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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전국일반

보이나요, 징용광부·군위안부의 칠흑같던 그날들이…

등록 2015-12-20 20:59수정 2015-12-21 10:29

지역 현장 I 일제 강제동원 역사관 개관

징용·징병 귀국선 돌아온 부산에
7만여㎡터 위 506억 들여 7층 완공
일제의 비인도적 강제동원 실태
조사·기록해 공개하는 첫 장소

피해자들 기증자료·육성 등 담아내
강제동원 장소 연출한 모형물 12개
“만행 고발 역사관 자손만대 보존
다시는 나라 빼앗기는 일 없어야”
조선인 노무자 숙소로 이용됐던 징벌방에 들어서니 비좁고 딱딱한 마룻바닥에 이불도 없이 잠을 잤던 당시의 모습이 떠올랐다. 탄광 모형물에선 누운 채로 좁은 공간에서 석탄을 캐는 조선인의 모습이 발길을 붙잡았다. 저런 상태에서 아침 7시부터 12시간 동안 일하면 깊은 병을 얻거나 사고가 났을 때 현장에서 숨질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인 노무자 숙소로 이용됐던 징벌방에 들어서니 비좁고 딱딱한 마룻바닥에 이불도 없이 잠을 잤던 당시의 모습이 떠올랐다. 탄광 모형물에선 누운 채로 좁은 공간에서 석탄을 캐는 조선인의 모습이 발길을 붙잡았다. 저런 상태에서 아침 7시부터 12시간 동안 일하면 깊은 병을 얻거나 사고가 났을 때 현장에서 숨질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 1928년 경남 사천에서 태어난 황삼봉(87)씨는 15살이던 1943년 2월 또래 학생 100여명과 함께 강제 징용을 당했다. 배를 타고 일본에 도착해 여섯달 동안 교육과 훈련을 받았다. 이어 일본 북쪽 홋카이도 제철소로 보내졌다. 2년6개월 동안 강제 노동을 한 뒤 1945년 8월26일 아오모리현에서 연락선을 타고 귀국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으며 2남3녀를 키웠다. 그는 “당시 제철소에서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며 일한 대가로 받은 임금 일부를 강제로 떼 보험과 적금을 들도록 했는데 아직 돌려받지 못했다. 일본 정부가 빨리 해결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2 일본 히로시마에서 태어난 김환호(93)씨는 23살이던 1945년 미군이 점령한 오키나와를 다시 탈환하라는 명령을 받고 부대원들과 오키나와 근처까지 진격했으나 미국 군함의 함포사격을 피해 근처 섬에 주둔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그는 1945년 10월 미국 군함을 타고 아버지 고향인 부산에 도착한 뒤 막일 등을 하며 3남1녀를 키웠다. 그는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심하게 차별받았고 강제 징병을 당했다. 해방 뒤 망설임 없이 아버지의 고향을 찾았다”고 말했다.

■ 세계 유일의 일제강제동원역사관

일본군 위안부 모형물에선 생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김복득(97) 할머니의 피맺힌 육성을 들었다. 침상과 수건 및 놋그릇을 보노라면 고통 속에 울부짖는 소녀들의 외침이 느껴졌다.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소녀의 삶을 애니메이션으로 그려낸 <그날의 기억>은 가슴을 아리게 했다.
일본군 위안부 모형물에선 생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김복득(97) 할머니의 피맺힌 육성을 들었다. 침상과 수건 및 놋그릇을 보노라면 고통 속에 울부짖는 소녀들의 외침이 느껴졌다.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소녀의 삶을 애니메이션으로 그려낸 <그날의 기억>은 가슴을 아리게 했다.
세계인권의 날인 지난 10일 오후 부산 남구 대연동 부산문화회관 근처 당곡공원에 60~90대 300여명이 비가 쏟아지는 험한 날씨에 모여들었다. 일제강점기 군인, 군무원, 일본군 위안부, 노무자 신분으로 일본 등지로 끌려간 피해자들과 유족들은 이날 열린 일제강제동원역사관 개관식에 참석하러 불편한 몸을 이끌고 부산을 찾았다. 참가자들은 “일제의 강제동원 만행을 널리 알리는 역사관이 이제야 만들어졌다”며 감격했다. 한 참가자는 개관식이 끝난 뒤 “왜 대통령이 참석하지 않느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일제강제동원역사관은 1939~1945년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식민지배를 당했던 국가가 전범국인 일본제국주의의 비인도적 강제동원의 실태를 조사하고 기록해 공개하는 최초의 장소다.

국무총리실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가 2010년 12월에 착공해 지난해 5월 완공했으나 역사관 관리 주체를 두고 지원위원회와 행정자치부가 갈등을 빚고 시범 운영도 길어져 개관이 1년7개월 미뤄지다가 해방 70돌을 맞은 올해 마침내 일반에 공개됐다.

일제강제동원역사관은 7만5465㎡ 터에 506억원을 들여 7층으로 지었다. 4~5층에 국무총리 소속 지원위원회가 수집한 강제동원 관련 문서와 명부, 사진 등 354점과 전시패널 452점, 영상물 43개가 전시되고 전시 모형 12곳 등이 설치됐다. 6층은 기획전시 공간, 1~3층은 전시 못한 기록물을 보관하는 수장고와 연구·교육시설 등으로 활용된다.

일제강제동원역사관이 부산에 자리를 잡은 것은 일본제국주의가 전쟁터와 전쟁물자를 생산하는 공장 등으로 강제 징용·징병을 했던 동포들이 해방 뒤 귀국선을 타고 돌아온 곳이 부산인데다 강제동원 피해자의 22%가 경상도 출신이기 때문이다.

일제의 강제동원은 일제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뒤 전쟁물자와 군인, 자금이 부족하자 이듬해 국가총동원법을 만들어 1945년 패망 전까지 계속됐다. 이 기간 강제동원된 조선인이 782만여명으로 추정된다. 당시 국내 인구가 2200만~2500만명인 것을 고려하면 3명 가운데 1명꼴로 강제동원된 셈이다.

■ 일제강제동원역사관을 둘러보니

일제강제동원역사관은 부산 남구 대연동 부산문화회관 근처에 7층으로 지어졌다. 4~5층이 전시실이다. 
국무총리실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 제공
일제강제동원역사관은 부산 남구 대연동 부산문화회관 근처에 7층으로 지어졌다. 4~5층이 전시실이다. 국무총리실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 제공
4층 제1전시실 ‘기억의 터널’에 들어서니 오른쪽 벽면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인물들이 맞이했다. 70여년 전 강제로 끌려가는 10~20대 청년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떠올랐다. 다시 못 돌아올지도 모르는 곳으로 끌려가는 그들을 생각하니 발걸음이 무거웠다.

강제동원의 유형을 소개하는 곳에는 군인·노무자·군무원으로 끌려갔던 피해자들이 기증한 수첩과 증명서, 복장 등이 전시됐다. 일본군 위안부 실상을 알리는 곳에선 독립기념관에 소장돼 있는 일본 군인의 일기 복제판이 발길을 붙잡았다. 이 일기는 중일전쟁에 참가했던 일본 군인이 참혹한 전쟁 상황과 군 ‘위안소’를 기록했는데 그의 아들이 공개해, 일본이 부정하며 배상을 거부하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가 실제 존재했음을 증명했다.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이 어디로 끌려갔는지는 알기 쉽게 지도로 표현했다. 일본뿐만 아니라 중국·동남아시아·사할린·쿠릴열도를 넘어 중·서부 태평양까지 끌려갔다. 강제동원에 항거해 현지 작업장에서 일어난 조선인 태업·파업 건수가 1784건에 이르고 조직을 만들어 탈출을 시도하거나 탈출에 성공해 광복군에 참여한 조선인들의 투쟁도 잘 소개했다.

해방 뒤에 조국으로 돌아온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피폐한 삶과 아직도 귀환하지 못한 국외 동포들이 있다는 글을 보면서 안타까움과 함께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처우 개선과 진상 규명에 나섰으면 하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4층을 지나 5층의 제2전시실로 올라가는 계단 근처엔 강제동원 피해자 이름과 강제동원 유형을 검색하는 컴퓨터가 있었다. 벽면에는 강제동원된 사람들이 당시에 찍었던 사진들이 걸려 있었고 자료를 기증한 피해자와 유족 이름이 대형 화면에 나타났다.

5층의 제2전시실엔 강제동원됐던 곳을 연출해 만든 모형물 12개가 설치됐다. 제2전시관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마주한 ‘시대의 거울’은 독특했다. 철길을 걸어가면 철길 옆의 벽면에 새겨진 피해자들의 이름 위에 걷는 사람의 그림자가 겹쳐졌다.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 오욕의 역사를 지금 우리가 해결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밀려왔다.

강제 징용 노무자 황삼봉씨는 “자손만대 일제강제동원역사관을 잘 보존하고 다시는 나라를 빼앗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일본은 군 위안부 문제를 조속히 해결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아버지가 강제 징용을 당했던 홍성옥(84·부산 개금동)씨는 “늦었지만 일제강제동원역사관이 개관해서 좋다. 아들이 할아버지의 희생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부산/글·사진 김광수 기자 k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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