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 내 행방불명인 표지석 모습.
[현장 쏙] 제주4·3 추가진상조사 2년
2003년 10월 총리실 산하 제주4·3위원회가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펴낸 지 1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4·3의 진실은 조사하면 할수록 더 나온다. 2012년 5월부터 제주4·3평화재단 차원에서 추가진상조사가 이뤄지고 있다. 추가 진상조사의 현황과 과제 등을 살펴봤다.
2003년 10월 총리실 산하 제주4·3위원회가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펴낸 지 1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4·3의 진실은 조사하면 할수록 더 나온다. 2012년 5월부터 제주4·3평화재단 차원에서 추가진상조사가 이뤄지고 있다. 추가 진상조사의 현황과 과제 등을 살펴봤다.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린 지난 25일 오후 제주의 중산간마을인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1리 노인복지회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거나 놀이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제주4·3평화재단 4·3추가진상조사단 전문위원으로 활동하는 김은희(48)·오화선(44)씨가 4·3 관련 조사를 하기 위해 회관을 방문하자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눈길이 쏠렸다.
토산리는 4·3 당시 18~40살 청장년들이 한꺼번에 희생돼 ‘무남촌’으로 불리는 마을이다. 1948년 12월18~19일 이틀 동안 군인들에 의해 표선백사장으로 끌려가 학살된 토산리 주민은 125명(남자 101명, 여자 24명)에 이른다.
4·3재단에서 왔다는 말에 소파에 앉아 있던 김임천(77)씨가 전문위원들이 자리에 앉기도 전에 “몇년 전 희생자 신청을 했는데 어떻게 되고 있느냐”고 물었다. 전문위원들은 “마을별 피해 실태를 조사하고 있다”며 조사 목적을 설명한 뒤 어르신들을 상대로 “이 마을에 신고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시냐”고 유족들의 말을 빠뜨리지 않으려고 묻고 또 물었다.
당시 18살이었지만 실제 나이보다 2살 적게 호적에 기록돼 기적적으로 살아난 정의문(83)씨는 형님이 희생됐다고 했다. 그는 “우리 앞에서 많이 죽였다. 그때는 나도 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그 옆의 유족은 “아버지 삼형제가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8살 어린 나이였던 김평우(74)씨는 “어린 나이였지만 당시 일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동안 어떻게 살아오셨냐”는 전문위원들의 말에 약속이나 한 듯이 “마을사람들이 희생된 이유를 지금도 모른다. 그게 억울하다”고 했다. 전문위원들의 이날 조사는 2시간 남짓 이뤄졌다.
■ 추가진상조사 어떻게 하나? 제주4·3평화재단(이사장 이문교)이 추진하는 추가진상조사 사업은 2003년 10월 총리실 산하 제주4·3위원회가 발간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이후 10년여 만에 이뤄지는 작업이다. 그동안 추가조사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2012년 5월 추가진상조사단(단장 박찬식)을 꾸렸다. 조사단은 단장과 전문위원 5명, 보조원 3명으로 구성됐다. 추가진상조사단의 조사 기간은 내년 4월까지 3년으로 잡았다. 조사단은 조천면, 구좌면, 성산면의 마을별 피해 실태조사를 끝내고, 표선면에 대한 조사를 벌이고 있다. 증언자 278명과 희생자 및 피해사건 3290건을 분석했다.
추가진상조사 작업은 당시 행정구역에 따라 제주도내 12개 읍·면 165개 마을을 대상으로 마을별 피해 실태(희생자 및 희생사건)에 대한 전수조사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김경훈(52) 전문위원은 “당시의 진상조사보고서가 제주4·3사건의 총론을 다룬 성격이라면, 지금 이뤄지고 있는 추가진상조사 작업은 각론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말했다.
조사단은 제주4·3위원회와 제주도의회에 제출된 신고서, 1960년대 국회 양민피해실태조사보고서 등에 나타난 희생자 실태를 작성하고 마을별로 분류작업을 했다. 이어 마을지 등 문헌자료와 2003년 보고서, 4·3 관련 자료 등을 검토한 뒤 날짜별, 희생자별(토벌대 또는 무장대에 의한 희생)로 분류해 기초자료를 만들고, 현장조사를 통해 마을별 피해 실태를 파악해왔다.
조정희(38) 전문위원은 “마을별 피해 실태조사를 벌이면 한 마을의 4·3의 시작과 끝을 볼 수 있게 된다. 행방불명자의 경우에는 행방불명의 유형까지도 분류하는데 이런 작업이 끝나면 한 마을의 4·3 피해 실태가 더 정확하게 드러난다”고 전했다. 김은희 전문위원은 “제주4·3위원회에 신고한 신고서의 오류도 꽤 나타났다. 예를 들어 토벌대에 의해 희생됐거나 총기 오발 사고 등 자기 잘못으로 희생됐는데도 무장대에 의해 희생됐다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 새롭게 밝혀지는 진실들 추가진상조사단이 마을별 피해 실태를 조사하면서 새로운 사실들도 밝혀지고 있다. 1948년 12월 있었던 조천면의 이른바 ‘자수사건’은 관내 전 지역을 대상으로 한 사건임이 드러났다. 이 사건에 연루돼 조천면 주민 100여명이 당시 제주읍 아라리 박성내(건천)에서 총살됐고, 36명은 군법회의에 넘겨져 육지 형무소로 끌려간 뒤 행방불명됐다. 조사단은 이 사건이 9연대의 ‘귀순공작’이라는 의도적인 작전으로 이뤄졌으며 특별부대까지 편성된 사실도 밝혀냈다.
또 1949년 1월17일 400여명이 숨진 북촌리 대학살 사건은 2연대 제3대대장인 정아무개 대위의 지시에 따라 이뤄진 사실이 이번 추가조사에서 확인됐다. 2연대장이 학살 사건을 나중에 알고 명령을 내려 총살이 중지됐다는 기존의 ‘사실’과는 다른 증언도 확보했다. 일제강점기 정 대위와 만주의 관동군 부대에 같이 근무한 경험이 있는 북촌리 인근 마을 청년단장의 총살 중지 요청을 정 대위가 받아들여 중지했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경찰과 교사의 노력으로 신촌리 주민들을 살려낸 사실도 드러났다. 1949년 1월19일 신촌국민학교(초등학교)가 무장대의 습격을 받아 불에 타자 2연대 3대대 군인들이 주민들을 학교에 모두 모이도록 한 뒤 기관총으로 쏘려고 했으나, 조천지서 김순철 순경(서북청년단 출신)이 “나를 향해 쏘라. 내가 책임지겠다”며 김지도 순경, 신촌국민학교 채종철 교사 등과 함께 주민들을 구명했다고 조사단 쪽은 밝혔다.
■ 추가진상조사의 문제점 추가진상조사단의 가장 큰 고민은 보고서가 나올 경우 활용 문제다. 총리실 산하 제주4·3위원회가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 4·3재단에서 작성한 추가진상조사보고서가 과연 진상조사보고서로 인정받을 수 있을지는 불투명한 상태다. 조정희 전문위원은 “추가진상조사보고서가 나온 뒤 이를 활용할 계획이 아직은 없는 것 같다. 총리실 산하 제주4·3위원회가 추가진상조사보고서를 추인해주면 좋지만, 조사단이 활동한 2년 동안 이 문제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없었다”고 말했다. 조사단원들의 신분 문제 또한 보고서의 공신력 문제와 관련이 있다. 김경훈 전문위원은 “추가조사단의 위상이 위탁사업 또는 용역 수준이어서 공신력을 가질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3년 안에 추가진상조사를 끝내겠다고 일정을 정한 것도 한계로 지적된다. 조사단이 시간에 쫓겨 자칫 조사가 소홀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제주/글·사진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제주4·3평화재단 추가진상조사단이 2012년 5월부터 지금까지 벌여온 마을별 피해 실태조사 결과를 담은 보고서 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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