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를 꾸짖고 역사의 아픔을 보듬으려고 시민들이 만든 평화의 소녀상이 충북 청주에서 씁쓸한 여름을 보내고 있다.
3일 오후 청주시 북문로(중앙동) 청소년광장 북쪽 모퉁이에 앉은 평화의 소녀는 청소년광장을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 무릎 위에 올려놓은 흰 꽃다발이 오히려 더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빈 옆자리에도 역시 흰꽃 한 송이와 태극기가 놓여 있지만 쓸쓸해 보이긴 매한가지였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는 소녀상 뒤의 글귀가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지난달 15일 막을 벗은 소녀는 20일째 이렇게 외롭게 앉아 있다. 소녀가 슬픈 이유는 이 자리를 떠나라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일부 청소년단체와 청주시는 청소년광장 조성 취지와 법에 어긋난다며 소녀의 이사를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이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생각은 다르다. 청주시 중앙동 주민자치위원회는 3일 ‘평화의 소녀상 설치 요청서’를 청주시장과 청주시의회 의장에게 보냈다. 중앙동 새마을부녀회뿐 아니라 청주시주민자치협의회장 등 청주지역 주민자치위원장 20여명도 소녀상을 이곳에 그대로 둘 것을 건의했다.
진창수 중앙동 주민자치위원장은 “소녀상이 설치된 뒤 학생들이 찾아와 소녀와 사진을 찍는 등 친근하게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 명소가 되고 있다. 역사의 아픈 상처를 공감·위로하는 시민의식의 장이 될 수 있게 소녀상을 지금 이 자리에 둬야 한다”고 말했다.
앞서 광복회 충북지부, 민족문제연구소 충북지부, 문화사랑모임 등으로 이뤄진 ‘충북 평화의 소녀상·기림비 시민추진위원회’는 지난 5월부터 시민 2000여명한테서 모금을 해 평화의 소녀상을 만들었고, 지난달 15일 시봉식을 했지만 이전 요구 때문에 변변한 제막식조차 하지 못했다.
정지성 추진위원장은 “청주 금천고·세광고·대성여고 등 청주지역 고교 학생회 20여곳이 모금에 참여하는 등 시민·학생의 뜻을 모아 만든 소녀상이다. 청소년단체 등이 청소년광장 조성 취지와 소녀상의 성격이 맞지 않는다거나 청소년의 소녀상 훼손 우려를 제기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권성옥 청주시 청소년팀장은 “오는 8일 청소년단체, 주민자치위원회, 소녀상 추진위 등과 협의한 뒤 새로운 대안을 제시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평화의 소녀상이 ‘제2의 노무현 전 대통령 표지석’(사진)이 될 수 있다는 관측마저 나오고 있다. 이 표지석은 2009년 5월 노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충북 시민들이 낸 성금 400여만원으로 제작됐지만 6년째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애초 합동분향소가 운영됐던 청주 상당공원에 설치하려 했지만 보수단체·청주시 등의 반대로 무산됐다. 이후 2년여 동안 한 농가 창고에 보관되다, 2011년부터 청주시 마동창작마을 한켠에 쓸쓸히 서 있다. 옛 대통령 휴양지였던 청남대가 유력한 후보지로 거론됐지만 충북도가 미적거리는 사이 이마저도 없던 일이 됐다.
오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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