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조선이 잔교에 충돌하기 수십초 전에야 배를 세우고자 부랴부랴 닻을 내렸지만 사고를 막기엔 너무 늦었습니다.”
전남 여수국가산업단지 원유부두 기름 유출사고를 수사중인 여수해양경찰서가 4일 지에스(GS)칼텍스 원유2부두의 유조선 충돌 순간을 담은 선박항해기록장치(VDR)를 분석해 빠른 속도와 늦은 투묘(닻을 내림)가 사고의 원인이었음을 다시 확인했다. 해경이 확보한 VDR에는 31일 오전 9시35분 충돌 사고가 일어나기 직전의 상황이 생생하게 담겨 있었다. VDR은 항해 과정에서 통화나 지시내용 등 음성기록과 배의 속도, 방향 등 종합적인 정보를 초 단위로 기록하는 비행기의 블랙박스와 같은 장치다.
해경은 VDR을 분석한 결과 경력 23년의 베테랑 도선사 김아무개(65)씨도 충돌 수분 전에야 위기감을 보였다고 밝혔다.
유조선이 부두의 구조물에 충돌하지 않으려면 최소 7∼8분 전에 닻을 내려야 하는데 VDR 기록에는 충돌하기 수십초 전에야 닻을 내린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또 충돌 직전 도선사를 비롯한 조타실 안의 선원들이 당황해 웅성대는 음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해경은 유조선이 충돌 8분 전인 오전 9시27분께 9노트로 항해하다 9시30분에는 8노트로 줄였지만 충돌 시각인 9시35분까지 7노트를 유지한 것으로 확인했다. 이에 따라 왜 유조선이 접안 당시 안전속도 3~5노트를 넘어 7노트의 빠른 속도로 진입하면서 구조물과 송유관을 들이받았는지가 풀어야할 의문으로 떠올랐다.
해경은 경력 23년의 경력의 베테랑 도선사가 과속으로 접안을 시도한 것이 ‘단순 오판’으로 보기에는 석연치 않다고 판단해 마주오는 대형 선박을 피하려 했거나, 음주 항해를 했을 가능성 등을 조사했다.
하지만 선박 피항이나 음주 항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해경이 여수해상교통관제소(VTS)의 위성항법장치(GPS)를 탑재한 항로장비를 분석해보니 유조선이 접안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대형 컨테이너선과 위험할 정도로 교차하는 상황은 없었다. 또 사고 발생 직후 해경이 현장에 출동해 도선사의 음주여부를 측정했으나 술을 마신 사실은 없었다.
일부에서는 선체 결함이나 기계 고장의 가능성을 들었으나 유조선 선장과 관련 전문가들은 선체에는 전혀 이상이 없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해경은 도선사의 자만이나 실수 또는 거리·속도에 대한 착각 등에서 사고가 비롯됐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수사중이다. 해경은 김아무개(65)씨와 이아무개(59) 등 도선사 2명과 선장 김아무개(38)씨 등의 과실이 드러나면 해양환경관리법이나 형법(선박파괴죄) 위반 혐의 등을 적용할 방침이다.
광주/안관옥 기자 ok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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