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심마니 잘 잤느냐 지난밤 꿈속에서 / 산신령이 하신 말씀 귓가에 새롭구나 / 산삼은 이 땅의, 이 땅의 뿌리요 배달의 정기 / 조선은 산삼밭 산삼을 심자 삼 심자 / 심봤다 땅땅땅 땅땅땅 / 삼 심자 이 나라 이 땅에, 이 나라 이 땅에.”
지난 10월의 마지막날을 충남 서천의 한 바닷가에서 모닥불로 밝힌 50여명의 일행이 전세버스에 오르더니 입 모아 노래를 불렀다. 이름하여 ‘농심마니의 아침’이다. 앞에 서서 선창을 하는 농심마니의 대장, 박인식씨가 직접 작사를 했고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변규백씨가 작곡을 했다. 서천군 판교면 상좌리 백골산으로 58회째 산삼을 심으러 가는 길이다.
“회원 자격은 따로 없어요. 농심마니의 노래는 기억하되, 삼을 심은 자리는 잊어버리면 됩니다.”
1987년부터 해마다 봄가을 두차례씩 꼬박꼬박 심었으니 올해 농심마니 29년째다. 초기엔 80여명, 많을 땐 150명 넘는 인원이 함께했다. 연인원으로 어림잡아 2천명쯤 심마니를 배출했다. 하지만 이들은 한번도 “심봤다”를 외쳐본 적이 없다. 이들이 심어놓은 산삼이 잘 자라고 있다는 풍문은 종종 들리지만 실제로 다시 찾아가서 확인한 적도, 산삼을 캐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이름의 ‘농’에는 농사(農)만이 아니라 ‘벙어리’(聾啞·농아)의 금기도 담겨 있는 셈이다.
산악인 소설가 박인식씨와 문화동지들
‘뿌리찾기’ 공부하다
“민족정기 심자”
1987년 첫 인삼재배지 화순에서 시작
심마니 박재영씨 ‘묘삼 4만주’ 무상기증
서천 백골산에서 29년째 58회 입산제
내년 30돌 ‘어인마니 이덕영’ 추모집
이윽고 예부터 은광석이 나는 골짜기여서 지명이 유래했다는 백골산에 이르자, 이상철 총무를 비롯한 준비팀들이 바리바리 짐을 들고 앞장서 오른다. 입산제 채비를 하는 것이다. 제관을 맡은 남정네들이 익숙한 몸짓으로 흰 광목 두루마기와 검정 두건을 차려입는데, 한쪽에서 떡과 돼지머리 등으로 상을 차리던 이들 사이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음식 보따리에 넣어뒀던 북어와 과일 몇가지가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새벽녘까지 술추렴을 하던 이들이 안주로 꺼내 먹었다는 ‘증언’이 이어졌다. ‘범인(?)’을 자처한 김명성(아라아트 대표) 대원이 대용품으로 챙겨 온 서천 특산 김과 반건조 박대를 내놓자, 박 대장이 안주 심부름을 시켰으니 자신이 ‘주범’이라고 실토해 한바탕 웃음꽃이 피었다. 불경한 사고였으되 누구도 불쾌하지 않은 즐거운 소동이었다.
그러고 보니 농심마니의 기원에는 애초부터 ‘농담’(弄)의 기운도 깃들어 있었다. “82년쯤인가 후배들과 오대산에 갔던 때였어요. 15살 때부터 산을 타기 시작해 20여년 동안 산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는데 문득, 산삼은 한 번도 못 봐서 섭섭한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다 거짓말처럼 산삼밭을 발견했어요. 그런데 ‘심봤다!’ 소리가 나오지 않는 거예요. 무려 13포기니 억대의 횡재여서 욕심이 생긴 거죠. 나중에 혼자 다시 가보니 산삼은커녕 돌단풍밭이었죠. 부끄러운 마음에 그때부터 혼자 산삼 공부를 했지요.”
박 대장이 농심마니 새내기들에게 들려주는, 산삼 심기 운동을 결심하게 된 드라마틱한 일화다. 70~80년대 술꾼들의 성지였던 피맛골 ‘시인통신’에서 ‘3대 입담가(구라)’로 꼽히기도 했던 그이기에 ‘믿어도 그만, 말아도 그만’이다.
하지만 85년 푸른울릉독도가꾸기모임 초대 회장이자 발해뗏목 대장 이덕영씨를 만나면서 시작된 그와 농심마니의 산삼 심기 운동은 거짓 없는 역사가 됐다. 그 무렵 최성각·김홍성·박세경씨 등 문화예술계 친구들과 함께 뿌리 찾기 공부모임 ‘풍’을 하면서 강사로 초청한 이 대장을 통해 “산삼을 심어 우리 땅의 민족정기를 되살리자”는 결의를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학창 시절 공부를 가장 싫어했던 말썽꾸러기들” 80명이 모였다.
농심마니는 87년 3월, 가장 효능이 뛰어났던 백제삼의 주산지이자, 조선 중기 국내 처음으로 인삼을 재배했던 전남 화순의 모후산에서 첫 삽을 떴다. 역시 이씨의 주선으로 산삼씨와 묘삼을 무상으로 제공해준 강원도 속초의 3대째 심마니 박재영씨는 지금껏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그 덕분에 어느덧 4만주 넘게 묘삼을 심었으니 전국이 산삼밭이 되고 있는 셈”이라고 농심마니들은 고마움을 전했다.
내년 30돌을 맞는 농심마니는 할 일이 많다. 첫 산행 때부터 제작해온 ‘농심마니’ 회보를 모아 <30년사>를 정리하는 것이다. 초창기 대부분 문화예술인들이 회원으로 참여한 까닭에 농심마니의 회보는 그 자체 당대 최고 수준의 문예지로 분량도 두툼했다. 제법 인기를 끌어 정작 지금 소장본이 빠진 해도 많다. 그래서 회보나 사진 등 사료 찾기 제보를 받고 있다.(010-5327-7918·
cheol7918@hanmail.net)
그런데 박 대장은 개인적으로 한 가지 과제가 더 있다. 어인마니(으뜸 심마니) 고 이덕영의 추모집을 쓰는 일이다. 이씨는 발해 창건 1300년을 맞은 98년 1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해 1300호’ 뗏목을 타고 발해의 해상무역로를 따라 일본 오키섬까지 갔다가 뗏목이 좌초돼 50살에 불귀의 객이 됐다. “함께 뗏목을 타기로 약속했는데 마침 프랑스 체류 중이어서 동행을 못해 더 한스러웠다”는 박 대장은 20돌을 맞은 농심마니와 함께 2006년 울릉도 이 대장의 생가 터에 추모비를 세우기도 했다.
언제부턴가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산삼 캐는 심마니 모임이 유행하고 있지만, 농심마니들은 개의치 않는 눈치다. “30년 묵은 산삼이 됐으니 귀한 목숨을 구하기도 하겠지요. 누구든 필요한 사람에게 쓰이면 고마운 일입니다.”
서천/글·사진 김경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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