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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역서 들려오는 ‘섬집 아기’…역장님 풍금소리였네

등록 2014-04-13 17:21수정 2014-04-13 21:27

역 앞에서 직접 풍금을 연주하는 득량역장의 모습
역 앞에서 직접 풍금을 연주하는 득량역장의 모습
전남 보성군 득량역장 3명
플랫폼서 동요로 향수 자극
연주 위해 3개월간 레슨 받기도

역 앞엔 70~80년대 거리 조성
사람 북적이자 140가구 마을 온기
13일 오후 1시18분 전남 보성군 득량면 오봉리 경전선 득량역. 승객 40여명을 실은 남도해양관광열차(S-train)가 벚꽃이 지는 승강장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정차를 유도한 유수열(44) 역장이 승객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는 승객들이 ‘맞이방’에 들어서자 근무복을 입은 채 풍금으로 ‘섬집 아기’와 ‘고향의 봄’ 등을 연주했다. 승객들은 신기한 듯 유 역장 주변으로 몰려들어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기도 하고, 낡은 풍금을 쓰다듬으며 아련한 옛 추억에 잠겨들었다.

풍금을 치는 유수열(가운데)·남만종(왼쪽)·고재도(오른쪽) 역장이 지난 11일 경전선 득량역의 플랫폼 풍금 옆에 서 있다.
풍금을 치는 유수열(가운데)·남만종(왼쪽)·고재도(오른쪽) 역장이 지난 11일 경전선 득량역의 플랫폼 풍금 옆에 서 있다.

“오늘은 긴장했나봐요. 평소보다 손가락이 말을 잘 듣지 않았어요. 그래도 승객들이 ‘잘 한다’, ‘옛 생각이 난다’고 칭찬해줘서 힘이 납니다.”

지난 2012년 6월 득량역으로 발령받은 유 역장은 지난 1일부터 승객들한테 감미로운 풍금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교대 근무를 하는 동료 남만종(43)·고재도(41) 역장도 ‘고향의 봄’부터 ‘학교종’이나‘ 비행기’ 까지 동요 다섯곡 정도는 너끈히 연주한다.

유 역장은 “풍금 치는 역장이 되려고 피아노를 잘 치는 조카한테 석 달 남짓 배웠다. 동요를 들은 승객들이 옛 추억에 잠기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더없이 마음이 따뜻해진다”고 말했다. 남 역장은 “처음 며칠은 어떻게 연주를 했는지 정신이 없었다. 요즘은 좀 여유가 생겨서 승객들의 표정이 조금씩 보인다”고 웃었다. 고 역장도 “승객들이 즐거워하니 흐뭇하고 보람을 느낀다. 승객들이 늘어나 득량역이 북적북적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경전선 득량역에 조성된 길이 100m 너비 5m 규모의 70~80년대 추억의 거리. 코레일 제공
경전선 득량역에 조성된 길이 100m 너비 5m 규모의 70~80년대 추억의 거리. 코레일 제공

열차에서 내린 승객들은 맞이방에서 역장의 풍금 연주를 들은 뒤 인근에 1970~80년대를 재현해 놓은 추억의 거리를 돌아봤다. 승객들은 난로 위에 도시락을 탑처럼 쌓아놓은 교실, ‘광주 580원’ ‘순천 280원’ 등 옛 운임표가 붙은 역전을 서성거리며 타임머신을 탄 듯 어린 시절을 더듬었다. 17분 동안 득량역에 머문 열차는 정확히 오후 1시35분이 되자 아련한 옛 정취를 싣고 다시 광주 쪽으로 사라져갔다.

역장들의 풍금 연주는 업무분장표에는 없는 일이다. 역사의 운치를 살려 승객들을 끌기 위해 초등학교 창고와 골동품가게에서 풍금을 들여왔다. 득량역은 경상도(밀양 삼랑진역)와 전라도(광주 송정역)를 잇는 경전선이 개통된 1930년에 문을 연 간이역이다. 지금은 하루에 무궁화호 8편이 다니는 한적한 시골역이다. 역사가 사라질 위기에 몰리자, 코레일과 보성군은 3년 전부터 득량역 재생 사업을 추진했다. 벚나무와 향나무 등 고목 30여 그루가 있는 아름다운 풍경을 살려 역사 주변에 역사공원을 꾸미고, 추억의 거리를 조성했다. 이런 노력으로 득량역을 이용하는 승객은 하루 10명 미만에서 올해 들어 30~40명으로 부쩍 늘어났다.

140가구 주민 260여명이 사는 마을에도 온기가 전해지고 있다. 최병일(63) 오봉리 이장은 “관광열차가 들어오면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니 사람 사는 동네 같다. 평소엔 사람보다 고양이가 더 많았다. 열차가 30~40분은 멈춰야 하지 않나 하는 아쉬움이 있다”고 말했다.

광주/안관옥 기자 ok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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