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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전국일반

잠들지 않는 남도엔 ‘잠들지 않는 남도’가 없었다…67주년 4·3추념식 봉행

등록 2015-04-03 18:53

“내년부턴 못오커라(오지 못하겠어). 누게 이젠 오젠도 안허여(누구 이제는 오려고도 안해).”

차가운 공기 속에 표지석(비석)에서 전날 세차게 내린 비를 닦아내고, 깡마른 손으로 감귤을 꺼내 단 위에 올려놓던 올해 85살의 등굽은 배원경(여·제주시 애월읍 봉성리)씨는 이렇게 말했다. 마을에서 1시간 남짓 버스를 타고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을 찾아 위패봉안소와 행불인 표지석을 찾아 귤을 올려놓고 참배했다. 표지석에는 아직도 찾지 못한 오빠와 숙부가 모셔져 있다. 위패봉안소에는 아버지와 시아버지, 시아주버니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전날에는 태풍처럼 강한 비바람이 몰아쳤다. 새벽녘 들어 바람이 다소 잠잠해졌지만 위령공원의 풀과 표지석들은 젖어있었다. 한라산 자락에 스며든 짙은 안개는 차가운 공기와 함께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에 내려앉았다.

제67주년 제주4·3희생자추념식이 3일 오전 10시 행정자치부가 주최하고 제주4·3평화재단이 주관해 제주4·3평화공원에는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한 노인들의 모습이 많이 눈에 띄었다. 제주도는 야외행사 여부를 결정짓지 못하다 바람이 잦아들고 빗발이 약해지자 이날 오전 6시가 돼서야 야외행사로 치르기로 결정했다.

이날 오전 10시 봉행된 추념식에는 제주도 전역에서 찾은 유족과 도민 등 1만여명이 참석했다. 4·3 경험을 직접 얘기할 수 있는 세대들은 이제 80줄에 들어서고 있다. 추념식이 거듭될수록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줄어들고 있다. 이날도 200~300m 떨어진 위령제단이 있는 곳까지 가다가 앉아 쉬는 등굽은 할아버지·할머니들이 눈에 띄였다. 앞으로 10년 정도 지나면 4·3경험세대들은 더 이상 추념식에 참석하지 못할 수도 있다.

김문자(여·사진·애월읍 어도리)씨는 4·3 나던 해 2살이었다. 아버지를 포함해 아버지 형제 4명이 희생됐다.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행방불명됐다. 남자들의 씨가 말라버린 집안에 언니와 둘이 살아남았다.

언니와 함께 오기로 했다가 핸드폰 배터리가 나가는 바람에 연락을 하지 못해 혼자 행방불명인 표지석을 찾아 제물을 차려놓고 참배했다. “웃뜨르(중산간 지역) 산 죄로 집구석은 집구석 대로 망해버리고…. 애통한 마음을 누구에게 말할 수 이수과(있겠습니까). 사정이 비슷한 사람이 부지기순데”라고 했다. 김씨의 아버지는 다른 지방 형무소에 끌려갔다가 한국전쟁이 일어난 해 행방불명됐다. 당시 나이 25살 때였다.

제주시 도평리가 고향인 신아무개(73)씨는 5살에 4·3을 만났다. 하지만 어렴풋하게 ‘그날’이 생각난다고 했다. 일본 오사카에 살던 33살의 신씨의 부친은 해방이 되자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4·3이 나고 마을마다 성담을 쌓고 청장년들이 주야로 보초를 섰다. 신씨의 부친은 보초를 서다 졸았고, 그 사이에 뿌려진 삐라가 발견됐다. 그리고 얼마 없어 집에서 점퍼를 입고 나간 것이 신씨가 마지막 본 아버지의 모습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하려고 여기저기 알아봐도 신원조회에 번번이 걸려 취직하지 못했어. 연좌제 때문이지. 그때는 시국이 너무 험악해서 아무 말도 못했어.” 신씨는 “아이들은 여기(4·3평화공원) 안와. 나나 다니다가 말지”라며 말끝을 흐렸다.

이날 추념식에서는 애초 식전행사 때 부르기로 했던 4·3노래 ‘잠들지 않는 남도’와 ‘애기 동백꽃의 노래’가 빠져 논란이 일고 있다.

제주도는 지난달 27일 제주4·3희생자추념식 준비상황 최종보고회 때 식전행사로 제주도립제주합창단과 제주도립서귀포합창단, 제주도립서귀포관악단 등이 참가하는 노래공연에서 이들 노래 2곡과 제주4·3평화재단이 전국 공모를 거쳐 선정된 제목이 같은 ‘빛이 되소서’2곡, 진혼곡 등 모두 5곡을 부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정작 추념식 본행사에 앞서 치러진 식전행사에서는 ‘잠들지 않는 남도’와 ‘애기동백꽃의 노래’가 제외되고 ‘비목’과 ‘그리운 마음’이 추가됐다.‘비목’은 한국전쟁 당시 전사한 무명용사의 돌무덤을 보고 느낀 슬픔을 표현한 곡으로 알려져 있다. 이 노래는 전날 4·3전야제에서도 불리었다. 국민 애창곡이지만 4·3과는 관계없는 노래다.

반면, 제외된 2곡은 4·3행사 때면 사실상 추모곡으로 불리어온 노래들이다. 가수 안치환씨가 4·3진상규명운동 초기인 1988년 만든 ‘잠들지 않는 남도’는 4·3의 아픔과 분노가 들어있다. 제주 출신 민중가수 최상돈씨가 만든 ‘애기동백꽃의 노래’(제주민예총 블로그에서 감상할 수 있다. http://blog.daum.net/jepaf/137)는 애잔하고 서정적인 음률로 제주지역에서는 널리 알려진 노래다.

누리꾼들은 “선곡된 노래마저 부르지 못하게 하는게 국가추념일 지정의 이유였는가? 한국전쟁의 전사자들을 기리는 노래가 군·경에 의해 학살당한 원혼들을 위로하기에 적절한가? 노래마저 부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예의없는 것을 넘어 유족들을 능멸하는 짓이다”고 비판했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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