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총장 직선제 사수를 외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현철 부산대 교수. 김봉규 선임기자
국립대 총장 직선 요구하며 투신
부산대 동료들 ‘평사리 송사리’ 재출간
“고 교수 염원하던 가치 지킬 것”
부산대 동료들 ‘평사리 송사리’ 재출간
“고 교수 염원하던 가치 지킬 것”
“마음도 머리도/ 아주 무게를 더할 때/ 혼자 찾은/ 고향 같은 하동 평사리,/ 내가 발 딛고 있는, 토지/ 서희는 어떻게 견뎌왔던가./ 힘든 세월/ 비틀어진 나무를 본다./ 바람 찬 겨울일수록/ 잔잔한 개울/ 흑사리 홍사리 화투패처럼/ 쉽사리 휩쓸리는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살얼음 얼음물 속/ 흙자갈 속을/ 자갈자갈 헤치며 떠다니는/ 평사리 송사리 같은 것./ 내 어찌 여기서 끊겠는가./ 그동안 어렵사리 길들여 온/ 지겨운 이 길을/ 흙먼지 날리는 이 길을/ 헤엄쳐 가지 않겠는가.”(고현철 <평사리 송사리>중에서)
지난 8월 국립대 총장 직접 선출 보장을 요구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현철(54) 부산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의 뜻을 기리고 실천하려는 활동이 잇따르고 있다.
부산대 국어국문학과는 고 교수가 생전에 발간한 시집 <평사리 송사리>(도서출판 전망·사진)를 다시 발간했다. 이 시집은 2013년 2월 1000권을 초판 인쇄했다가 지난 9월25일 500권이 다시 나왔다. 고 교수의 시집이 2년8개월 만에 다시 나온 것이다.
<평사리 송사리>가 재발간된 것은 고 교수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시를 읽고 싶어하는 이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시집의 표지 그림은 교사인 고 교수의 아내가 직접 그렸다. 시집은 4부로 구성됐는데 고 교수의 대표작인 ‘평사리 송사리’와 ‘나의 외판업’, ‘명궁’, ‘감각’, ‘심연’ 등 고 교수의 다양한 시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작품 88편이 실렸다.
다시 인쇄한 <평사리 송사리>시집은 거의 동났다. 홍보를 하지 않았는데도 고 교수가 몸담았던 부산대 인문대 전체 교수 80여명이 구입하는 등 500권이 서점 등에서 팔렸다. 한국작가회의 부산지회에서 20여년 동안 고 교수와 함께 활동했던 ‘도서출판 전망’ 서정원 대표(한국작가회의 부산지회장)는 “요즘 고인의 평론집을 찾는 이들도 있다. 고인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 책이 팔리는 것을 보니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그는 “다시 발간한 시집의 인세는 유족한테 전달하고 대부분의 수익금은 고 교수 추모사업에 사용하겠다”고 덧붙였다.
고인의 시집을 뒤늦게 받아든 이들은 고 교수를 그리워했다. <평사리 송사리>재발간에 앞장섰던 이재봉 부산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시라는 게 평소에는 그냥 그렇게 읽히다가 그 사람의 삶과 연결되면 다르게 읽힌다. 고인이 떠나고 나니 예전에 읽었던 시가 새롭게 와 닿는다”고 말했다.
고교 문예부에서 고 교수와 함께 활동했던 동길산 작가는 “고 교수는 시를 통해 우리 시대 속살을 우회적으로 드러냈다. <평사리 송사리>는 고 교수의 20여년 시작 활동을 압축한 시집이며 고 교수가 추구한 문학의 원형집이라고 생각한다”며 시집 재발간을 환영했다.
1991년에 창간한 전국 유일의 비평 계간지 <오늘의 문예비평>은 곧 나올 2015년 겨울호에 동길산 작가가 고 교수를 회고하며 쓴 글 2편과 고 교수가 쓴 비평을 분석하는 글 1편을 싣는다.
고 교수의 뜻을 이어받아 후퇴하고 있는 민주화를 사수하는 활동을 하겠다는 움직임도 일어나고 있다. 한국작가회의 소속 작가 300여명은 21~22일 부산에서 열린 ‘부산작가회의 30주년과 한국작가회의 부산대회’에서 선언문을 내어 “우리는 온 힘을 쏟아 박근혜 정부가 만든 명예의 화관, 권력의 사슬을 떼어내 버릴 권리를 행사한다”고 밝혔다. 또 부산의 학자·언론인·시민사회단체 관계자 등 456명은 18일 부산시청 들머리에서 “고 교수가 염원했던 진정한 민주주의의 가치를 계속 지켜나가겠다”고 선언했다.
고 교수는 부산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1999년 이 대학 교수로 임용됐다. 무크지 <지평>에 시를 내 등단한 그는 8월17일 “총장 직선제를 사수하자.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해서 희생이 필요하다면 감당하겠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부산대 본관 3층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끊었다. 올해 총장 선출 방식을 간선제로 바꾸려 했던 부산대는 고 교수의 죽음을 계기로 지난 17일 직접 투표로 제20대 총장 임용 후보자 추천선거를 벌였는데 전호환 교수가 1위로 뽑혔다.
김광수 기자 kskim@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