터에 보행자를 위한 숲을 조성하고 ‘그린웨이’라고 명명했다는 글을 봤어요. 눈이 번쩍 뜨였지요.” 임낙평(55) 광주환경운동연합 공동의장의 회고다. 광주시가 98년 철도 폐선 터에 경전철을 도입하려고 용역을 시작하자 환경단체와 주민들이 반발하며 연대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2000년 8월10일 광주발 여수행 열차를 마지막으로 경전선 도심 구간은 폐선됐다.

2002년 3월 광주환경운동연합 등 10여 단체가 ‘푸른길 가꾸기 운동본부’를 결성했다. 철길 주변 폭 1㎞의 주거지역 인구는 대략 30만명, 당시 광주 인구의 25%로 추정됐는데, 도심 공원은 매우 부족했다.

그해 12월 광주시는 경전철 도입 포기 결정을 밝힌 뒤 도시계획에 푸른길 공원 조성안을 반영했다. 광주시는 1100억원으로 평가되던 폐선 터를 철도시설관리공단으로부터 550억원에 매입하되 도심 외곽에 대체 철길(송정역~서광주역~효천역)을 깔아주기로 했다. 초대 운동본부장을 맡았던 송인성(65) 전남대 교수(경제학부)는 “운동본부가 시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냈고, 행정의 파트너가 돼 푸른길 조성에 머리를 맞댔다”고 말했다.

광주시는 10년 동안 278억원을 투입하고 푸른길 가꾸기 운동본부, 전문가 그룹과 협의하면서 단계적으로 조성했다. 녹지공간(7만6059㎡), 광장(1만1921㎡), 놀이터(618㎡)를 꾸몄고 자전거도로(2만4574㎡)도 만들었다. 느티나무, 밤나무, 졸참나무 등 46종의 나무 31만2000그루를 심고, 운동시설 69종과 정자·의자·분수·쉼터 등 공원시설 45종을 설치했다.

시민들도 공원 조성에 참여했다. 1만여명이 1만원부터 1000만원까지 헌수기금으로 약 5억원을 내놓았다. 남구 주월동과 동구 계림동에 ‘참여의 숲’을 조성하면서 나무 종류 결정, 조경 등 설계에 참여했다. 지금도 참여의 숲 나무들엔 “사랑하는 ○○이의 건강을 바라며. 엄마·아빠가” 같은 사연 적힌 이름표가 달려 있다.

2011년 사단법인 푸른길(이사장 이근우)이 발족해 민관 협치의 새로운 파트너가 됐다. 지난해 12월엔 ‘광주광역시 푸른길 공원 시민참여 관리·운영 조례안’이 광주시의회에서 통과돼, 푸른길 공원의 관리·운영을 시민단체에 맡길 제도적 근거도 마련됐다.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경전선의 광주 도심 구간(광주역~효천역)은 교통 흐름을 방해하고 인명 사고를 불러오는 요인이었다.  사단법인 푸른길 제공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경전선의 광주 도심 구간(광주역~효천역)은 교통 흐름을 방해하고 인명 사고를 불러오는 요인이었다. 사단법인 푸른길 제공

광주시-주민-환경단체 손잡고
‘위험한 흉물’ 철도 폐선 부지에
전국 최초로 8.2㎞ 공원 만들어
녹지공간·자전거도로 등 조성

음악회 등 문화공동체공연 열고
다문화가정 마을기업 힘보태며
‘만남과 소통의 장’ 구실 톡톡

■ 문화와 공동체의 향기가… 푸른길은 문화공간으로 진화하고 있다. 벤치에 앉아 있거나 걷다 보면 무시로 음악이 들리곤 한다. 아마추어 동호인들의 문화공연이 시시때때로 열린다. 10월27일 동구 산수도서관 옆 푸른길 분수공원에서 열린 3회 푸른길 작은음악회의 출연자들은 맘마스 아코디언 동호회 회원들, 아마추어 트로트 가수 등 아마추어 예술인들이었다. 문화 공연이 자주 열리면서 풀뿌리 문화운동의 중요한 거점이 되고 있다.

푸른길 공원 조성운동의 거점인 남광주역 푸른길에서도 음악회와 인문학 강좌 등이 활발하게 열린다. 옛 남광주역 터엔 열차 2량을 옮겨와 작은도서관과 카페로 꾸몄다. 백운동 푸른길엔 주황색 상자 모양의 작은도서관이 생겼다. 동명동 주민커뮤니티센터도 ‘도서관에서 1박2일’ 행사를 운영하는 등 주민들이 나서서 꾸려가는 쉼터로 거듭나고 있다.

동구 동명동 옛 농장다리 푸른길 주변엔 문화공간들이 속속 들어오고 있다. 지난 5월 철길 옆 한옥을 개조한 찻집 겸 문화공간 ‘신시와’가 문을 열었고, 200m 떨어진 곳엔 신양호 화백의 작업실이 있다. 금속공예 작가와 음악인 2명도 푸른길 옆 한옥을 고쳐 입주할 예정이다. 농장다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산울림 음악카페와 카페 ‘소소한 풍경’도 새 둥지를 틀었다.

폐선 구간 다른 쪽 끝 남구 대촌동에는 전통놀이패 얼쑤가 있고, 동구 농장다리 부근엔 문화단체 굴림과 예술인협동조합, 공예협동조합(양림동) 등이 있다. 신시와 대표 박성현(51)씨는 “푸른길 주변 한옥 2채를 게스트하우스로 꾸미자고 동구청에 제안해놓았다”고 말했다.

푸른길은 마을공동체 활동을 활성화하는 계기로도 작용한다. 주월동 푸른길 옆에 ‘주월싱싱봉제사업단’이 들어섰다. 국제결혼 이주여성 10여명이 재봉틀로 앞치마, 조끼 등을 만드는 마을기업이다. 사업단장 이상복(58)씨는 “다문화가정 여성들이 봉제 기술을 익혀 푸른 꿈을 가질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말했다.

■ 푸른길과 도심 재생 옛 철길을 공원으로 재생하자, 광주시도 도심 재생에 눈을 돌렸다. 광주 남구는 푸른길 주변에 마을공동체 협력센터를 지을 계획이고, 광주 동구는 문화전시공간 등을 지으려 실시설계를 하는 중이다.

문용운 광주시 환경생태국장은 “시민과 행정이 같이하는 체제가 성공하려면 시민 신뢰가 매우 중요하다. 문학과 예술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적 뒷받침을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철길 주변 한옥 등을 철거·재개발하기보다 관광·숙박시설로 되살리자는 제안도 나온다. 독특한 주거문화 양식을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하자는 것이다.

조동범(55) 전남대 교수(조경학과)는 “10년 전만 해도 철길 주변은 재개발될 곳, 살기가 어려운 공간이라는 인식이 강했지만, 지금은 고층 아파트로 재개발하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이 꽤 확산됐다. 푸른길 조성 사업으로 시민들이 도심 땅을 공원으로 가꿀 수도 있다는 걸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2006년 이후 9곳에 재개발·주거환경개선 사업이 벌어졌다. 4곳에 아파트단지가 조성됐고 1곳은 추진중이다. 4곳은 주택 경기 침체로 제자리걸음이다. 주월동 일부 주거지구를 상업지구로 바꾸고, 동명동에선 철도 주변 주택을 헐고 도로를 내어 기찻길 옆 본래의 특색을 잃게 했다는 지적도 있다. 전문가들은 ‘푸른길과 주변 주거지역을 함께 묶어 도시계획에 반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철길 폐선 터는 서울·부산·여수·진주·원주·천안 등 전국에 480㎞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전국 최초로 폐선 터에 공원을 꾸민 광주의 푸른길은 다른 자치단체들에도 참고가 되고 있다. 서울시도 경춘선 성북역~옛 화랑대역 폐선 구간 4.2㎞에 자전거도로, 쉼터, 산책길을 조성하는 공사를 벌이는 등 자치단체들이 폐선 터의 환경적·문화적 활용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경희(40) ㈔푸른길 사무국장은 “지방자치단체 등이 폐선 터를 문화 활력과 도심 재생을 가져올 수 있는 공공용도로 쓰려는 경우, 이를 싼값에 양도할 수 있도록 하는 특별법 제정에 정부와 국회가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광주/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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