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사건 직후라 쉬쉬…최근 공개
추진위 “4·3 희생자로 신고도 안돼”
추진위 “4·3 희생자로 신고도 안돼”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14일 오전 10시.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표선초등학교 운동장 남쪽에 서 있는 소나무 위에는 많은 학생들이 올라가 놀고 있었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학생들이었다.
이때 6학년 학생이 이상한 물체를 가지고 와 소나무 밑에서 이들이 보는 앞에서 돌로 쪼았다. 이 물체가 포탄이라는 것은 그 누구도 몰랐다. 순간 ‘쾅’ 하는 굉음과 함께 주위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학생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졌고, 주변은 쑥대밭이 됐다.
이 사고로 초등학생 20여명이 즉사하고 10여명은 부상 등으로 치료를 받다가 숨지는 등 모두 30여명의 학생들이 목숨을 잃는 참사가 일어났다. 사고 직후 제주시에 있는 제주의료원 일부가 학생들을 치료하기 위해 학교로 옮겨올 정도였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이 사고를 입 밖에 내지 못했다. 4·3 사건의 여파가 계속되고 있었고, 한국전쟁 직후인 전시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표선초등학교에는 4·3 진압부대인 해병대 1개 소대가 3개월간 주둔했다. 포탄은 이들이 가져온 것이었다.
사건 기록도 없이 묻힐 뻔하던 이 사건은 <표선교 100년사>(1909~2009)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일부 유가족들이 진상을 추적하면서 일반에 공개됐다.
28일 오전 이 학교 운동장에서는 위령탑 건립 추진위원회와 학교 총동문회가 주관하는 위렵탑 제막식(사진)이 65년 만에 처음으로 열렸다.
이들은 추도문을 통해 “수많은 어린 생명들이 희생됐으나 65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이들에 대한 추모글 하나 없음을 부끄러워하며 뒤늦게나마 동문과 유가족들의 정성과 뜻을 모아 위령탑을 세우게 됐다. 신상이 파악된 희생자들을 정리하고, 추후 확인이 되는 대로 올리겠다”고 했다.
강귀민(70) 위령탑 건립 추진위원장은 “학생들이 잘못해서 죽은 게 아니지 않은가. 군부대에서 버리고 간 포탄이 폭발하면서 많은 학생들이 희생됐다. 이것을 국가가 팽개쳐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해 사건을 추적하게 됐다. 4·3 토벌에 나섰던 군부대의 폭발물로 희생됐지만 4·3 희생자로 신고조차 되지 않은 상태”라고 말했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사진 표선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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